사진.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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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SR 정혜원 기자] 중국의 보조금 공세로 한국이 선두를 달리고 있는 산업에서 ‘초격차’ 유지가 어려워지고 있다.

8일 업계에 따르면 중국의 반도체 굴기는 미국과의 ‘반도체 패권’ 전쟁과 맞물려 한층 격화될 조짐을 보이고, 카타르 LNG선박 수주 경쟁에서도 중국 후동중화조선이 수주 첫 신호탄을 터뜨리면서 초격차에서 ‘초’가 퇴색되고 있다. 한국의 다른 선도 기술인 디스플레이, 전기차 배터리 등도 추격 위협을 받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지난해 11월 발간한 '반도체 시장 무역 왜곡 보고서'를 통해 2014년부터 2018년 사이 중국이 자국의 반도체 기업에 지원한 금액이 48억5400만달러(2017년 환율 기준 약 5조4850억원)에 이른다고 밝혔다.

중국 1위 반도체 회사 SMIC는 정부 보조금이 매출의 30%를 넘어선 수준이며 순이익의 몇 배가 되는 보조금으로 ‘굴기’한 회사도 있다. 장전과기와 같은 반도체 패키지 회사인 퉁푸 마이크로 일렉트로닉스(通富微电)는 약 278억원의 보조금을 받아 순이익의 8배를 훌쩍 넘겼으며, 같은 기간 칩 디자인 회사인 항저우 실란 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士兰微)는 같은 기간 약 259억원을 받아 순이익의 무려 10배에 달하는 보조금을 받았다.

OECD는 "(중국이 자국 반도체 기업에 정부 보조금을) 상업적 고려 없이 지원해 공정한 경쟁 환경을 해치고 있다"고 비판했다. 2018년 미 무역대표부(USTR)도 '중국의 불공정 무역 관행'에 대한 관세 부과 품목으로 반도체를 꼽은 바 있다.

정부 지원금 ‘성장 기회’를 샀다...조선업도 따라잡힐라

이같은 보조금 공세로 중국은 한국의 조선업도 따라잡았다. 지난달 조선업계의 이목이 쏠렸던 카타르의 대규모 LNG선박 수주 경쟁은 한국 조선사들의 압도적인 승리가 예상됐었다. 대표적인 고부가가치 선박인 LNG선박은 현대중공업, 삼성중공업 등 한국 조선사들이 초격차를 확보한 부문이었다.

그러나 예상을 깨고 첫 계약이 중국 조선사인 후둥중화조선에게 돌아갔다. 한국 조선3사는 100척 규모의 계약을 체결해 체면은 지켰으나, 조선업계에서는 이미 세계 조선업 지형도에 균열이 생겼다는 평가가 나온다.

LNG선. 사진. 삼성중공업
LNG선. 사진. 삼성중공업

기술력으로만 따지면 한국은 여전히 중국에 비해 4~8년 가량의 기술 우위(격차)를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중국 정부가 ‘선박금융’이라는 전폭적인 지원책을 내밀면서 중국 조선사에 성장의 기회가 돌아가고 있다. 중국 정부와 은행이 외국 선주를 대상으로 신용보증과 선가 절반 이상의 금융지원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은 2010년 글로벌 선박금융 시장에서 6.9%의 점유율을 기록하다 2018년 15.3%까지 점유율을 높이며 독일을 밀어내고 1위 자리를 꿰찼다. 중국 은행들은 자국 조선소에서 건조되는 선박의 경우 선가의 60%에 대해 금융을 제공하고, 중국 수출입은행의 경우 중국 내 건조 비중이 50%가 넘는 프로젝트에 대해서는 선수금을 대출해준다.

코로나 사태로 글로벌 산업생태계가 흔들리는 와중에 중국이 무서운 속도로 추격하며 우리가 세계 1위를 달리는 '선도 업종'마저 위협하고 있다. 미·중 갈등 심화로 '기술 민족주의' 바람이 불고, 중국이 '기술 자급자족'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있어 우리의 핵심 산업에 대한 추격도 더욱 거세지고 있다.

중국의 보조금 결실, LCD 이어 OLED까지?

국내 양대 디스플레이 제조사 LG디스플레이와 삼성디스플레이는 이미 LCD를 중국 업체에 내주고 차세대 디스플레이 OLED(유기발광다이오드) 시장 개척에 나섰다.

하지만 중국도 OLED 시장에 속속 진입하고 있다. 현재 건설 중이거나 계획 중인 중국의 OLED 생산 라인만 18개이고, 중국 디스플레이 제조사 BOE는 올 1분기 플렉시블 OLED 분야 점유율이 9.9%를 기록했다.

디스플레이 업계에서는 중국이 막대한 보조금 공세로 LCD 기술 수준을 따라잡은 것처럼 OLED 개발에도 보조금이 뒷받침될 경우 다시금 기술 격차가 좁혀질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LG디스플레이는 지난 4월 미디어SR에 “OLED의 기술 진입장벽이 높아 한국을 제외한 다른 업체들이 양산 단계에 진입하지 못하고 있다”고 설명하면서 “중국 광저우 공장이 가동되기 시작하면 전체 패널 공급량도 늘어나고, 실적 개선은 시간문제”라며 자신감을 내비친 바 있다.

일단 OLED 양산이 시작되면 시장 격차를 확실히 벌릴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코로나19로 인한 전방수요 부진, 광저우 공장 가동이 3분기로 연기되는 등의 악재에 직면한 상태다.

중국 디스플레이업계는 이같은 업황 부진에도 투자를 멈추지 않고 있다. 국내 장비업체 공장에는 중국발 수주 소식이 이어지면서 중국으로 갈 제품들로 채워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에 따르면 올해 4~5월 디스플레이 장비 계약은 대부분 중국 업체들이 독식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처럼 중국 업체들은 정부 지원에 힘입어 투자를 멈추지 않고 있다. 지난 17년 새 중국이 한국의 LCD업계를 따라잡게 된 힘은 바로 중국 정부의 막대한 지원금에서 비롯됐다.

반도체 초격차 유지, 양도 질도 놓칠 수 없는데...

반도체 분야에서도 이런 점에 유의해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한국을 포함한 대다수 국가들의 경우 특정 산업이 경쟁력을 확보하지 못하면 정부의 지원 근거도 약화돼 지원금이 줄어든다.

하지만 중국은 적자든 흑자든 상관없이 투자한다. 특정 산업이 기술적 우위를 확보할 때까지, 목표에 도달할 때까지 막대한 보조금을 투자할 수 있다. 중국의 추격에 ‘(초격차를 유지하기 위한) 시간이 없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중국 기업들은 정부의 든든한 뒷배를 타고 성장하고 있다. 중국은 일찍이 2025년까지 170조원을 투자해 반도체 자급률을 70%까지 끌어올리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아울러 중국 정부는 기업에 지급하는 보조금 외에도 이미 자국 반도체 산업을 위해 2014년 1차펀드 1390억위안(23조원)을, 2020년 2차펀드 2042억위안(35조원)을 조성해 투자에 들어간 상황이다. 현재까지 중국은 50개 반도체 사업에 2430억 달러를 투자하는 등 반도체 제조 장비도 폭발적으로 구입하고 있다.

평택캠퍼스 P2라인 전경. 사진. 삼성전자
평택캠퍼스 P2라인 전경. 사진. 삼성전자

비록 중국은 장비와 재료에서 아직 걸음마 단계라, 양산기술도 선진국에 비해 상당히 뒤져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중국이 반도체 설계 단계(팹리스)를 공략해 세계 정상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예의주시해야 한다.

대규모 R&D(연구개발) 투자‧지원을 통해 설계기술부터 확보한 뒤 기존 파운드리 업체 등을 압박해 양산기술을 단계적으로 확보해 나가겠다는 전략이다. 실제로 중국은 반도체 국산화율이 15%선에 그치고 있으나 팹리스 분야는 한국에 앞서고 있다.

이 같은 전략은 양산 기술 격차가 점차 줄어들면서 실제로 효과를 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양쯔메모리테크놀로지(YMTC)는 올 연말 최신 기술에 해당하는 낸드(NAND) 플래시 128단 제품 양산에 들어간다고 밝혔다. 이 시도가 성공한다면 한국 업체와의 중국 업체의 기술 격차는 2년 내로 줄어들게 된다.

이에 삼성전자도 당초 계획에서 급선회했다. 낸드플래시는 삼성전자가 세계 최초로 48단 3D 낸드를 양산하며 가장 앞서가고 있다. 시장점유율도 40.8%를 기록하며 압도적인 선두를 점하고 있는 가운데에서도 지난 1일 추가로 낸드플래시 생산라인을 증설한다고 밝힌 것이다.

또한 삼성전자는 중국과의 격차를 유지할 방패인 160단 이상 7세대 수직구조 낸드(V낸드)를 올해 말 공개할 것으로 알려졌다. D램 의존도가 높았던 SK하이닉스도 낸드 사업을 확대하고 있다. 지난해 개발 완료한 128단 4차원(4D) 낸드를 2분기부터 양산한다. 차세대 제품으로 176단을 연구 중이다.

업계는 중국 후발 업체들과의 경쟁이 본격화하기 전 양과 질을 모두 확보한 초격차로 대응하겠다는 전략으로 평가한다. 삼성전자가 2018년 4분기부터 올 1분기까지 매 분기 5조원 이상의 투자를 지속해오고 있는 것도 이같은 초격차를 유지하기 위한 전략의 일환인 셈이다.

한편 중국은 점차 종합 반도체 회사인 삼성전자의 지위도 위협하고 있다. 중국 최대 파운드리 업체인 SMIC는 화웨이의 스마트폰용 반도체 칩 ‘기린 710A’ 양산에 들어갔다. 이 칩은 화웨이의 팹리스(반도체 설계 전문업체) 자회사인 하이실리콘에서 설계해, 중국 기업이 100% 지식재산권을 가진 첫 반도체다.

최근 트럼프 행정부가 중국에 대패 반도체 수출 규제를 강화한 가운데 향후 미-중 갈등이 심화할 경우 중국은 반도체 국산화에 착수할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이는 곧 한국 반도체 산업이 큰 타격을 입게 되는 상황이다.

이와 관련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도 '트럼프 행정부의 대(對) 화웨이 반도체 수출규제 강화와 시사점' 보고서를 통해 "첨단 반도체 제조능력이 없어 타격을 입은 중국은 이번 경험(화웨이 제재를 위한 수출 규제 강화)을 통해 첨단 반도체 국산화에 박차를 가할 것"이라며 "이들이 제조능력을 갖추게 되면 장기적으로 한국의 반도체 산업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중국과의 기술격차를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고 제언했다.

중국 정부의 지원금...대응책 미리 준비해야

정부 보조금이라는 꼼수 대신 기업 간의 공정한 기술 경쟁이 되려면 장기적으로 정부가 중국의 보조금 지원 실태에 대해 대응을 준비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하고 있다.

KIEP의 또 다른 보고서인 ‘중국의 보조금 현황과 주요국의 대응사례 연구’에서는 “중국의 산업고도화가 개방적이고 공정하며 투명한 방식으로 이루어져야만 중국과의 경쟁이 심화될 산업 분야에서 (한국이) 공정한 참여 기회를 확보할 수 있고 중국의 추격에도 대응할 수 있다”면서,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공정한 경쟁을 저해할 소지가 있는 중국의 보조금에 대한 관심과 현황 파악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보고서는 구체적인 대응 방안으로 중국의 보조금 체계가 매우 복잡‧다양하고 관행에 의한 것도 있어 “보조금의 실태 파악과 체계적인 정보 축적이 중요하다”고 제안했다. 보고서는 아울러 “중국 보조금의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특정 산업, 업종, 지역에 대한 지원이 포함된 정책과 제도, 법규 등 공식 문건의 검토와 더불어 실제 집행 상황이나 관행 등에 대한 모니터링을 병행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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