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좋은 집 말고 살던 데서 살고 싶은 사람들

[데일리임팩트 권해솜 기자] ‘에이징 인 플레이스(Aging in Place)’라는 말이 있다. 직역하면 ‘일정한 곳에서 나이 듦’을 의미한다. 누구보다 익숙한 장소에서 환경·문화적 변화 없이 자연스럽게 나이 들어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노인복지와 주택 정책에 대해 언급할 때 꼭 빠지지 않는 부분이 ‘에이징 인 플레이스’다.

그런데 요즘 분위기로 봐서는 내 집에서 행복하게, 죽을 때까지 살 수 있을지 모르겠다. 재개발·재건축 바람이 탄력 받으면서 서울 대부분의 지역이 들썩이고 있다. 인천 검단시 LH안단테 아파트의 지하주차장 철근 누락 스캔들로 건설업계가 칼바람에 된서리를 맞았지만, 이상하게도 큰 문제가 아닌 듯 재개발 사업 추진은 쉼이 없다.

재개발이 가속되고 있는 지하철 3호선 불광역 근처. 하지만 월세로 생계를 잇는 시니어 세대는 이에 반대하고 나섰다. / 사진 = 권해솜 기자. 
재개발이 가속되고 있는 지하철 3호선 불광역 근처. 하지만 월세로 생계를 잇는 시니어 세대는 이에 반대하고 나섰다. / 사진 = 권해솜 기자. 

지난 17일 서울시가 신속통합기획 민간재개발 후보지 2곳을 선정했다. 대상지는 중랑구 면목 5동 172-1 일대와 성북구 종암동 125-35 일대로 반지하, 침수 취약지역, 정비 시급성 등을 종합 검토해 정했다고 서울시는 밝혔다. 지난 6월에는 불광 8구역(불광동 600번지 일대)이 신속통합기획으로 9년 만에 재개발이 재추진되기도 했다. 지지부진했던 지역과 이번에 선정된 면목동과 종암동 일대까지 신속통합기획 민간재개발 후보지는 총 48곳이 됐다. 이밖에도 도시관리계획, 도시정비형 재개발 등 다양한 이름과 방식으로 추진되는 재개발은 차고 넘친다.

그런데 시가 신속이라는 말을 붙여 사업을 추진해도 3분의 2 이상의 지역 주민이 찬성하지 않으면 사업은 무산된다. 재개발·재건축이 추진되면 너도나도 좋아할 것 같지만 반기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 

서울 은평구의 서울혁신파크도 곧 사라진다.  서울시 발표에 따르면 이곳에 서울시립대 분교가 들어서고 코엑스 규모의 대단위 시설이 건설된다. / 사진 = 권해솜 기자. 
서울 은평구의 서울혁신파크도 곧 사라진다.  서울시 발표에 따르면 이곳에 서울시립대 분교가 들어서고 코엑스 규모의 대단위 시설이 건설된다. / 사진 = 권해솜 기자. 

이OO(72) 씨는 30년 가까이 살았던 은평구 불광 2동에서 녹번동으로 16년 전 이사했다. 가족과 함께 살던 집이 은평뉴타운 ‘불광 7구역’에 포함된 게 계기였다. 아파트 재개발 조합원으로 권리 행사도 했지만, 결국 새 아파트를 포기하고 사는 곳을 옮겼다. 공사기간의 전세 살이가 싫었고, 몇 년이 걸릴지 모르는데, 금전 문제를 잘 해결할 수 있을지 걱정됐다. 지금 사는 집은 근린공원이 가깝고, 이웃들도 좋아서 잘 생활하고 있는데, 또다시 재개발될 것이라는 소식이 들려왔다. 누군가는 좋겠다고 말하겠지만 사실 불편한 것이 한둘이 아니란다.

이씨 가족은 결국 지난 경험에 비추어 달리 표현하지 않고 찬성에 사인했다. 이씨의 마음은 행동과는 달랐다. 이씨는 “재개발은 바라지도 않고 그저 내 집에서 내 의지가 하자는 대로 살아보고 싶다”고 했다. 이씨는 또 “지금까지 재테크에 대해 잘 몰라서 남편이 벌어온 돈으로 내 분수에 맞게 살아왔다”며 “사회 분위기 때문에 떠밀려 다니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하다”고 하소연했다. 재개발이 추진되면 특히 은퇴한 부부는 어찌할 수 없으니, 자식들과 상의하고 결정해야 할 것이라고 이씨는 말했다.

이렇듯 정주(定住)에 의미를 둔 누군가는 국가나 지방정부의 정책으로 인해 권리를 침해당하고 존중받지 못하는 상황에 부닥친다. 그 중심에 시니어가 있다. 별다른 벌이가 없는 시니어가 사는 집이 재개발 지역에 해당한다면 어떨까. 활발하게 사회활동을 하는 시니어라 할지라도 금전적인 뒷받침이 없다면 버티기 힘들다. 아파트를 지을 때 들어가는 비용이 만만치가 않아서다. 최근 신탁사가 개입해 조합장과 조합원 대신 시공사와의 문제 해결, 법, 행정 처리 등을 함께 해결해 준다지만, 돈은 돈대로 들어갈 뿐이다. 조합 구성 초기 단계에서부터 입주할 때까지 생각보다 많은 절차를 밟아나가야 한다. 

나이와는 상관없이 새집에 살고 싶어 하는 마음은 누구나 같다. 처한 상황이 발목을 잡을 뿐이다. 앞서 언급한 불광 8구역이 신속통합 재개발 지역으로 선정됐지만, 그 지역 시니어들이 강경하게 재개발을 반대하고 나섰다는 보도가 은평구 지역언론을 통해 공개됐다. 이유는 생계 때문이다. 그곳에 사는 집주인 혹은 건물주는 월세 등의 수입원이 사라지니 반대할 이유는 충분하다. 재개발하지 않는다면, 꾸준히 수익이 발생할 텐데 헌집 주고 새집 받느니, 받지 않는 편을 택할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지 않을까?

지하철 2호선 용답역. / 사진 = 권해솜 기자. 

다른 지역에 가도 시니어의 상황은 판박이 수준이다. 지난 6월 찾아간 서울 성동구 용답역 일대 용답 1구역 재개발 추진위원회와 용답 2구역 재개발 추진위원회는 재개발에 힘을 싣고자 주민 동의서를 받고 있었다. 

용답동은 서울의 명소로 떠오른 성수동과 근접해 있지만, 분위기가 상당히 다르다. 도시재생사업을 통해 꾸미고 단장했지만, 사이사이 눈에 띄는 집의 구조가 요즘에는 보기 드문 오래된 집들이 많았다. 이곳에서도 개발을 반대하는 이유의 큰 부분이 바로 재개발이 추진됐을 때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시니어 세대의 사정이었다. 

용답 2구역의 한 세탁소에서 만난 황OO(67) 씨는 그런 의미에서 재개발 사업을 반대한다고 말했다. 황씨는 “쉽게 얘기해서 없는 사람들은 다 밀려나고, 집을 갖고 있는 사람도 집만 있을 뿐이지 혜택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특히 불광 8구역과 마찬가지로 집주인 중에는 월세를 받아 살아가는 시니어가 꽤 많이 있다고 했다. 집주인이 2~3개의 월세방을 운영한다고 했다.  동시에 생계가 끊기는 시니어가 상당수일 수 있다고 황씨는 말했다. 황씨는 “재개발을 통해 모두가 살 수 있는 상생 구조라면 모를까, 용답동에 방 몇 개 가지고 월세 운영해 사는 어르신들 생각하면 재개발이 누구를 위해 하는 것이냐고 되물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재개발해서 잘살아 보자는 의미가 되어야 하는데, 결국 돈 있는 사람만 더 잘살게 되는 구조는 아니길 바란다고 했다. 특히 여기에서 밀려나는 사람들은 집 하나에 의존하고 살아온 시니어일 것이라고 강조했다. 

도시재생사업을 통해 단장한 용답역 앞길.  겉보기에는 예쁘지만 주변엔 오래되고 낡은 건물이 많이 있었다. / 사진 = 권해솜 기자. 
도시재생사업을 통해 단장한 용답역 앞길.  겉보기에는 예쁘지만 주변엔 오래되고 낡은 건물이 많이 있었다. / 사진 = 권해솜 기자. 

재개발로 인해 생계가 끊기는 시니어의 문제도 걱정이지만, 돌봄이 필요한 시니어가 다른 지역으로 밀려났을 때의 상황도 감안해야 한다. 힘들고 아파도 오래 살아왔던 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심리적 치유는 사실상 외면당하게 된다. 최근 몇 년간 ‘에이징 인 플레이스’를 구현하기 위해 지방 정부도 골목 안에 보건지소를 세우는 등 의료 돌봄 시스템을 강화해 왔다. 지금까지의 노력이 무색해지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과 우려가 앞선다. 

재개발이 시대의 흐름이고 많은 사람이 원한다면 해야 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이 안에 시니어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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