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임 1주년 앞두고…삼성SDI·삼성SDS, 선임 사외이사제 전격 도입
사외이사에 소집·현안 보고 요구 권한 부여…이사회 견제 기능 강화
글로벌 수준의 경영 투명성 제고…지배구조 체제 재편 위한 모델 확립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24일 중국 텐진에 위치한 삼성전기사업장을 방문해 MLCC 생산 공장을 점검하고 있다. 사진. 삼성전자.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24일 중국 텐진에 위치한 삼성전기사업장을 방문해 MLCC 생산 공장을 점검하고 있다. 사진. 삼성전자. 

[데일리임팩트 변윤재 기자] “오늘의 삼성을 넘어 진정한 초일류 기업, 국민과 세계인이 사랑하는 기업을 꼭 같이 만들자. 제가 그 앞에 서겠다.”

지난해 10월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사장단에게 이 같은 약속을 하며 그룹의 총수에 올랐다. 글로벌 선도기업이라는 명성에 걸맞은 비전을 제시하겠다는 포부였다. 다만 이 회장의 비전은 아직까지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상황. 

그런 가운데 삼성SDI·삼성SDS가 선임 사외이사제를 전격 도입하기로 했다. 이사회의 견제 기능을 강화해 경영 투명성과 전문성을 제고하겠다는 취지다. 그룹의 총수인 이 회장 취임 1주년을 앞둔 만큼, 재계에서는 이 회장의 의지가 반영됐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세계인이 사랑하는 기업’을 목표로 내걸었던 이 회장이 지배구조 개편을 시야에 넣고 있는 게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거버넌스 혁신'(G혁신) 얘기가 나오는 지점이다.

26일 삼성에 따르면 전자계열사인 삼성SDI·삼성SDS는 각각 이사회를 열고 선임사외이사 제도를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권오경 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석좌교수와 신현한 연세대 경영대학 교수가 각각 선임사외이사를 맡는다. 

선임사외이사 제도는 대표이사 또는 사내이사가 이사회 의장을 맡고 있을 경우, 사외이사를 대표하는 선임사외이사를 뽑아 적절한 균형과 견제가 가능하도록 하는 제도다. 사외이사회를 소집하고 회의를 주재할 권한을 갖는다. 경영진에게 주요 현안과 관련한 보고를 요구할 수도 있다. 이사회 운영 전반에 관한 사항을 협의할 뿐더러 이사회 의장과 경영진, 사외이사 간 소통이 원활하도록 중재자 역할도 수행한다. 삼성 관계자는 데일리임팩트에 “이사회가 견제 기능을 충분히 할 수 있게 보장하기 위한 것”이라며 “지배구조(거버넌스) 체제를 재편해 경영 투명성을 제고하고 사회와의 소통을 확대하기 위한 차원”이라고 강조했다.

국내 대기업은 오너 중심 경영을 유지하고 있어, 이사회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해 왔다. 전문성보다는 기업과 이해관계를 같이 하거나, 최고경영자(CEO) 또는 총수와 관련이 있는 인물을 사외이사를 앉히기도 했다. 그렇다 보니 경영적 판단이 시의적절한지  제대로 검증되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었다. 특히 오너의 결단이 필요한 대규모 투자는 시장 선점과 전략적 판단이라는 이유로 어렵지 않게 이사회의 승인을 받아왔다. 거수기 이사회라는 비판을 받아온 이유다. 

사외이사 이사회 의장 선임, 선임사외이사의 투 트랙을 활용하면 이사회 독립성이 강화되고 경영 투명성이 제고된다. 다만 경영적 판단에 대한 근거를 요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오너, CEO의 판단도 검증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다소 위험부담을 안고가야 하는 셈이다. 실제로도 국내 금융권은 금융회사의 지배구조에 관한 법률에 따라 선임사외이사 제도가 의무화된 반면, 상법의 영향을 받는 비금융권 기업은 제외됐다. 삼성이 강력한 총수 리더십을 내세워 온 점을 고려하면 뜻밖의 행보다. 삼성 관계자는 데일리임팩트에 ”법적 의무와 상관없이 내부 견제와 균형을 강화하고 이를 시스템으로 정착시키기 위한 노력을 지속하고 있다”며 ”국내 기업들에게는 새로운 기준이자 모범 사례가 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때문에 이 회장의 경영 철학이 반영됐다는 해석이 힘을 얻고 있다. 

국정농단 사건에 연루된 뒤 이 회장이 사법리스크에 노출되면서 적기에 주요 경영 결정을 내리지 못했고, 재계 안팎에서는 위기론까지 대두됐다. 그룹의 핵심 동력인 삼성전자는 오너 리스크를 최소화하고자 2018년 3월 이사회 결의를 통해 대표이사와 이사회 의장을 분리했고, 2020년 2월에는 사외이사를 의장으로 선임했다. 이에 앞서 지난 2017년 4월부터는 기존 CSR 위원회를 확대 개편, 전원 사외이사로 구성된 지속가능경영위원회를 운영 중이다. 경영 안정성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다. 그러나 오너 리스크에 따른 우려가 커지자 결국 이 회장은 지난 2020년 5월 “외부의 질책과 경청을 열린 자세로 경청하겠다“고 공언했다. 지배구조 체제 개편에 대한 의중을 드러낸 것이다. 

삼성전자·삼성전기·삼성생명·삼성화재·삼성증권·삼성카드·삼성자산운용·삼성물산 등 주력 8개사는 사외이사가 이사회 의장을 맡고 있다. 이사회가 경쟁력을 갖출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도 운영 중이다. 신규 후보자 추천은 사외이사추천위원회에서 이뤄진다. 해당 위원회는 전원 사외이사로 구성되며 전문성, 다양성, 경험을 갖춘 후보군 중에서 적합한 인물을 가려낸다. 이사회 내에 지속가능경영, 보상, 내부거래 등을 다루는 위원회를 설치하고 이사회 권한 일부를 넘겨 심도있는 논의가 이뤄지도록 했다. 사외이사들이 필요에 따라 법률·회계 등 외부 전문가들의 지원을 받거나 국내·외 현장 방문, 경영 현황 보고 등을 받을 수 있다. 이 회장도 이사회에 힘을 실어주는 액션을 취했다. 지난해 회장 승진을 앞두고 이사회의 논의를 거친 것. 회장은 상법상 직함이라 이사회 승인이 필요 없다.

이 회장이 지배구조 체제 재편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글로벌 수준에 부합하는 선진경영을 구현하기 위해서다. 국내는 의사결정의 효율성을 내세워 대표이사가 이사회 의장을 겸임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사외이사의 권한도 사내이사와 동등하지 않다. 삼일PwC 조사 결과, 국내 비금융기업 중 선임사외이사를 등용한 곳은 지난해 5%에 불과했다. 

반면 CEO와 이사회 의장의 분리를 권장하는 미국은 선임사외이사(LID) 제도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 지난해 사외이사가 이사회 의장을 맡고 있는 비율은 36%였고, 무려 68%의 기업이 선임사외이사 제도를 도입했다. 선임사외이사가 사외이사들을 대표하는 것은 물론, 경영 공백을 메우는 등의 역할을 해내고 있어서다. 이사회 의장인 CEO가 갑작스럽게 회사를 떠날 경우 이사회 의장을 맡아 새 CEO 선임 과정을 주도한 사례가 적지 않다. 애플이 대표적이다. 스티브 잡스 사후 선임사외이사였던 아서 레빈슨 칼리코 CEO가 이사회 의장을 맡아 팀 쿡의 선임 과정을 주도했다.

이에 이 회장은 기업의 지속가능한 경쟁력이 담보되려면 높은 수준의 경영 감독 기능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분석된다. 2020년 출범한 삼성 준법 감시위원회가 독립기구로 자리잡을 것도 이 회장의 의지가 컸다. 삼성 준법위는 삼성전자·삼성물산·삼성SDI·삼성전기·삼성SDS·삼성생명·삼성화재 등 7개 계열사들의 준법 의무 이행 여부를 점검하고 있다. 내부 거래는 물론, 50억원 이상의 거래 내역도 들여다 본다. 

삼성바이오로직스·삼성중공업·호텔신라 등 사외이사가 이사회 의장을 맡고 있지 않은 계열사들도 선임사외이사 제도 도입을 검토할 예정인 만큼 재계 일각에서는 다른 해석도 나온다. 이 회장이 지배구조 개편을 본격화할 가능성이다. 4세 승계는 없다고 선을 그은데다, 이 회장이 사법리스크에 시달리고 있어서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불법 합병 의혹 외에도 경영 승계와 연관된 재판이 진행 중이다. 이로 인해 삼성전자는 유의미한 인수합병(M&A)이 없었다. SK, 현대차그룹, LG, 한화 등 경쟁사들이 M&A를 통해 사업 영역을 확장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삼성은 지주사 전환을 하지 못했다. 과거 미래전략실이 전사적 관점에서 경영 밑그림을 그렸지만 지금은 전자, 금융, 건설로 나눠 같은 계열 그룹사 간 사업 조율을 하는 TF만 있다. 이 회장이 통합 컨트롤타워 설립에 앞서 경영 감독 기능을 강화했다는 지적이다. 재계 관계자는 데일리임팩트에 ”이사회가 더 면밀하게 경영 현안을 들여다 볼 권한과 책임을 준 것은 안정적 경영 체제 구축을 염두했을 수 있다”면서 ”이사회의 조력을 받아 오너 리더십의 공백을 메우고 공격 투자에 나설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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