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재고율 사상 최대…D램 가격 추가 하락 가능성 커져
美 보조금 미끼로 영업기밀 요구…中 자국 기업에 대규모 투자
정부 “기업 입장 적극 대변” 강조했지만…K칩스법마저 표류
첨단기술 패권 둘러싼 강대강 대치 속에 자력갱생 몸부림

미국은 대중국 반도체 수출 통제를 통해 반도체 산업 주도권을 확실히 가져오겠다는 의중을 드러내고 있다. 현재 삼성전자, SK하이닉스를 비롯해 국내 반도체 기업들이 받을 영향이 제한적이리자도 장기적으로 사업 운영에 부담을 가중시킬 변수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사진. 이미지투데이. 
미국은 대중국 반도체 수출 통제를 통해 반도체 산업 주도권을 확실히 가져오겠다는 의중을 드러내고 있다. 현재 삼성전자, SK하이닉스를 비롯해 국내 반도체 기업들이 받을 영향이 제한적이리자도 장기적으로 사업 운영에 부담을 가중시킬 변수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사진. 이미지투데이. 

[데일리임팩트 변윤재 기자] 국내 반도체 기업들이 진퇴양난(進退兩難)에 처했다. 불확실한 업황에 외풍은 더욱 거세지고 있어서다. 

재고는 사상 최고 수준으로 쌓이고 가격 반등은 요원하다. 예상보다 빙하기가 길어짐에 따라 실적 방어 전략도 차질을 빚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게 됐다. 

반도체 산업 여건 자체도 불안정하다. 첨단 기술을 기반으로 패권을 장악하려는 미국과 중국의 전쟁이 장기화되고 있어서다. 미국은 ‘보조금’을 내걸고 국내 기업들을 통제권 안에 두겠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이에 맞서 중국은 자국 메모리 산업에 거대한 돈을 투입해 ‘칩 독립’을 이루겠다는 의지를 재차 표명했다. 

정부는 우리 기업의 부담을 최소화하고 수혜가 늘어날 수 있도록 미국 측과 협의한다는 입장이지만 업계의 분위기는 뒤숭숭하다. 

‘3월에도 춥다’ 반도체 겨울 계속

7일 업계에 따르면, 반도체 한파가 쉬 풀리지 않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 1월 국내 반도체 재고율은 265.7%에 달했다. 1997년 3월(288.7%) 이후 25년10개월 만에 가장 높다. 이 기간 반도체 출하지수는 계절조정 기준 71.7(2020년=100)로 전월보다 25.8% 하락했다. 재고지수는 190.5로 28.0% 증가했다. 

주목할 점은 반도체 재고율이다. 반도체 재고율은 재고지수를 출하지수로 나눈 뒤 백분율로 산출한 값으로, 반도체 생산량과 비교해 재고가 얼마나 쌓여 있는지 알 수 있다. 반도체 재고율이 높다는 건 공급이 수요를 웃돈다는 뜻이다. 기업 입장에선 재고가 적정수준으로 맞춰질 때까지 적극적으로 감산하거나 반도체 가격을 내릴 수밖에 없다. 업황이 더 나빠질 가능성을 배제키 어렵다. 

특히 반도체 재고율은 한 달 사이 111.7%포인트나 치솟았다. 주요 전자기업들은 가격을 낮추고 사은품을 늘리는 판촉행사를 지속하고 있다. 그럼에도 재고율이 폭등했다는 건, 기업의 예상보다 IT 수요가 훨씬 낮았음을 보여준다. 고금리·고물가로 소비 심리가 위축된 결과다. 

반도체 재고율이 26년 만에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우리 기업들의 주력제품인 D램 가격 반등이 당부난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에 힘이 실린다. 디자인. 김민영 기자. 
반도체 재고율이 26년 만에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우리 기업들의 주력제품인 D램 가격 반등이 당부난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에 힘이 실린다. 디자인. 김민영 기자. 

국내 반도체 기업들의 재고 역시 최대 수준이다. 지난해 삼성전자의 재고자산은 52조1878억원으로 1년 사이 26% 급증했다. 같은 기간 SK하이닉스의 재고자산도 15조6330억으로 1년 새 무려 70% 이상 폭증했다. 

시장 수요가 급격히 줄고 재고는 쌓이면서 당분간 반도체 가격은 반등이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지난 2월 PC용 D램 범용제품(DDR4 8Gb)의 평균 고정거래가격이 전달에 이어 1.81달러를 유지했다. D램 가격이 1달러대로 하락한 것은 2016년 말 이후 6년여 만이다. 

다만 현재보다 D램 가격이 더 떨어질 것이라는 시장의 중론이다. D램은 공급·생산 간 불균형을 최소화하기 위해 분기 단위로 가격 계약을 맺는데, 재고 과잉이 해소되지 않은 탓이다. 트렌드포스는 “새로운 (가격) 협상이 없어 2월 PC D램 가격은 대부분 변동이 없었다”며 “(D램은) 상당한 공급 과잉 상태로, 현 시점에선 D램 가격이 전 분기 대비 반등할 가능성은 낮다. 2분기 계약 가격에 합의하면 3월에 D램 가격이 하락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했다.

고정거래가격은 기업 간 계약금액으로 반도체 시장의 선행지표로 받아들여진다. 고정거래가격이 하락한다는 것은 D램 가격이 앞으로 수개월 간은 내려갈 수 있단 뜻이다. 트렌드포스는 1분기 D램 평균판매가격(ASP)이 1분기 15~20% 하락할 것으로 추산했는데, 2분기에도 이러한 기조가 유지될 공산이 크다. 

노골화되는 대중국 견제

삼성전자·SK하이닉스가 D램을 주력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두 회사의 1분기 실적 방어는 녹록치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두 회사의 고민은 업황에 있지 않다. 메모리반도체 업황은 3~4년을 주기로 등락을 거듭해 온 만큼, 방어가 가능한 분야라서다. 제어할 수 없는 ‘특수한 상황’이 기업들에겐 더 큰 부담이다. 바로 미국발 위기다. 

미국은 중국의 첨단기술 독립 의지를 꺾어놓겠다는 의지를 재차 표명하고 있다. 미국에 의한, 미국을 위한, 미국의 공급망을 구축하겠다는 구상을 정권을 바뀌었어도 변함이 없다. 이 구상의 중심에는 반도체가 있다. 자국 기업이 원천기술을 보유한 반도체를 전략 무기로 삼았다. 공급망 병목을 해결한다는 이유로 실태조사를 벌일 때만 해도 융통성을 보였던 미국 정부는 반도체지원법을 시행하면서 철저히 자국 중심주의적 관점에서 움직이고 있다.  

“반도체법은 혁신 경쟁에서 승리하고 국가 안보와 경제적 미래를 보호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미국이 모든 최첨단 반도체 생산 기업이 상당한 연구개발 및 대량 제조 시설을 둔 유일한 국가가 되기를 원한다” 등 지나 러먼도 미 상무장관의 말처럼 반도체지원법의 목적은 반도체 공급망을 미국으로 옮기는 데 있다. 미국 내 첨단 반도체 클러스터를 최소 2곳 이상 조성하기 위해 향후 10년 간 527억달러를 지원하고 25%의 세액 공제를 적용한다. 

파격적 혜택을 내건 만큼, 조건을 까다롭다. 미국 상무부는 보조금 지원을 받으려면 △경제·국가안보 △사업·상업성 △재무 건전성 △기술 준비성 △인력개발 △사회공헌에 대한 구체적 계획을 밝힐 것을 요구했다. 문제는 지원 기업의 이익을 침해할 소지가 다분하다는 점이다. 

미 상무부는 검증을 이유로 매우 상세한 정보를 원하고 있다. 수익성 지표, 예상 현금흐름 전망치, 주요 제품 제조원가, 제품별 생산량과 재고, 상위 10대 고객, 생산장비 같은 정보가 포함된다. 여기에 군사적 목적의 반도체 공급과 반도체 생산시설 공개도 요구했다. 미국 정부가 바라는 정보는 기업의 영업기밀에 속한다. 익명을 요구한 반도체 전문가는 데일리임팩트에 “보안이 중요한 반도체 사업에서 관련 정보를 밝히라는 건 매우 과도하다“며 “수십년 간 축적한 기술과 마케팅 노하우를 내놓으라는 것과 다름없다“고 꼬집었다.  

기업 경영을 좌지우지하려는 것도 우려스러운 부분이다. 1억5000만 달러 이상의 반도체 지원금을 받는 기업이 전망치를 웃도는 이익을 거두면 보조금의 최대 75%까지 반납해야 하고, 보육시설을 설치해야 한다. 생산설비를 짓고 가동하는 과정에서도 미국의 이익에 부합하도록 했다. 미국산 자재를 사용하고 환경 보호 조치를 완료해야 한다. 연구개발(R&D) 시설 설립, 경제적 약자 채용 등도 심사 조건에 들어갔다. 보조금 혜택을 받은 기업은 철저하게 미국의 이익을 위해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명시한 셈이다. 

보조금을 받는 데서 끝이 아니다. 미 상무부의 심사를 통과하면 향후 10년 간 중국 등 우려 국가에 첨단 반도체 시설을 짓거나 기존 시설에 추가 투자를 하지 않겠다는 협약을 맺어야 한다. 미국이 요구할 첨단 반도체 기술 통제 수준에 대한 가드레일(안전장치) 조항은 나오지도 않았다. 상황에 따라서는 중국 사업을 접어야 할 수도 있다. 수조원의 혜택을 받은 대가로는 너무 큰 것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지난 2021년 4월 백악관에서 반도체 화상회의에서 반도체 원재료인 웨이퍼를 들어보이고 있다. 사진. SBS 뉴스 갈무리.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지난 2021년 4월 백악관에서 반도체 화상회의에서 반도체 원재료인 웨이퍼를 들어보이고 있다. 사진. SBS 뉴스 갈무리.

사방에서 압력…난감한 K칩

중국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은 국내 반도체 기업들의 부담을 키우는 요인이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중국 정부 펀드인 국가집적회로산업투자기금을 비롯해 총 3곳의 국영 투자사가 양쯔메모리테크놀로지(YMTC)에 490억위안을 투자했다고 보도했다.  

지난 2014년 중국 정부는 자국 반도체 산업을 육성하고자 국가집적회로산업투자기금을 조성해 450억달러를 반도체 관련 기업에 투자했다. 중국 정부의 바람과 달리 지원금만을 노린 유령기업들이 적지 않았던 데다, 미국이 고성능 반도체 장비의 중국 반입을 막으면서 투자 효과가 미미하다는 지적이 있었다. 하지만 미국의 견제가 노골적으로 변하자 중국은 주요 기업을 키우기로 했다. 미국과의 기술 패권 전쟁에서 정면 승부하겠다는 의지가 읽히는 대목이다. 

YMTC는 중국 최대 메모리반도체 기업으로 삼성전자, SK하이닉스와 중국 내에서 경쟁 중이다. 중국 정부의 집중적인 지원 아래 빠르게 기술 진전을 이룬 기업이기도 하다. 애플이 보급형 제품에 YMTC의 낸드플래시 탑재를 고려했을 정도로 가격경쟁력과 기술력에서 일정 수준 이상에 도달했다는 평가다. 특히 국내 반도체 기업과의 기술 격차가 좁혀진 것으로 보인다. 실제 YMTC는 지난해 세계 최초로 232단 낸드 양산을 시작했다. 미국의 수출 통제 명단에 올랐던 YMTC가 중국 정부로부터 추가 투자를 받으면서 기술 추격이 더욱 매서워질 가능성이 높아졌다. 

미국의 압박과 중국의 추격 속에 낀 국내 반도체 기업들의 손익 계산은 더욱 복잡해졌다. 미국과 중국 모두 포기할 수 없는 시장이기 때문이다. 보조금을 받으면 반중(反中)연대에 합류하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큰 손으로 불리는 중국 고객사는 물론, 중국 현지 사업 자체를 포기해야 할 수 있단 얘기다. 삼성전자 전체 낸드 생산량의 40%, SK하이닉스 D램의 50% 가량이 중국에서 생산된다. 

보조금을 신청하지 않으면 미국 주도의 공급망에서 배제될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더욱이 미국 정부가 칩4 동맹 구축에 나선 점을 고려할 때, 일본·대만 등과도 협력할 기회가 막히게 된다. 네덜란드 등 미국과 우호적 관계에 있는 주요 국가로부터의 반도체 소재·부품·장비 수입도 차질을 빋을 가능성도 있다. 특히 미국은 반도체 원천 기술을 보유한 국가이자, 반도체 주요 소비국이기도 하다. 미국과의 거리두기로 인해 생산부터 판매까지 막힐 수 있는 셈이다. 

양자 택일의 기로에 선 기업들은 침묵하고 있다. “기업 경영에 미칠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정부와 심도 깊은 협의를 이어가겠다“는 원론적 입장 외에 묘수가 없어서다. 기업들마다 워싱턴과의 연락채널을 강화하는 등 전방위적인 로비를 펼쳤음에도 미국 정부를 움직이지 못했다. 때문에 정부가 보다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목소리에 힘이 실린다. 

홍기용 인천대 경영학과 교수는 데일리임팩트에 ”반도체지원법의 핵심은 보조금을 지급하는 게 아니라 반도체 공급망에서 중요한 기업들을 자국의 관리 하에 두겠다는 것”이라며 ”외교적 협의를 통해 우리 기업들의 이익이 침해되지 않도록 안전장치를 마련해줘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부는 오는 6월26일 본 신청서 접수 전까지 최대한 미국 정부와 협상에서 국내 반도체 기업들에게 유리한 조건들이 반영될 수 있게끔 한다는 방침이다.  이창양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6일 기자들과 만나 ”반도체 산업 자체가 사이클 산업이어서 예상 수익의 평균을 산정하기가 어려운 불확실성이 있음을 강하게 얘기하겠다”면서 ”관련부처와 협력해 미국측과 적극적으로 한국 반도체 산업과 한국 기업의 상황을 알리고 최대한 부담보다는 수혜가 늘어날 수 있도록 협의에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정부의 방침에도 반도체 업계에서는 기대감이 크지 않다. K칩스법이 표류하고 있기 떄문이다. 정부는 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을 내놓고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반도체·디스플레이·이차전지 등 국가전략기술에 대한 투자세액 공제율을 대·중견기업은 8%에서 15%로, 중소기업은 16%에서 25%까지 올리기로 했다. 올해에 한해 직전 3년간 연평균 투자 금액을 초과 투자하는 기업엔 10%의 추가 공제도 해준다. 세수 감소, 대기업 특혜 등을 문제삼은 야당의 반대로 조세소위원회 문턱도 넘지 못했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데일리임팩트에 ”반도체 투자는 시간싸움인데, 강대국의 싸움에 기업들의 사업 계획도 영향받고 있다”며 ”자유롭게 운신할 수 있게 외풍은 막아주고 최대한의 지원을 시행하겠다는 의지를 정부가 보여줘야 할 때”라고 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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