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고강도 대중 제재 동참 요구…中, "미 전략 소모품" 힐난
반도체 패권경쟁에 '샌드위치' 신세…"정부 외교력 필요" 지적

미국은 대중국 반도체 수출 통제를 통해 반도체 산업 주도권을 확실히 가져오겠다는 의중을 드러내고 있다. 현재 삼성전자, SK하이닉스를 비롯해 국내 반도체 기업들이 받을 영향이 제한적이리자도 장기적으로 사업 운영에 부담을 가중시킬 변수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사진. 이미지투데이. 
한국 반도체 기업들이 미국과 중국의 공방전에 끼였다. 미국은 대중국 견제를 강화할 태세고, 중국은 강력히 반발했다. 양국에서 사업을 펼치고 있는 한국 반도체 기업은 진퇴양난에 처했다. 사진=이미지투데이. 

[데일리임팩트 변윤재 기자] 미국과 중국의 '자존심 싸움'에 한국 반도체 기업이 곤혹스러운 처지에 놓였다.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미국과 중국은 서로에 대한 견제구를 던졌다. 

미국이 노골적으로 '중국에 대한 반도체 판매를 늘리지 말아 달라'고 요청한 사실이 알려졌다. 중국도 질세라 '미국의 요구에 응하는 건 자멸행위'라고 압박했다. 

한미 정상회담 의제로 반도체 등 첨단산업 분야에서 '유연한 공급망 구축'이 다뤄지는 만큼, 한국을 사이에 둔 미·중 간 신경전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의 고민이 깊어지는 모습이다. 

즉답 피한 백악관 "한국이 결정할 일"

25일 미국 백악관은 반도체지원법(칩스법)으로 한국 기업이 상당한 혜택을 볼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대중국 제재를 요구했다는 보도에 대해선 "한국 정부가 결정할 일"이라고 즉답을 피했다. 

존 커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전략소통조정관은 국무부 외신기자클럽 간담회에서 "(보도내용을) 확인할 위치에 있지 않다"며 "(대중국 투자 제한에 동참할지) 한국 정부가 결정할 일"이라고 말했다. 

커비 조정관은 대신 한국이 미국 주도의 공급망 재편에 동참하길 바란다는 뜻을 밝혔다. 그는 "정상회담 의제에 양국 무역 관계를 심화하고 반도체 등 분야에서 유연한 공급망을 구축하는 방안이 포함되는 것은 분명하다"고 했다. 또 "미국에 대규모 투자 중인 한국 기업들이 인플레이션 감축법(IRA)과 반도체지원법으로 혜택을 볼 것"이라며 "한국을 포함한 동맹과 안전하고 탄력적인 공급망 체계를 구축하려 한다. 이 문제에 대해 매우 활발하게 대화를 나눌 것"이라고 강조했다.

앞서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지난 23일(현지시간) 미 백악관이 윤석열 대통령의 방미를 앞두고 "중국이 미국 마이크론의 반도체 판매를 금지해 반도체가 부족해질 경우 한국 반도체 기업이 그 부족분을 채우는 일이 없게 해달라"고 요청했다고 보도했다. 미국 정부가 직접 대중국 제재 동참을 요구한 건 처음이다. 자국 기업 구하기에 나선 것으로 풀이된다. 

중국은 현재 마이크론에 대한 국가 안보 심사를 진행 중이다. 결과에 따라서는 마이크론 제품 판매가 금지될 수 있다. 지난해 마이크론은 전체 매출(308억달러)의 25%를 중국과 홍콩에서 거둬들였다. 중국이 실제 제재를 단행하면 마이크론 뿐 아니라 미국 반도체 생태계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미국 최대 메모리반도체 기업이기 때문이다.

FT는 백악관과 대통령실의 대화를 잘 아는 소식통 4명의 발언을 인용해 윤 대통령의 방미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 같은 요청이 있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중국이 마이크론을 미국 정책에 영향을 미칠 지렛대로 쓸 수 없도록 하려는 취지"라고 해석했다. 

반도체 패권전에서 수세에 몰리는 듯 보였던 중국이 마이크론 제재를 시사하며 반격에 나섰다. 사진=이미지투데이.

"대중국 제재 동참은 자멸행위" 으름장 

중국은 당장 발끈했다. 중국 관영매체인 글로벌타임스는 24일 "(미국의) 대중국 제재에 동참한다면 한국 반도체 기업의 경쟁력 약화로 이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글로벌타임즈는 전문가의 발언을 빌려 "윤 대통령은 반도체 분야에서 중국을 견제하는 미국의 더 큰 압박에 직면할 것"이라며 "윤 대통령이 미국의 지시를 적극 이행한다면 한국은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에서 '소모품'이 되는 것이고, (이같은) 극단적인 외교 정책은 지속 불가능한 자기 파괴적 행위"라고 힐난했다. 

글로벌타임즈는 또 윤 대통령이 지지율 반등을 위해 한국의 국익을 희생시키더라도 미국의 지지를 얻으려 할 수 있다며 "안보와 경제적 이익을 심각하게 손상시키고 한국에 더욱 혼란스러운 상황을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글로벌타임즈는 한국 반도체 기업에도 경고했다. 중국의 반도체 굴기를 꺾어놓으려는 미국의 의도를 따를 경우, "중국 시장을 잃을 것"이라고 했다. 중국으로의 수출이 줄면서 지난해 메모리반도체 수출액이 전년 대비 10.7% 감소했음을 상기시켰다. 그러면서 "오만으로 가득 찬 왕따 전략"에 동조하는 한국 반도체 기업이 중국 공급처를 줄이면 시장 내 위상이 흔들리고 "한국은 (반도체 분야에서) 미국의 속국이 될 것"이라고 했다. 

G2 사이 낀 한국 반도체 기업

미국 정부는 경제 안보를 내세워 중국을 견제하는 '방어벽'을 쌓아왔다. 동맹국 또는 해당 국가 기업의 동참을 이끌어내는 방식이다. 화웨이 제재는 물론 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IPEF), 핵심광물안보파트너십(MSP), 칩4동맹, 칩스법, IRA가 그렇다. 기술 또는 전략동맹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대중국 압박의 수위는 높이되, 참여자들의 부담을 덜어줬다. 

FT의 보도대로라면, 미국 정부는 동맹국과 반도체 기업들을 '공모자'로 내세우는 방향으로 전략을 수정한 것으로 보인다. 조 바이든 대통령이 재선을 선언한 점을 감안하면, 중국을 고사시키기 위해 미국은 더 적극적인 역할을 요구할 가능성이 높다. 이와 관련, 백악관은 "경제안보 분야에 대한 협력을 강화하는 역사적 진전을 이뤘다. 반도체 부문에 대한 투자를 조정하고, 핵심 기술을 확보하고, 경제적 강압에 대처하기 위한 노력이 포함된다"고 전했다. 

삼성전자 시안 반도체 공장 전경. 사진=삼성전자.
삼성전자 시안 반도체 공장 전경. 사진=삼성전자.

미국과 중국 양측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 한국 반도체 기업은 눈치가 보는 형국이 됐다. 

아직까지 중국은 세계 최대 인구를 자랑하는 소비시장이다. 중국 업체들은 삼성전자, SK하이닉스의 '큰 손'이기도 하다. 더욱이 삼성전자, SK하이닉스는 중국에 대규모 생산기지를 구축한 상태다. 삼성전자 시안 공장은 전체 낸드의 40%를 책임진다. 인텔의 낸드사업부 인수로 다롄과 우시에 각각 낸드, D램 공장을 갖고 있는 SK하이닉스도 중국 비중이 높다. 낸드는 20%, D램은 50% 가량이 중국에서 생산된다. 

매출과 중국 사업을 사수하기 위해 미국의 요구를 뿌리칠 수도 없다. 미국은 반도체 원천 기술 보유국이자 주요 소비국이다. 전 세계에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네덜란드 등 미국과 우호적 관계에 있는 국가로부터 반도체 소재·부품·장비 공급이 막히거나 최악의 경우, 공급망에서 배제될 가능성도 있다. 생산부터 판매까지 어려워질 수 있다는 뜻이다. 

반도체 업계에서는 피해는 최소화하기 위해선 출구전략에 돌입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현실적으로 중국이 한국 반도체 기업에 고강도의 제재에 나서기 어려워서다. 2018년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에 대한 가격 담합 의혹을 조사했지만, 이듬해 D램 가격이 큰 폭으로 떨어지자 중국은 두 회사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취했다. 업계 관계자는 데일리임팩트에 "자국 기업의 기술 수준이 만족스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외 다른 대체재가 없다는 뜻"이라며 "정치 체제로 인해 불확실성이 상존하는 중국 시장에서 장기적으로 발을 빼는 전략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다만 탈중국 전략이 무리없이 진행되려면 한미 양국 정부의 이해가 전제돼야 한다. 한국 반도체 기업의 중국 철수는 지정학적 불안을 가중시키고 국가 경제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반도체는 수출액의 20%를 차지한다. 미국 또한 한국 반도체 기업의 협조를 원하고 있다. 메모리반도체 1,2위 기업이 미칠 파급효과를 노려서다. 또다른 업계 관계자는 "기업이 할 수 있는 부분은 제한적"이라며 "정부가 외교적으로 풀어야 반도체 해법을 도출할 수 있다"고 말했다. 

최우선 과제론 반도체 보조금 기준 완화가 꼽힌다. 미국은 527억달러의 보조금과 25% 세액 공제를 이유로 영업기밀과 초과이익 공유 등을 요구했다. 오는 10월로 종료되는 첨단 반도체 장비 반입 유예 조치도 연장해야 한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전문연구원은 데일리임팩트에 "미국은 우리를 압박할 카드가 있고, '조건부로' 지급되는 보조금은 한국 반도체 기업에 불이익이 될 수 있다"며 "그럼에도 과한 요구를 하는 미국에 '불합리한 조건이 투자 위축을 초래'할 수 있음을 상기시켜야 한다"고 밝혔다. 

한국 반도체 기업이 운신의 폭을 넓힐 길을 터줘야 한다는 제언도 나왔다. 강구상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미주팀장도 데일리임팩트에 "미국이 중국에 대해 워낙 강경하게 대응하고 있기에, 우리는 합리적 수준에서 접근해야 한다"면서 "대중 사업에 대한 구체적 가이드 라인 제시, 장비 수출통제 유예 연장, 보조금 기준 완화를 요청해야 한다. 특히 고객과의 계약사항이나 중요 재무사항은 '공개하기 어려운' 영역임을 설득할 팔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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