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우현 논설위원, 한불협회 회장, 전 주 프랑스 공사 겸 문화원장, 전 숙명여대 객원교수

손우현 논설위원
손우현 논설위원

프랑스인들은 바캉스와 연금을 소중히 여긴다. 이들에게 유급 휴가와 연금은 사회정의를 위한 오랜 투쟁의 산물로 근로자들의 기본권이다. ‘바캉스는 신성하다’고 믿는 프랑스인들은 직종에 관계없이 정년 퇴직 후 생활이 보장되는 연금을 받는다. 연금 없는 노후의 삶은 프랑스인들에게는 상상하기 어렵다. 그래서인지 프랑스어로 은퇴를 의미하는 ‘retraite’란 단어에는 연금이란 뜻도 있다.

집권 7년차를 맞는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의 연금 개혁안이 연초부터 노조와 야권의 거센 저항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프랑스 정부가 추진하는 연금 개혁에 반대하는 전국적 시위가 지난 11일 올해 들어 네 번째로 열렸다. 강경 좌파 성향의 노동총동맹(CGT)이 주도한 이날 시위는 프랑스 주요 8개 노동조합이 주말에 처음 소집한 것이었다. 정부는 96만3천여 명이 시위에 참가했다고 발표했지만 CGT 측은 250만 명에 달하는 이들이 거리로 나왔다고 주장했다.

이번 시위는 주말이라 그런지 자녀를 동반 전 가족이 참석한 경우도 여럿 눈에 띄었다. 13세의 아들을 동반한 한 남자는 ‘시민 교육’을 위해서라고 말했다. 혁명의 나라 프랑스에서는 거리 시위가 중요한 시민 저항의 수단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연금 개혁의 핵심은 법적 정년을 현재 62세에서 64세로 연장하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노조가 정년을 연장해야 한다며 정부를 압박하고 있는데 프랑스 노조는 왜 정년 연장을 반대하는 것일까? 프랑스는 우리와는 달리 법적 정년과 연금을 수령할 수 있는 나이가 같다. 현재 프랑스의 법적 정년은 62세로, 연금도 62세부터 받을 수 있다. 프랑스 연금의 보험료율은 28%, 소득대체율(net pension replacement rate)은 월평균 소득의 74%로, OECD나 EU 회원국 평균보다 높다. 보험료도 많이 내지만 연금도 많이 받는다.

반면 우리나라는 법정 정년과 국민연금을 수령할 수 있는 나이가 다르다. 우리나라의 법적 정년은 60세지만, 연금 수령 나이는 만 60세에서 65세로 상향 조정되었다. 또 국민연금 보험료율은 9%, 소득대체율은 40% 수준이다. 공무원, 군인, 교직 등 특수 연금이 아니면 퇴직 전 수준의 생활이 어려운 실정이다.

그러나 프랑스의 경우는 연금만으로 퇴직 전과 비슷한 수준의 생활이 보장되기 때문에 굳이 정년을 연장하면서까지 더 일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더군다나 20세 전후 이른 나이에 직업 생활을 시작한 육체노동자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적게 일하고 더 잘살기’(‘Travailler moins, vivre mieux’)라는 시위 구호가 등장하는 이유다.

한편 프랑스 정부는 평균 수명의 증가로 연금 제도의 유지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공식 통계에 의하면 2000년에는 근로자 2.1명이 연금 수령자 1명을 지원했으나 2020년에는 그 비율이 1.7:1로 떨어졌다는 것이다. 또 2070년에는 1.2:1까지 내려갈 전망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납세자의 추가 부담 없이 연금 재원의 고갈을 막으려면 현재의 62세 정년을 2030년까지 64세로 연장하고 이를 위해 분기마다 3개월씩 늘려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연금을 100% 받기 위해 기여해야 하는 기간을 기존 42년에서 43년으로 1년 늘리는 시점도 당초 예정한 2035년에서 2027년으로 앞당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노조 측은 마크롱이 예상 적자의 위협을 과장하고 있으며 부유세 부활 등 다른 재원 확보 방안은 모색하고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비판의 저변에는 ‘마크롱은 부자들의 대통령’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의사 부부의 아들로 태어나 프랑스판 고등고시라고 할 수 있는 국립행정학교(ENA)를 거쳐 공직 외에도 투자은행가로도 활약한 마크롱은 전형적인 프랑스 엘리트다. 그는 2016년 자신을 경제장관으로 발탁해준 사회당 출신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에게 사표를 던지며 도전했다. 선거 경험이 전무했던 마크롱은 ‘앙마르슈(전진)’라는 ‘정치 운동’을 창설해 1년 만에 기존 양대 정당의 아성을 뚫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당시 39세로 나폴레옹 이후 프랑스의 최연소 지도자다. 내외신 언론은 그의 등장을 ‘혁명’에 비유했다.

그는 집권하자마자 ‘30년간 복지부동’이었던 프랑스를 변화시키겠다며 친기업·친유로 중도실용 노선의 기치를 내걸고 노동법 개혁, 철도 개혁 등 전방위 개혁을 밀어붙였다. 그러는 와중에 ‘노란 조끼’ 시위대의 거센 저항에 부딪히기도 했다. 마크롱 대통령은 1차 임기 중인 2019년에도 42개의 프랑스 연금 제도를 통합하는 연금 개혁을 시도했으나 여론의 거센 반대와 코로나 팬데믹으로 포기했다. 이번 2차 시도에서는 연금 통합 대신 정년 연장으로 방향을 바꿨다.

엘리자베트 보른 총리는 지난 6일 시작된 하원 심의를 앞두고 20세 혹은 21세에 일을 시작하면 1년 일찍 은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공화당의 제안을 수용할 의사가 있다고 밝혔다. 여당 르네상스 등 집권당은 하원 과반 의석을 차지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연금 개혁을 지지해온 우파 야당 공화당(LR)의 지지를 기대하고 있다. 현재 하원 전체 의석 577석 중 르네상스 등 집권당이 249석, 공화당이 62석을 갖고 있기 때문에 두 세력이 연대하면 과반(289석) 찬성을 확보할 수 있다.

프랑스 언론은 마크롱의 연금개혁에 대해 매체 성향에 따라 상반된 논조를 보이고 있다. 우파 성향의 르 피가로( Le Figaro)지는 “지난 30년간 세계는 많이 변했는데 대화를 거부하는 (프랑스) 강성 노조는 바뀐 게 없다”며 “(파업으로) 국민을 더 이상 볼모 삼지 말라”고 일갈했다. 반면 중도 좌파인 르 몽드지는 연이은 연금개혁 반대 시위는 저임금으로 고통 받는 프랑스의 모습을 보여주었다며 “더 일하라”는 정부의 연금개혁 기조는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고 논평했다.

연금개혁 법안의 하원 통과는 이제 우파 공화당의 지지 여부에 달렸다. 그러나 법안이 통과되더라도 노조의 거리 시위를 잠재울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프랑스인의 3분의 2는 개혁안을 반대하고 있다. 정부의 연금 개혁에 반대하며 12년 만에 연합 전선을 구축한 8개 노조는 이달 16일 추가 파업과 5차 시위를 예고한 상태다. 이에 더해 정부가 프랑스 국민의 목소리를 계속 외면한다면 내달 7일 모든 부문에서 파업을 벌여 "프랑스를 멈춰 세우겠다"고 경고했다. 중대 기로에 선 마크롱 2기 개혁이 어느 방향으로 갈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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