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학중 논설위원, 가정경영연구소장, 서울가정법원 조정위원

강학중 논설위원
강학중 논설위원

KBS의 ‘인간극장’은 내가 10여 년 전부터 거의 매일 챙겨보는 프로그램이다. 2000년 5월에 시작한 휴먼 다큐멘터리로,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오전 7시 50분에 방영하는 5부작이다. 연구소가 출근하는 데 10분밖에 걸리지 않는 곳에 있어서, 그리고 지금은 출근 시간을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어 매일 빼놓지 않고 누리는 호사다.

시청자의 제보나 지역 사회의 추천, 기존 출연자의 소개 등 다양한 경로로 출연자를 찾고 있지만 섭외가 어려워 애를 먹는단다. 주변에서 손쉽게 만날 수 있는 사람으로 일상의 자연스러움을 간직하면서도 보는 이에게 공감과 위로를 줄 만한 출연자를 찾아내는 일이 절대로 쉽지가 않다. 잠자는 시간을 빼고 거의 한 달간을 밀착 취재하는데, 몇 달 동안 촬영하는 때도 있다고 한다.

‘인간극장’ 출연으로 유명해진 트로트 가수 정동원과 박서진은 요즘 그 인기가 날로 높아지고 있다. 사연이 영화로 만들어져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기도 한다. ‘말아톤’, ‘맨발의 기봉이’, ‘우생순’(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은 인간극장에서 소개한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이다. 백발의 연인으로 출연한 노부부의 사랑 얘기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라는 독립영화로 만들어져 많은 사람의 눈시울을 적시기도 했다. 밤에 변소 가는 것을 무서워하는 할머니가 용변을 마칠 때까지 집 밖에 있는 변소 앞에서 노래를 불러주던 사랑꾼 할아버지가 끝내 세상을 뜨는 장면은 두고두고 잊을 수가 없다.

‘인간극장’에 출연하는 이들을 살펴보면 가진 것이 많거나 많이 배우거나 높은 지위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다. 하지만 자기 위치에서 묵묵히 자신의 삶을 가꾸고 조그만 것에서도 소소한 행복을 길어 올리는 그들의 일상이 묵직하게 다가온다.

치매에 걸린 노모를 간호하기 위해서 생업까지 포기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어머니를 모시는 아들을 보니 그런 남편을 품어주고 가족 부양의 책임을 떠안는 아내도 남달라 보였다. 아흔일곱의 어머니가 가고 싶다는 곳을 찾아서 전국을 함께 여행하는 딸, 자기를 키워 준 할머니를 극진히 모시는 손녀의 사연도 참 훈훈했다. 효도는커녕 왜 남들처럼 물려주는 게 없느냐며 불평하는 세태 속에서 핀, 한 떨기 연꽃이라고나 할까?

끔찍한 자식 사랑도 ‘인간극장’의 단골 주제다. 고향 땅에서 평생 농사를 지어 7남매를 키워 결혼시키고도 여전히 산골에서 밭을 일구고 있는 노부부의 사연엔 가슴이 먹먹해졌다. 배운 것도 없이 찢어지게 가난했지만, 자식 공부에 자기 삶을 몽땅 바치고도 뭘 더 못 줘서 안타까워하는 그 부모의 마음은 어떤 경지일까 경이로웠다. 그 공을 모르지 않는 자식들이 주말마다 고향 땅으로 내려가 부모를 돕고 웃음꽃을 피우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따뜻해져 왔다.

자기 자식도 있건만 장애가 있는 아이들을 셋씩이나 입양해서 키우는 부모, 이혼하고 혼자서 아들을 키우는 아빠, 치매에 걸린 아내를 십수 년간 헌신적으로 돌보는 70대 남편도 존경스러웠다. 장애를 딛고 자기 분야에서 눈부신 업적을 남긴 장애인, 편견과 멸시, 차별 앞에서도 당당히 맞서며 살아가는 성소수자와 다문화 가족, 북한이탈주민 가족, 부도가 나거나 파산당하고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빚을 다 갚은 뒤 재기에 성공하는 사람도 있었다. 인기 연예인으로 인생의 정점에 섰다가 생활보장 대상자로 월세방에서 투병 중인 가수 박인수를 간병인도 없이 혼자 보살피는 부인의 사연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잘 나가던 사업을 정리하고 전원생활로 인생 2막을 연 사람, 대기업을 그만두고 부모님의 떡집을 도우며 가업 승계를 도모하는 아들, 해녀와 해남의 길에 도전하는 젊은이, 부모님의 고향을 지키며 마을 일을 챙기는 20대 처녀 이장, 다들 동경하는 대도시의 삶이나 높은 연봉 대신 부모님이 평생 일궈온 농업이나 어업의 길을 선택한 젊은 농부와 어부의 사연도 신선했다. 많은 수입과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해외의 오지로 나가 의료 봉사에 자신의 삶을 바치는 부부 의사의 얘기는 날 부끄럽게 했다. 자기 사업 홍보를 위해 출연한 사람이나 기구한 사연들로 후원을 받아내려는 출연자 때문에 논란이 인 적이 있지만 그것은 빙산의 일각이라 믿고 싶다.

역사에 길이 남을 학술 이론을 발표하고 수많은 저서를 남기지는 못했지만, 남들의 이목이나 평가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의 위치에서 묵묵히 자기 삶을 가꾸고 아낌없이 나누는 그들이야말로 위대한 철학자가 아닐까 싶다. ‘보통 사람들의 특별한 이야기, 치열한 삶의 바다에서 건져 올린 우리 이웃들의 따뜻하고 감동적인 이야기’를 보면서 내 행복의 잣대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내겐 큰 선물이다. 남들과 비교하며 무작정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작은 일에도 감사하고 더 많은 것을 나누려고 애쓰는 사람들의 ‘인간극장’은 시청률도 9% 내외를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 자극적인 예능 프로그램과 충격적인 내용들로 시선을 끌려고 하는 시청률의 노예가 되지 말고 ‘인간극장’ 같은, 살맛 나는 장수 프로그램을 더 많이 만들어 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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