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찬국 논설위원, 전 충남대 무역학과 교수

허찬국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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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구(舊)소련의 마지막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타계했다. 재임 말기에 소련(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USSR)의 해체로 20세기 중후반 세계사를 지배했던 동서냉전이 종식되었다. 당시 냉전과 같은 불록화가 없을 것이라는 기대가 컸다. 하지만 작금의 상황은 그게 일장춘몽이었음을 보여준다.

냉전 종식 이후 시장경제에 바탕을 둔 다자주의적 국제질서가 자리 잡는 듯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근래 G2국 간의 긴장,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미국과 유럽, 그리고 중국과 러시아 두 그룹으로 나뉘며 갈등이 고조되는 양상이다. 경제적으로 원자재 수출국 러시아보다 세계 2위 경제로 부상한 중국이 더 큰 변수이다.

세계 공급망은 미국 대 중국 중심 재편

과장하면 우리나라는 미국과 중국 사이에 끼여 있는 형국이다. 중국이 제일 큰 수출시장인데 중국의 최대 수출국은 미국이어서 우리의 수출에 미치는 미국의 직·간접적 영향이 매우 크다. 더욱이 인적, 물적 교류 등 포괄적으로 보면 미국의 중요도가 더 클 것이다. 미국은 비교적 자유방임적인 대내 및 대외 경제 기조를 유지해왔다. 그런데 지난 20년 사이 빠르게 질적, 양적 성장을 이룬 중국이 세계 제2 경제로 부상하자 과거와 다른 반응을 보이고 있다. 중국이 첨단산업 육성을 위해 전력 투구하며 모든 수단을 동원하고 나서자 미국은 전례 없는 산업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최근 미국 의회는 양당의 압도적 지지로 본격적 산업정책 출범을 알리는 ‘반도체과학법’을 통과시킨 지 한 달도 안 되어, 8월 중순 바이든 정부의 산업정책 2탄인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을 민주당 단독으로 통과시켰다. 첫 번째 법안의 배경은 미국이 중국의 잠재적 영향력 하에 있는 동북아에서 반도체 생산 대부분이 이루어지는 지금 상황이 불편한 것이다. 자국 내 반도체 생산시설 확대에 총 520억 달러의 각종 보조금 지원과 세액 공제 등을 주 내용으로 하여 첨단 반도체 산업의 주도권을 확보하겠다는 의지를 명확히 하고 있다. 동시에 일본, 한국, 대만을 포함하고 미국이 주도하는 반도체 연합 ‘칩4’ 추진을 통해 중국을 제외하는 반도체 생산 네트워크를 자국 내에 구축하려는 것이다.

‘인플레이션’이 들어간 제목과는 달리 두 번째 법안 내용은 다양한데,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막대한 투자가 산업정책 내용이다. 특히 기후변화와 관련, 전기차 보급을 촉진해 2030년까지 자국 내 신차 판매 중 전기차 비중을 50%로 높인다는 계획이다. 반도체와 마찬가지로 자국의 안정적인 전기차 배터리 공급망을 구축하려는 것이다.

산업의 쌀 반도체 수요가 큰 중국이 자체적 생산 능력을 키우는 ‘반도체 굴기(崛起)’를 추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아직까지 한국이나 대만의 수준에 못 미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은 중국의 생산능력 미비와 높은 수요의 수혜국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도 변화가 예상된다. 미국이 주도하는 칩4 연합이 본격적으로 가동되면 한국 반도체 기업들도 미국 현지 생산을 크게 늘려야 할 것이고, 우리 기업이 중국에 팔 수 있는 반도체 종류에도 제약이 가해질 것이다. 반면 중국은 한국 기업에 더 첨단 사양의 반도체 공급을 요구할 것으로 보인다. 원만한 접점을 찾지 못하면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 중국은 보복에 나설 것이다.

우리 정부·기업 능동적 유연성 갖춰야

첫째, 첨단산업 분야 세계 공급망의 재편으로 어려운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에 대비해야 한다. 범용 공산품보다 고부가가치 분야에 집중하는 우리 기업들 입장에서 미국 중심의 공급망 가입은 불가피해 보인다. 당분간 세계 구매력 분포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기에 미국과 유럽이 우리 기업의 고부가가치 생산품의 시장이 되기 때문이다.

둘째, 저비용 원자재, 부품·소재 공급처로서 중국의 위상은 유지될 전망이나 우리에게는 중국을 대체할 소재 공급선 확보, 중남미 아프리카 등에서 원자재 공급원을 발굴하는 것이 중요해질 것이다. 소비재 시장으로서 중국의 위상은 계속 커질 것이다. 중국 소비자들의 구매력이 빠르게 늘고 있어 우리 기업이 미국이나 유럽에서 판매하는 소비재에 관심이 높아질 것이다.

마지막으로, 향후 세계경제 여건은 과거 WTO(세계무역기구) 다자주의 체제 질서에 비해 변화무쌍할 것이다. 유연한 대처가 필수적이다. 기업의 입장에서 어디서 어떤 제품을 어떻게 만들지가 상황에 따라 바뀔 수 있다. 현재 미국에서 판매되는 국산 전기 자동차가 보조금을 못 받게 되며 불이익에 대한 우려가 크다. 자동차, 배터리 외에도 친환경 에너지 관련 산업이 IRA의 영향권에 들어간다. 대규모 예산이 투입되어 수혜가 예상되지만 원료나 소재, 부품의 원산지 요건이 엄격해지면서 자칫 경쟁력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수출 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 경제의 기본적 특징을 생각하면 근로자들도 외부 여건의 변화에 유연히 대처해야 할 필요가 있다. 좀 더 국제적인 시각과 언어능력을 갖추는 것이 한 가지 방편이다. 마지막으로 정부와 공공부문도 유연하게 여건 변화에 대처하는 능력을 키워야 할 것이다. 자원개발, 에너지, 방위산업 등 몇 가지 분야만 보더라도 정부의 정책과 공공부문의 능동적인 대처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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