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리 입사 후 첫 업무는 SR와이어에 글을 쓰는 것이었다. 경영에 대해 제대로 배운 적 없었고, CSR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또한 경험하지 않은 것에 대해 글로 쓰는 것은 내게 매우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6개월 동안 코스리에서 CSR, 지속가능성, 그리고 기업의 본질에 대해 고민하면서 이제는 몇 마디 정도는 내 생각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처음에 CSR은 '기업이 만들어내는 부정적 외부효과를 스스로 내재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크게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처음에는 정부도 시민사회도 아닌 '기업이 그 이상으로 도대체 뭘 할 수 있는데'라고 생각했다. 기업이 만들어내는 문제의 크기도 그리고 그만큼의 문제해결력도 나는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지금은 기업과 시장이 만들어내는 변화가 꽤 크다는 걸 느끼고 있다. 그래서 기업에게 CSR을 말한다고 생각한다. 전공 수업 내내 정부에게 민주성을 요구하라는 외침과 같다. 이에 관해서 짧게 스치고 간 몇 가지 생각들을 모아봤다.

01 CSR은 '가치'의 단어다
대학교 2학년 때 행정철학이라는 수업을 들었다. 누군가는 전공에 학을 떼었지만 나는 행정학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을 가지게 된 계기였다. 내가 만약 경영학을 배우면서 '경영철학'이라는 수업이 있었다면, 그 과목이야 말로 CSR에 대해 논하는 과목이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행정학에서 말하는 대응성(responsibility), 책무성(accountability), 민주성, 공정성, 투명성 등 다양한 목적가치를 기업에게 요구하는게 CSR이 아닐까? 그만큼 CSR을 이해하고 행동에 옮기기가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02 CSR은 '누가' '무엇을' '문제'라 정의하는가도 중요하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CSR은 과학적 논의보다는 현상을 해석하는 것이라고도 생각한다. 현상을 해석할 때 중요한 것은 그 현상에 대해 '누가, 무엇을, 문제다!'라고 정의하는가다. 세븐스제너레이션은 친환경 가정용품을 만든다. 기업 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미래의 7세대를 고려한 제품을 만들고 회사를 운영한다. 그래서 세븐스제너레이션은 소비자 건강에 대한 애드보커시를 시작했다. 이 기업은 미국에서 유해물질규제법 (Toxic Substances Control Act)이 1976년에 통과된 이후로 다른 주요 환경법안과는 달리 한번도 개정되지 않았다는 점을 문제삼았다. 그래서 일상용품에 사용되는 화학용품에는 보다 높은 규제를 요구하는 로비를 진행했다. 세븐스제너레이션은 기업이 일상용품을 만드는데 화학용품 사용 수준이 과도하다는 점을 문제라고 정의했고 행동에 옮겼으며, 시장의 규칙을 변화시켰다.

03 CSR은 자기모순성을 이해하는 과정이다(내면의 내러티브를 듣자)
나는 내가 꽤 자기 모순적이라고 생각한다. 기업이 환경악화에 책임질 것을 요구하는 글을 쓰면서 하루에 나 혼자서도 꽤 많은 쓰레기를 만든다. 꼭 하루에 한 잔 이상의 커피를 테이크아웃 잔에 마시고, 디지털 시대에 보고서를 꼭 프린트 하지 않아도 되지만 프린트한다.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종이 한 장 아끼지 못하는 내가, 여성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결국 여성의 날에는 여성에 대해 한마디도 할 수 없어 SNS 좋아요만 누른 내가 부끄럽지만, CSR에 대해 말하고 있다.

내가 느끼는 부끄러움에 관해 이야기 하는 것은 사실 CSR을 활동에 옮기는 과정에서 기업이 부딪힐 문제를 개인 수준에서 설명하기 위해서다. 분명 기업이 CSR을 기업 가치로 내재하고, 그러한 활동을 하다보면 걷잡을 수 없는 책임이 앞에 놓이게 될 것이다. 생활용품을 만드는 기업에서 종사하시는 분을 만났을 때 '업 자체가 지구에 죄악'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떤 설문조사에서는 '기업의 71%는 자사의 공급망 내 어딘가에서 현대판 노예제가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CSR을 하려다가도 괜히 판도라 상자를 열어서 '감당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 차라리 열지 않는 게 나았나'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적 경험에 비추자면, 차라리 지금에서라도 나의 모순성을 알게 된 것을 다행이라 생각하고 판도라 상자 속 경험을 받아들이고 있다. 한 번에 모두 해결할 수는 없다. 단지 마주하는 문제와 그 속에서 발생하는 갈등을 풀어가는 과정 자체가 의미 있는 것이라고 믿으며 만들어 내는 변화가 필요하다.

04 CSR도 소통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내가 옳은 일, 좋은 일을 하려 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공유되어야 한다면 이 또한 전략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예를 들면, 기업 내부에서 전사적 로드맵 수립부터 CSR을 적극적으로 녹인다던지, 탑다운 리더십을 보여 리더가 임직원을 만나는 모든 자리에서 CSR을 논한다든지, 아니면 대놓고 교육을 진행하는 방법도 있다. 기업 내부에서 CSR을 소통하는 전략을 마련하는 것 자체가 의미 있다.

반대로 기업 외부의 소비자와 CSR에 대해 소통할 전략도 필요하다. 가장 간편한 방법은 인증마크다. 환경책임에 대한 ISO 규정을 준수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ISO 14001 인증을 받으면 소비자는 그걸 보고 기업의 환경 책임을 이해할 수 있다. 또는 소비자가 제품 생산의 과정에 참여하여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프로그램도 있다. 예전에 인터뷰를 진행했던 한 사회공헌 담당자는 소비자가 기업의 CSR 현장에 직접 참여하는 프로그램에서 소비자의 호응도가 좋았으며, 레퓨테이션도 높아졌다는 소감을 말했다.

05 CSR을 위해 소비자도 호응해야 한다
기업이 CSR을 소비자와 소통하기 위한 노력을 한다면 소비자 또한 노력에 상응하는 제스처를 취해야 한다. CSR을 잘하는 기업에게 당근을 못하는 기업에게 채찍을 주는 피드백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당위적 논조에서 기업의 CSR을 하라는 분위기는 사실 별로 힘이 없다. 책임을 다하는 경영을 포기한 기업의 제품을 불매한다든지, 그보다 더 적극적인 운동에도 소비자가 참여해야 한다. 반대로 책임을 다해 경영하는 기업의 열혈 프로모터가 되는 등 피드백 관계를 원활하게 이어가야 한다. 소비자가 기업이 CSR을 잘할 수 있도록 독려해야 한다.

06 CSR이라는 PPT를 EXCEL로 옮길 수 있다.
PPT와 EXCEL은 사용 목적 자체가 다르다. PPT는 시각적 인상을 통해 상대를 설득할 때 효과적이고, EXCEL은 자료를 수리적으로 정리하고 표현할 때 효과적이다. CSR은 대체로 PPT 형식으로 논의된다. CSR을 EXCEL로 설명하려는 게 오히려 문제라는 글도 수차례 봤다. CSR이 가치라면 숫자로 평가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이다. 근데 사실 개인적으로는 이 분야에 대해 계속 도전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아직 숫자가 힘이 있는 세상이다. 지표가 활동을 정의한다. 현대카드의 'PPT 금지령' 사례에서 정태영 부회장은 'PPT 그림을 위한 억지스러운 말들이 없어져' 보고가 명확해진다고 보았다. PPT를 EXCEL로 옮기는 노력이 지속될 때 CSR을 이야기하는 게 더 편해질 수 있다.

07 기업은 할 수 있는 게 너무 많다. 그래서 CSR이 필요하다
유통업에 종사하는 사회공헌담당자를 인터뷰했다. 그분은 "마트는 각종 오염을 생산하는 제조물품이 매연을 내뿜는 운송수단을 타고 모여 소비자와 최접점에서 만나는 곳이다. 마트에 어떤 제품을 어떻게 이송해서 놓느냐는 소비자의 라이프스타일에 분명히 영향을 미친다"고 했다. 그분과 인터뷰 중에 가장 아차 한 순간이다. 정부가 많은 정책을 만들고 재화와 서비스도 공급하지만, 실제로 사람 한 명 한 명과 만날 기회는 기업이 만드는 재화나 서비스가 훨씬 많다. 그래서 기업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다. 더 많은 나쁜 영향을 만들어 나의 삶 구석구석에 자리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좋은 영향을 더 깊고 빠르게 나의 삶에 침투시킬 수 있다. 이게 내가 내린 CSR이 필요한 이유다.

08 CSR을 논하는 사람의 대부분은 자신의 인생을 주도한다
정말 이상하게도 그렇다. 일반화의 오류라고 해도 좋다. 사실 이런 결론은 내가 이곳에 6개월간 만나온 사람들에 대한 존경도 섞여 있다. 그들은 자신의 과업이나 흐르는 시간에 자신의 삶이 끌려가도록 두지 않았다. 자신의 삶을 위한 일과 시간을 선별하고 정렬해가는 사람들이었다. 자신의 삶에 대해 치열한 고민을 했기에, CSR 담론에 뛰어든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옳은 일을 올바르게 하고 싶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서 감사했다. 그들의 생각, 그 생각을 반영한 글과 말, 그리고 생각을 실현한 활동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나에 대해서도 많이 고민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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