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호 논설위원, 서울시립대 명예교수(도시설계)

김기호 논설위원
김기호 논설위원

우리나라 국토와 도시의 인구밀도가 높은 것은 이미 여러 지표와 비교를 통해 잘 알려져 있다. 한국의 인구밀도(530인/㎢)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가장 높다(World Bank Data, Population density-OECD members, 2021). 서울시 인구밀도(16181인/㎢)도 도쿄(14368인)나 뉴욕(10430인)보다 많이 높다(서울 솔류션, 세계도시정보, 2012).

우리 일상생활을 약간 곤란하게 하는 것 같던 밀도가 최근에는 우리에게서 많은 것을 앗아가기 시작했다. 이태원사태가 그랬고 ‘김포 신도시’로 드러난 지하철 초만원 사건이 또 다른 위험신호를 보낸다. 이 외에도 여러 곳이 밀도로 몸살을 앓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일상 속에서 비인간적 취급을 당하고 있고 심지어 목숨을 잃고 있다. 더 늦기 전에 밀도와의 전쟁을 시작해야 한다. 사고 대상지나 대상 시설에 대한 대책은 근본 해결책이 아니다. 전쟁 전체의 구도를 바꾸는 근본적 대책이 필요하다. 그 키워드는 ‘밀도 관리’다.

서울 강남지역의 아파트 재건축 현장(주변 건물 7층에서 본 모습). 35층 이하이지만 여러 건물이 겹쳐 앞을 꽉 막는 벽을 만들고 있다. 사진: 김기호, 2022년
서울 강남지역의 아파트 재건축 현장(주변 건물 7층에서 본 모습). 35층 이하이지만 여러 건물이 겹쳐 앞을 꽉 막는 벽을 만들고 있다. 사진: 김기호, 2022년

밀도는 양날의 검(劍)이다. 낮은 밀도로 더 쾌적한 시가지를 만들고 싶지만 충분한 인프라를 설치하기 어렵다. 사용자 수가 적어 인프라 설치와 운영이 쉽지 않아 생활이 불편할 수 있다. 반대로 밀도가 너무 높으면 많은 인프라 제공이 가능하나 공간환경의 질이 낮아질 우려가 커진다. 둘 사이의 적절한 균형을 이루게 하는 것이 도시계획의 과제다. 그러나 우리 도시계획은 그 균형을 잡는 데 실패했다.

지하철역의 출퇴근 전쟁. 많은 사람이 심리적 압박감과 공포감을 느끼고 있다. 자료: 매일건설신문, 2015.3.4.
지하철역의 출퇴근 전쟁. 많은 사람이 심리적 압박감과 공포감을 느끼고 있다. 자료: 매일건설신문, 2015.3.4.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거가 가까워지니 밀도를 완화하여 더 많이 더 높게 지을 수 있게 하겠다는 공약이 넘치고 있다. 오직 득표만을 염두에 둔 감언이설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더 높은 밀도가 사람들의 생명과 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검토한 이야기는 없다. 경관에 대한 추악한 영향은 이미 잊은 지 오래다. 변화하는 사회경제 환경 속에 심지어 경제성도 불확실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아무튼 현재보다 더 많이 짓게 하면 더 수익이 많아질 것이라는 순진한 주먹구구식 셈으로 주장할 뿐이다. 정치와 행정의 책임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탁 트인’ 조망에 높은 관심을 보이는 것도 도시 내 고밀도와 답답함의 다른 표현이다. 조망(대단히 아름다운 경치도 아닌 그저 개방감 정도)을 원하면 주변보다 더 많이 지불해야 하는 것이 슬프지만 현실이다. 나아가 도시인들은 흔히 “내가 먹고살 것만 있으면 당장 이 도시를 떠나지” 하고 말한다. 이것도 도시의 물리적 인간적 폐쇄성을 표현하는 말에 다름이 아니다.

새삼 도시의 장점과 농촌의 장점을 합하여 새로운 도시의 상(像)으로 ‘전원도시’(garden city, 사실 ‘정원도시’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적합해 보인다)를 제창한 하워드(E. Howard, 영국의 도시계획가이며 전원도시 운동 창시자, 1850~1928)가 생각난다. 전원도시처럼 낮은 밀도는 아니라도 시가지와 주거지에서 하늘과 주변의 아름다운 산과 자연을 쉽게 느낄 수 있는 도시를 만드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도시계획과 건축 전문가들의 선도적 역할이 필요한 부분이다.

파리 동쪽(10층 건물)에서 시테 섬(Ile de la Cite) 방향으로 본 중심지 전경. 에펠탑, 노트르담 성당 그리고 멀리 라 데팡스(고층 건물군)가 보인다. 전 시가지가 대체로 5∼10층 높이로 관리되어 하늘로의 개방감이 크고 주변의 역사적 랜드마크 건물을 잘 볼 수 있다. 사진: 김기호, 2012년
파리 동쪽(10층 건물)에서 시테 섬(Ile de la Cite) 방향으로 본 중심지 전경. 에펠탑, 노트르담 성당 그리고 멀리 라 데팡스(고층 건물군)가 보인다. 전 시가지가 대체로 5∼10층 높이로 관리되어 하늘로의 개방감이 크고 주변의 역사적 랜드마크 건물을 잘 볼 수 있다. 사진: 김기호, 2012년

밀도는 숫자로 표시되므로 일반인들이 쉽게 그 실제적 영향을 알기 어렵다. 그러기에 사례를 통한 경험치나 이론적 연구를 통한 적정수치가 판단의 가늠자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를 위해서는 외국 사례보다 우리 땅에 지어진 도시나 주거지 등의 밀도가 어떤 문제와 과제를 가져오는지 연구하고 검토해야 할 것이다. 혹시나 근년의 여러 사회병리적 현상이 ‘과밀로 인한 결과는 아닌지’부터 교통체증과 환경오염, 피부병, 운동 부족 등 긴밀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 도시나 지역 등 광역적으로는 인구밀도의 조절이 중요하며 지구(가로)나 대지 차원에서는 건축밀도의 억제가 중요하다. 학계의 기여가 절실한 부분이다.

이제 파티는 끝났다. 계속 고속 성장한다는 근사한 미사여구, 일단 벌여 놓으면 뒤는 다 알아서 해결된다는 무책임한 낙관론, 현대화, 선진화를 빙자한 투기 파티, 결국 누구를 위한 것이며 무엇을 위한 것인가? 미래 선진국 국민을 위한 노력이 시민들이 일상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출근하게 하는 것일 수는 없다. 좀 더 삶의 가치를 추구할 수 있는 국가와 도시의 비전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그 출발은 ‘밀도와의 전쟁’ 선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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