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낙 논설위원, 가천대 명예총장

이성낙 논설위원
이성낙 논설위원

유럽 문화권을 여행하다 보면 크고 작은 다양한 조형물을 만나게 됩니다. 광장마다 거리마다 모퉁이마다 이런저런 볼거리가 많은데, 오래된 고도(古都)일수록 더욱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중에서도 전쟁과 얽히고설킨 조형물을 빼놓고서는 볼 것이 없지 않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전쟁 관련 조형물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전쟁의 아픔도 컸다는 뜻일 겁니다.

가장 대표적인 전쟁 조형물로는 영국 런던 중심가에 있는 트래펄가 광장(Trafalgar Square),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Arc de Triomphe), 그리고 독일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 문(Brandenburger Tor)을 들 수 있습니다. 모두가 예외 없이 혁혁한 승전보를 보란 듯이 알리고 싶어 하는 발의자의 생각에서 비롯되었기에 공덕비(功德碑)의 한계를 넘어서지는 못했지만 말입니다.

역설적으로, 그 많은 전쟁이 유럽 대륙을 휩쓰는 동안 얼마나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되었을지 생각하면 숙연해지까지 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독일 뮌헨에 있는 개선문(Siegestor)은 그 차분한 역사관과 무거운 철학이 융합해 일궈낸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여느 전쟁 조형물과는 크게 다르다고 하겠습니다. 

뮌헨개선문의 온전한 앞부분(왼쪽)과 파손된 채 그대로 둔 뒷모습. 사진 Google 캡처.
뮌헨개선문의 온전한 앞부분(왼쪽)과 파손된 채 그대로 둔 뒷모습. 사진 Google 캡처.

필자가 뮌헨 개선문 앞에 처음 선 것은 1962년 늦가을 무렵이었습니다. 늦은 오후 운무(雲霧)가 자욱한 가운데 커다란 조형물이 어렴풋이 보여 발길이 자연스레 그리로 향했습니다. 폭이 넓은 차도 중앙에 자리를 잡은 조형물은 일견 전형적인 개선문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니 특이한 점이 눈에 띄었습니다. 

나폴레옹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여 1852년에 완공한 뮌헨개선문은 제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크게 파손된 흔적이 역력했습니다. 그런데 파손된 개선문을 1958년 재건하면서 원래 모습대로 복원하지 않고 전쟁의 아픈 흔적을 의도적으로 노출했다는 사실을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파손된, 그래서 복원해야 할 부분을 질감이 전혀 다른 석재를 이용해 수리함으로써 전쟁의 상흔(傷痕)을 그대로 드러내 보인 것입니다. 

전쟁과 승리, 파괴와 평화를 함께 새겨 넣은 개선문의 문구. 사진 Google 캡처.
전쟁과 승리, 파괴와 평화를 함께 새겨 넣은 개선문의 문구. 사진 Google 캡처.

하지만 크게 파손된 부분을 단순히 수리한 데서 그치지 않고 백색 석재로 간결하게 처리해 단아한 아름다움을 극대화했습니다. 그리고 그 흰색 벽면에 다음과 같은 아홉 단어를 새겨 넣었습니다. “승리를 위하여 봉헌되었다(DEM SIEG GEWEIHT). 전쟁으로 파괴되었다(VOM KRIEG ZERSTÖRT). 평화를 위해 경고한다(ZUM FRIEDEN MAHNEND).” 그걸 읽는 순간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구조물의 다른 쪽, 그러니까 정면은 원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이 역사물에는 “바이에른 육군(Dem Bayerischen Heere)에게 바친다”는 명구도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훗날 필자는 아홉 단어로 이뤄진 시구(詩句)가 뮌헨대학교 명예교수 한스 브라운(Hans Braun, 1893~1966)의 작품이라는 걸 우연히 알게 되었습니다. 브라운 박사는 언론인, 주필, 연극평론가, 작가, 교수, 신문학자, 연극비평가였던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답니다. 그를 자랑스러워하던 뮌헨시 문화담당관 뮐러 박사(Dr. Müller)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https://de.wikipedia.org/wiki/Hanns_Braun_(Journalist)

필자가 이 시구를 보는 순간 형언키 어려운 감흥의 도가니에 빠졌던 것은 양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던 독일 민족의 뼈에 사무치는 반성의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훗날(1970년)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Billy Brandt, 1913~1992)가 이웃 나라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서 세기의 ‘무릎 꿇기(Kniefall)’를 한 것도 독일 민족의 이런 정신과 무관하지 않다고 필자는 생각합니다. 바로 그날, 그러니까 참회의 무릎 꿇기 직후 다음 행선지로 이동하던 중 같은 차량에 탔던 폴란드 총리가 갑자기 브란트를 포옹하며 흐느껴 울었다는 얘기가 전해집니다. 많은 생각이 스치는 대목입니다. 

1970년 12월 7일 폴란드 바르샤바 유대인 위령탑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하는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 사진 Google 캡처.
1970년 12월 7일 폴란드 바르샤바 유대인 위령탑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하는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 사진 Google 캡처.

당일 아침 내린 비 때문에 행사장이 흥건하게 젖었음에도 브란트 총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참회의 무릎을 꿇었습니다. 실로 역사에 남을 ‘반성의 모습’입니다

영국 출신이면서 독일 사회를 깊이 연구하고, 특히 미술사학자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닐 맥그레거(Neil MacGregor, 1946~ , 2002년부터 영국박물관장)는 자신의 명저 《독일, 한 국가의 기억들(Deutschland, Erinnerungen einer Nation)》 (Verlag C.H. Beck, München, 2015) 서문에서 “독일의 기념비는 다른 나라들 것과는 다르다(Deutschlands Denkmale sind anders als die anderer Länder)”라고 언급하며 뮌헨개선문을 그 사례로 들었습니다. 맥그레거 역시 승자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가 전쟁으로 인해 파손된 개선문을 바라보며 필자와 비슷한 감흥을 느꼈는지 모릅니다. 과거를 돌아보며 앞날을 경고하면서 묵직하게 반성하는 개선문 말입니다.

주해: ‘환경과 조경(2010)’에 실린 필자의 칼럼 내용과 겹치는 부분이 있다는 점을 밝혀둡니다.

저작권자 © 데일리임팩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