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훈 논설위원, KBSI 분석과학마이스터

이석훈 논설위원
이석훈 논설위원

예로부터 우리나라를 일컬어 삼천리금수강산(三千里錦繡江山)이라 한다. 미국의 그랜드 캐년(Grand Canyon)이나 중국의 장가계와 같이 웅장하고 경이로운 모습은 없지만, 철마다 그 빛깔을 달리하는 산과 그 사이로 흐르는 맑은 계곡물은 말 그대로 비단에 수놓은 고운 빛깔의 화려한 무늬처럼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을 담고 있어 전국 어디를 가나 한 폭의 산수화가 펼쳐진다.

마치 늘 접하는 공기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이 땅에서 태어나 평생을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한국의 산과 물이 가져다주는 진정한 의미를 인식하지 못하고 일상으로 지나치지만,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에겐 그저 부러움과 놀라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아시다시피 유럽에 가서 수돗물로 아주 잠깐만 씻어도 피부가 퍽퍽하고 머릿결이 금방 상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샴푸나 린스가 필요한 것이다. 독일에 맥주가 발달한 이유도, 프랑스 에비앙이란 생수가 유명한 것도, 중국에 차 문화가 발달한 것도 계곡물이나 수돗물을 그냥 마실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일상적으로 맥주와 탄산수를 마시곤 한다.

외국인의 눈에 한국의 물이 얼마나 부러운 일인지 모른다. 특히 외국인들이 한국에 와서 등산이나 계곡에 놀러 갔을 때 계곡물을 자연스럽게 마시는 것에 놀라기도 하지만, 그보다 먼저 집에서 설거지나 샤워를 해보고 깜짝 놀란다고 한다. 외국, 특히 유럽의 경우 물에 석회질이 다량 함유되어 있기 때문에 설거지를 마칠 때면 늘 헝겊이나 천으로 석회를 닦아내는 작업까지 거쳐야 한다. 샤워할 때도 예외는 아니다. “한국인들은 피부가 부드럽다고 하는데, 이게 다 물 때문이냐”며 “샤워만 했는데도 힐링이 되는 기분”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

그러다 보니 유럽에서는 마시는 물이 상당이 귀하다. 한국 호텔에서는 냉장고에 있는 생수를 곧장 따서 마시면 되지만, 외국은 대부분 이 생수에 비용을 청구하거나 아예 객실 내에 비치해두지 않는 곳도 있다. 물을 마시고 싶다면 비싼 물을 구입해야 하거나 호텔에 들어오기 전 마트에서 물을 사 와야 한다고 한다. 외국을 여행한 사람들이라면 마시는 물 때문에 한 번쯤 난처한 경험들이 있을 것이다.

물론 한국 역시 과거와 다르게 산업 발전으로 인해 환경이 오염되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산골짝에서부터 흘러 내려오는 계곡물은 청정수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깨끗하다. 그러기에 아직도 한국에서는 앞에서 말했듯 계곡물을 그냥 마시기도 한다. 그리고 등산할 때 애초에 등산 목적이 약수터인 경우도 있었다. 또한 식당, 카페 등 어디를 가더라도 물은 공짜라는 인식에 젖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식당에 들어가서 주문하기 전에 물부터 가져다주는 것이 일상이며, 안 주면 당연한 권리처럼 물을 요구한다. 카페 역시 언제든지 물을 마실 수 있도록 물통을 비치해둔다. 어디서나 비싼 돈을 지불하고 물을 마시는 외국인들은 한국에선 어디서든 물을 공짜로 마실 수 있고, 심지어 샘물이나 계곡물을 그냥 떠 마시니 놀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외국인들이 한국에 와서 놀라는 것 중 하나가 정수기라고 한다. 유럽은 수돗물을 그냥 마시기에 적절하지 못함에도 생수 회사들의 압력이 워낙 거세서 정수기 시장이 자리를 잡지 못한다고 한다. 그런데 한국의 물은 석회 성분이 거의 없는 깨끗한 물임에도 가정에서 정수기까지 사용하는 한국인들을 그들은 이해할 수 없어 한다. 등산이나 계곡에 놀러 갔을 때 거리낌 없이 계곡물을 마시던 한국인들이 집에서는 정수기까지 사용하며 관리하니 그저 황당한 노릇인 것이다. 한국의 수돗물은 마셔도 안전하다는 평가를 받고, 서울 수돗물 아리수는 세계 최고 수준의 물로 인정되고 있지만, 한국인들은 그것을 의심하고 결국 집 안에 정수기를 설치해 정수된 물을 마신다든지 혹은 생수를 사 마시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한국에서 수돗물에 대한 불신은 편견에서 비롯되었다. 하나는 1991년 구미국가산업단지에서 페놀 원액이 낙동강을 통해 대구로 흘러드는 사고가 발생하여 수돗물이 국가적으로 중요한 이슈가 되었지만, 이 사건으로 우리나라 식수 처리시설은 다른 나라들에 비해 수질 체크 항목이 강화되었다.

우리나라 가정에서 사용되는 정수기의 정수 방식은 중공사막식(中空絲膜式, 중간이 비어 있는 튜브 모양의 실뭉치로 만든 막을 이용하는 방식. 일반적인 정수필터는 다 이 형태임)과 역삼투압식이 주로 사용된다. 중공사막식 정수기는 미세한 필터로 물을 거르는 방식으로, 정수기를 거친 물의 미네랄 함량은 수돗물과 비슷하다. 따라서 수돗물에 포함되어 있을 수 있는 알갱이 형태의 불순물을 거르는 기능은 하지만, 수돗물에 녹아 있는 불순물을 거르는 기능을 하지 못한다. 또한 필터를 주기적으로 교체해주어야 하는 불편함도 동반된다.

반면에 역삼투압식 정수기는 역삼투막에 강압적으로 물을 통과시켜 일체의 불순물을 없애는 방식으로, 유해 물질을 포함한 모든 미네랄을 걸러내 증류수에 가까운 물로 만들어 소위 미네랄을 찾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역효과를 주며, 세균이 번성하는 단점이 있다. 어느 방식이든 수돗물을 믿지 못해서이든 수도관의 오염에 따른 염려에서든 우리나라 가정에서 굳이 정수기를 사용해야 할 필요성을 찾기 어렵다.

한국은 지하자원이 부족한 국가이지만, 살아가면서 건강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산과 깨끗한 물이 있는 복 받은 나라다. 국토의 70%가 산으로 되어 있고, 지반의 70%가 물에 잘 녹지 않는 광물들로 구성된 화강암과 화강편마암(변성암)으로 이루어져 있고, 석회 성분이 포함되는 퇴적암이 적을 뿐더러 비교적 한정된 지역에 분포하고 있다. 따라서 화강암 암반에 스며든 빗물은 자연 정수 과정을 통해 깨끗한 물이 된다.

세계에서 지하수를 그대로 먹을 수 있는 나라는 한국을 포함, 북미의 캐나다, 북유럽의 아이슬란드,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 덴마크, 스위스 및 섬나라 일본, 싱가포르, 호주, 뉴질랜드, 영국 15개국에 불과하다고 한다. 이에 반해 유럽이나 중국은 비교적 물에 잘 녹는 석회암이 포함된 퇴적암이 주 암반을 이루고 있어, 샘물이든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이든 석회질 함량이 지나치게 높아 그냥 마시는 것은 불가능하다. 굳이 이들의 먹는 물 생활양식을 좇아야 하는 근거 역시 매우 빈약하다.

다만, 분석과학이 발달하면서 아주 미량이지만 건강에 매우 유해한 물질에 대한 규제가 강화되고 있다. 우라늄은 '먹는물 수질기준 및 검사 등에 관한 규칙'에 따라 30㎍/L 미만, 라돈은 '먹는물 수질감시항목 운영 등에 관한 고시'에 따라 리터당 148Bq/L로 각각 정하고 있다. 따라서 기존의 수질 체크로 적합 판정이 난 지하수라도 이 항목이 체크되었는지 확인해야 한다. 우라늄은 방사성 자체 독성보다 섭취했을 때 신장에 주는 부담이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음식이나 물을 통해 섭취하더라도 99%는 배출되지만, 일부 우라늄이 뼈로 이동하면 수년 이상 남아 있을 수 있다. 라돈의 경우 휘발성이 높아 물을 마셔서 신체에 받는 위해성은 적지만, 장기간 노출되면 폐암이나 위암을 유발할 수 있다. 라돈은 세계보건기구(WHO)가 정의한 폐암의 주요 발병 원인 중 하나로 국제암연구기구(IARC)는 이를 1급 발암물질로 분류해 흡연, 석면, 벤젠 등 주요 유해물질과 같은 등급으로 관리하고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전국 지하수 관정이 약 168만 개, 이 중 먹는 물로 사용되는 관정은 약 8만5000 개로 추정된다고 한다. 2022년 7월 전국 7036개 지하수 관정(서울 제외)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환경부 발표에 따르면 우라늄 초과 관정이 148개, 라돈 초과 관정이 1561개에 달해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다. 특히 충북, 전북, 대전, 세종, 경기 및 인천지역은 조사 대상 중 라돈이 초과한 관정의 비율이 30%가 넘어 전수조사가 필요하다.

국립환경과학원에 따르면, 정수과정을 거치면 우라늄은 97% 이상, 라돈은 86% 이상 줄일 수 있다고 한다. 이에 정부는 고농도의 개인 지하수 관정에 정수기와 저감장치를 지원할 계획이며, 중·장기적으로 지방 상수도나 소규모 수도시설을 확충할 계획이라고 밝혔지만, 방사성 물질은 물을 끓여도 사라지지 않기에 지하수를 직접 마시는 것을 자제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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