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호 논설위원, 서울시립대 명예교수(도시설계)

김기호 논설위원
김기호 논설위원

번잡하고 소란한 세상을 뒤로하고 곁으로 거울연못이 이끄는 길을 오르면 조용하며 어두운 통로가 우리를 다른 세상으로 연결한다. 이제 어슴푸레한 밝음 속 넓은 공간에 천년의 미소와 비밀을 품고 나란히 앉은 반가사유상이 우리를 맞아들인다. 설핏 기울어진 벽과 바닥이 만들어 내는 공간과 빛이 우리를 자연스럽게 사유의 영역으로 접어들게 한다. 우리는 이제 두 점의 반가사유상에 집중하며 두루 헤아리며 깊은 생각에 잠기게 된다.

사유(思惟)의 방. 두 점의 금동반가사유상(金銅半跏思惟像). 국립중앙박물관 2층. 사진: 김기호(2022년)
사유(思惟)의 방. 두 점의 금동반가사유상(金銅半跏思惟像). 국립중앙박물관 2층. 사진: 김기호(2022년)

   두 보살님이 인도하는 사유의 공간

이촌동 국립중앙박물관 2층에 별도로 설치된 ‘사유의 방’(2021년 개장)에 대한 찬사가 이어진다. 전시된 금동반가사유상(6세기 후반~7세기 전반에 제작된 국보)에 대한 찬사야 말할 것 없고 더하여 반가사유상 두 점을 한 공간에서 빛과 어둠의 변화 속에 사방으로 움직이며 볼 수 있게 한 연출과 디자인(건축가 최욱)에 대하여도 놀라움과 감동의 글을 도처에서 만난다.

향후 10년간(2031년까지) 전시할 예정이라지만 사람들은 그 후에도 이 방의 존속을 요청할 가능성이 커서 박물관의 스테디셀러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같은 문화유산이라도 어떻게 기획연출하고 그를 디자인으로 구현하는가에 따라 사람들의 감동과 반응이 크게 다르다.

   텅 빈 독일 ‘노이에 바헤’의 벅찬 감동

베를린의 상징 가로인 운터덴린덴(Unter den Linden)에는 옛 궁궐(Schloss)부터 브란덴부르크 문(門) 사이 여러 곳에 독일의 역사와 가치를 드러내는 상징적 장소가 있다. 그중에서 ‘노이에 바헤(Neue Wache)’를 들어갔을 때를 잊을 수 없다. 텅 빈 것 같은 큰 방, 전체적으로 어두운 방 가운데 검은 조각상이 웅크리고 앉아 있다. 작은 천창(天窓)에서 떨어진 둥그런 빛이 조각상 주변을 두르고 있다.

노이에 바헤(Neue Wache). ‘전쟁과 독재에 희생된 사람’을 기리는 독일 공식 기념장소, 베를린. 사진: 김기호(2018년)
노이에 바헤(Neue Wache). ‘전쟁과 독재에 희생된 사람’을 기리는 독일 공식 기념장소, 베를린. 사진: 김기호(2018년)

그 가운데 팔과 다리가 앙상한 아들을 감싼 어머니가 오열 속에 입을 막고 있다. 엄숙함과 슬픔, 그리고 이를 극복하려는 인내가 느껴지는 예술작품과 이를 드러내는 연출과 공간디자인이 방문객에게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죽은 아들을 안은 어머니’, 조각가 케테 콜비츠(Kaethe Kollwitz). 사진: 김기호(2018년)
‘죽은 아들을 안은 어머니’, 조각가 케테 콜비츠(Kaethe Kollwitz). 사진: 김기호(2018년)

 

양차(兩次) 세계대전에서 아들과 손자를 잃었으며 가난과 전쟁의 피해자들에게 큰 관심을 기울인 조각가 케테 콜비츠(Kaethe Kollwitz, 1867∼1945)의 작품 ‘죽은 아들을 안은 어머니’(Mutter mit totem Sohn, 1937∼38년에 제작한 것을 확대 제작. 사람들은 이 작품을 Pieta라고도 부른다)는 바로 조각가 자신과 동시대인들의 아픔과 고통을 그대로 전해준다. 독일 네오클래식 건축의 대가 쉰켈(K.F. Schinkel, 1781∼1841)의 설계로 1816~18년에 건설된 왕궁 ‘근위병 초소(Neue Wache)’를 바이마르공화국 시절(1931년) ‘세계대전에서 희생된 사람들을 기리는 기억의 장소’로 개축한 건물이다. 건축가 하인리히 테세노프(Heinrich Tessenow, 1876∼1950)는 내부 공간을 의도적으로 소박하고 단순하게 처리해 둥근 천창(天窓)을 내고 그 아래 사각형 제단을 만들었다.

그 후 나치스시대와 동독시대(독일 분단기엔 동베를린에 위치)를 거치며 군대 퍼레이드를 동원한 국가주의 의식 중심의 장소로 사용되다가 독일 통일 후 개수(1993년)하면서 ‘전쟁과 독재에 희생된 사람(Opfer von Krieg und Gewaltherrschaft)’을 기리는 정부 공식 기념장소가 되었다. 공간은 테세노프의 디자인 아이디어를 존중해 차분하고 조용한 사색의 장소로 거듭나 지금은 누구에게나 열린 추모장소가 됐다.

   현충공간에 새로운 예술적 기준을

앞에 든 문화유산의 전시나 기념장소의 기획이나 연출, 그리고 디자인 접근은 다양한 분야에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국가와 사회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을 기억하고 흠모하는 현충 관련 장소와 시설도 기념장소로서 그 성격이 유사해 많은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이를 위해서 유념할 몇 가지 원칙을 서울을 중심으로 다음과 같이 제안하고 싶다.

국립서울현충원은 그 자체로 매우 넓은 면적(144ha)과 70여 년의 역사를 가진 곳으로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현충원 외에 도심지 등에도 현충이나 기억의 장소를 구축한다면 시민들의 현충에 대한 인식을 크게 높일 수 있다. 무엇보다도 존경하고 기려야 할 인물이나 사건을 일상생활 속에서 가까이 접하고 생각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장점이다.

두 번째는 기억의 장소와 기억물(조형물 등)의 예술적 수준을 높이는 일이다. 수준 높은 예술성은 강렬한 메시지와 감동으로 사람들의 기억에 남으며 다시 그곳을 찾게 할 것이다.

국립서울현충원 입구. 주변의 산세와 녹음, 오래된 스타일의 분수와 조각상등이 방문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사진: 김기호(2023)
국립서울현충원 입구. 주변의 산세와 녹음, 오래된 스타일의 분수와 조각상등이 방문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사진: 김기호(2023)

세 번째는 장소와 공간의 연출 및 디자인이다. 같은 기억물이나 장소라도 공간적 디자인이나 바닥과 벽면의 처리, 조명 등에 따라 매우 다른 효과를 만들어 낸다. 서울에서 현충원 외에 기억과 기념을 위한 장소를 조성한다면 그 역사성이나 장소성, 그리고 접근성 등을 고려할 때 광화문광장 부근이나 용산공원 부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6월 ‘호국보훈의 달’에 우리도 시가지 내에서 감동하고 사유하며 두루 헤아리고 깊이 생각하는 멋진 공간을 가질 날을 기대해본다.

저작권자 © 데일리임팩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