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찬국 논설위원, 전 충남대 무역학과 교수

허찬국 논설위원
허찬국 논설위원

미국 재무부가 돈이 떨어져 만기가 된 빚을 못 갚는 일이 벌어질 수 있었던 시한이 지난주였다. 다행히도 현 부채한도(31조 4000억 달러)는 2년간 유예하고, 향후 2개 회계년도 예산지출을 일부 제한하는 것을 골자로 바이든 대통령과 케빈 매카시 하원의장 간의 협상이 타결되었다. 좌불안석이던 국제금융시장뿐만 아니라 주요국 정부, 중앙은행들도 한시름 놓았다. 하지만 불씨가 꺼진 것이 아니어서 주안점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첫째, 민주당이 장악했던 하원이 선제적으로 부채한도를 조정했더라면 발생하지 않았을 일이었다. 작년 11월 하원의원 선거에서 공화당이 소폭 승리하며 하원의 다수당이 교체될 것이 명확해졌다. 이에 따라 작년 말 옐런 재무장관, 폴 크루그먼 교수 등 민주당 성향 경제학자들이 의회의 임기가 끝나기 전 부채한도를 올릴 것을 촉구했다. 이들은 양당 간 정치적 대립이 고조되었던 2011년 부채한도가 공화당에 의해 무기화되었던 상황의 재연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공화당이 상원의 다수당이었으나 부채한도 조정을 쟁점으로 삼을 개연성이 낮았기 때문에 하원 주도로 한도 인상이 가능했다.

둘째, 약 35년을 연방 상원의원이었던 정치인 바이든의 타협적 성향과 노련한 협상력이 돋보였다. 트럼프와 함께 부상한 MAGA(Make America Great Again) 세력으로 인해 근래 미국의 정치적 대립은 전례없이 첨예해졌다는 게 일반적 평가이다. 하원의 의장 직을 볼모로 매카시의 급소를 잡은 이 세력은 부채한도를 쟁점화하는 데 성공했다. 미국 정부의 부도가 몰고올 경제적 충격이 엄청날 수 있고, 그 책임을 공화당이 장악한 하원에 돌릴 수 있다는 계산에서 민주당 일각에서는 파국을 불사할 입장이었다. 전문가는 정부가 일방적으로 취할 수 있는 방안을 준비할 것을 주문하기도 했다.

바이든은 대결 대신 협상에 나섰다. 30년 넘게 ‘신사적’인 타협이 보통이었던 상원에서 정치인으로 성숙한 경험을 반영하는 선택이었다. 타협을 통해 실리를 도모하지만 상대의 얼굴을 세워주는 양보도 있다. 매카시 의장이 협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매카시는 트럼프 대통령 시절 그를 적극 지지했고, 의장 선거에서 MAGA 의원들에게 빚을 졌다. 하지만 부채한도 위기를 개인의 정치적 입지를 높이는 기회로 삼기보다 오히려 공인으로서 책임감을 느끼는 듯한 인상이었다. 자신들의 부채한도 인질극이 미국 정부 부도로 이어졌을 때 발생할 후폭풍에 대한 부담감도 작용한 듯하다.

셋째, 바이든 정부가 속수무책이었던 것은 아니다. 많이 언급된 것이 미국 수정헌법 14조의 발동이다. 미국의 남북전쟁 직후 노예 출신 흑인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헌법에 추가된 13~15조 수정 규정의 하나인데, 14조 내용 중 (북부) 연방정부와 (남부) 반군이 발행한 부채의 유·무효를 구체적으로 언급했다. 14조 4항은 미국 정부가 적법하게 발행한 빚의 타당성에 의문의 여지가 없고(The validity of the public debt of the United States, authorized by law, ..., shall not be questioned), 동시에 남부 반란세력이 발행한 부채는 가치가 없음을 명시했다. 이 14조를 부채한도 맥락에서 언급하는 것은 미국 정부 부채의 가치를 보장하는 것이 헌법적 책무라는 점이다.

어떻게 적용될까? 국가 부도는 국채의 원금이나 이자를 지급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만약 미국 정부가 돈이 없어 원리금 상환 의무를 수행하지 못하면 헌법이 요구하는 빚의 타당성에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이를 막는 것이 의회가 임의로 정하는 부채한도보다 상위의 책무이기 때문에 정부가 의회의 부채한도에 상관없이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부채를 추가로 발행할 수 있다는 것이 정부 안팎 법률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이번에 타협이 이루어지면서 이런 조치가 발동되지 않았으나 앞으로 부채한도의 위헌 개연성 문제가 제기될 수도 있다.

크루그먼 교수는 뉴욕타임스 칼럼에서 회자되는 부채한도를 회피하는 기술적 방안들을 소개했다. 한 가지를 소개하면 ‘1조 달러 기념주화’다. 정부가 기념주화를 발행할 수 있는 권한에 의존하여 1조 달러 주화를 발행하여 이를 중앙은행 연지준에 예치한 후 필요한 만큼 돈을 인출하여 사용하는 것이다. 실질적으로 정부가 필요한 만큼 중앙은행으로부터 돈을 가져가는 것이다. 통화량이 늘어 인플레이션이 발생할 거라는 우려는 해결이 가능하다. 중앙은행은 정부가 인출한 금액만큼 보유 중인 채권을 시장에 매각하여 통화량을 흡수하면 통화량의 순증은 발생하지 않는다. MAGA의 바이든 ‘엿 먹이기’에 비슷하게 되갚는 일종의 꼼수이다. 물론 수정헌법 14조 발동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법적 다툼이 뒤따를 것이다.

넷째, 이번 부채한도 문제의 일단락은 미국 정치에서 중도 성향이 건재함을 방증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명목상 승리를 선언한 매카시 의장은 MAGA 의원들이 강경한 요구에 물을 타 독성을 낮추었다. 바이든은 공화당이 부채한도를 빌미로 정부 지출에 태클을 걸면 협상하지 않겠다던 이전의 큰소리를 식언했다. 정부 부채를 줄이기 위해서는 지출을 줄이는 것과 더불어 세수를 늘리는 것도 병행되는 것이 보통이나 이번 협상에서 세수 증대는 아예 의제가 아니었다. 이런 사정 때문에 최종 타협안 표결에서 MAGA 공화당 의원들뿐만 아니라 진보파 민주당 의원들도 반대표를 던졌다. 하지만 타협안에 찬성한 대다수의 양당 의원들은 정쟁이 국정을 크게 뒤흔드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5월 말 부채한도 협상 막바지 시점에 연방법원에서 의미심장한 판결이 나왔다. 2021년 1월 6일 트럼프의 선거 무효 선동과 함께 의회에 난입했던 폭도 지도자 한 명에게 내란음모죄로 18년의 실형이 선고되었다. 종합하면 미국의 제도권 정치 시스템이 아직 작동하고 있으며, 이를 무시하는 초법적 행태에는 관용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불법과 비리 혐의와 원외 투쟁이 일상인 우리 정치권과 대조되는 듯해 씁쓸하다.

저작권자 © 데일리임팩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