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낙 논설위원, 가천대 명예총장, (사)현대미술관회 전 회장

이성낙 논설위원
이성낙 논설위원

국내 문화예술계에 부는 훈풍이 자못 감미롭기까지 합니다. 그런 가운데 다양한 미술품이 해외에서 ‘몰려’오고 있습니다. 특히 2021년 영국 국립초상화미술관(National Portrait Gallery)의 소장품이 우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되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랍고 새로운 하나의 이정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중 영국이 그리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re, 1564~1616)의 유일한 초상화가 그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우리나라를 찾아온 것이 많은 걸 대변해줍니다.

연이어 지난해에는 ‘합스부르크 600년, 매혹의 걸작들(Six Centuries of Beauty in the Habsburg Empire)’(2022.10.25~2023.3.15)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공개되기도 했습니다. 우리 문화예술계, 우리 미술계의 높은 위상을 엿볼 수 있는 전시였습니다.

근래 우리 조형미술계에 일고 있는 변화는 전시 기획 및 전시 방법에서도 큰 발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실로 괄목할 만한 수준 향상을 느낄 수 있습니다.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 나란히 계시다.  신라 6세기 후반~7세기 초반. 국립중앙박물관. 사진 구글 캡처.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 나란히 계시다.  신라 6세기 후반~7세기 초반. 국립중앙박물관. 사진 구글 캡처.

2021년 국립중앙박물관이 새롭게 조성한 ‘사유(思惟)의 방’은 차원을 달리한 전시 공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두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을 나란히 배치한 것 자체가 매우 새로운 시도입니다.

몇 주 전 영국과 독일에서 찾아온 미술 애호가들에게 ‘사유의 방’을 안내했더니, 공간의 품위 있는(Decent) 조명과 바닥의 낮은 경사를 지목하면서 감탄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처음 느껴보는 새로운 전시 공간이라는 극찬과 함께 말입니다.

그들은 리움미술관을 찾아 ‘조선백자, 군자지향(朝鮮白瓷, 君子志向)’ 전시도 관람했습니다. 그런데 전시된 아름다운 조선백자의 예술성을 거론하기에 앞서, 뛰어난 전시 기술에 대해 먼저 논평하는 걸 들었습니다. 전시 기술이 예술의 경지에 올랐다며, 전시장 분위기에 압도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도 했습니다.

'조선백자, 군자지향'(2023. 02. 28~05.28). 리움미술관. 사진 구글 캡처.
'조선백자, 군자지향'(2023. 02. 28~05.28). 리움미술관. 사진 구글 캡처.

여기서 필자는 전시 예술품은 주변환경과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서울에는 전 세계적으로 몇 손가락에 꼽힐 만한 야외 조각미술 전시장이 있습니다. 바로 서울 잠실 지역에 있는 올림픽조각공원입니다. 88올림픽 개최를 기념하기 위해 넓은 대지(77만 5000평방m , 23만 4848평)에 국내외 유명 거장의 작품 221점을 설치한, 명실상부한 국제적 예술 조각공원입니다. 현대인이 여유 있고 건전한 삶을 누리기에 이만한 장소도 없다 싶을 만큼 자랑스러운 공간입니다.

그래서 필자는 두세 달이 멀다 하고 올림픽조각공원을 찾아가곤 하는데, 만약 누군가가 그 많은 작품 중에서 어떤 작품을 가장 선호하느냐고 묻는다면, 이탈리아 조각가 마우로 스타치올리(Mauro Staccioli, 1937~2018)의 ‘Seoul 88 Olympics’(1987)을 꼽겠습니다. 하늘을 찌를 듯한 날카로운 대형 칼을 연상케 하기도 하고, 직선이면서도 곡선이며, 움직임과 정지 사이에 머물고 있음을 느끼게 하는 작품입니다.

그 외에도 설치된 조형물 중 가장 크다는 사실과 함께 공원 중심부의 넓은 광장 빈터에 설치되어 있어 먼 곳에서도 눈에 띄는 작품입니다. 서울을 찾아오는 미술애호가들이 반드시 방문하고 싶은 장소로 올림픽 조각공원을 거명하지만, 그 속내는 마우로 스타치올리의 작품을 보고 싶어 한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감지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마우로 스타치올리의 작품세계가 잘 알려졌다고 하겠습니다.

마우로 스타치올리(1937~2018)의 'Seoul 88 Olympics'(1987). 서울올림픽공원. 사진 구글 캡처.
마우로 스타치올리(1937~2018)의 'Seoul 88 Olympics'(1987). 서울올림픽공원. 사진 구글 캡처.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얼마 전 마우로 스타치올리를 보러 간 필자는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 거대 조형 예술품이 지저분한 쓰레기에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작품 주변은 온통 임시 창고형 가건물이었습니다. 민망하기 그지없었습니다. 돌이켜보니, 근 1년 전에도 임시 매표소가 작품과 너무 가까워 속이 상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세계적 조각예술품을 고철로 생각하지 않는 다음에야 작품 주변을 이렇게 해놓을 수가 있나. 사진 이성낙.
 세계적 조각예술품을 고철로 생각하지 않는 다음에야 작품 주변을 이렇게 해놓을 수가 있나. 사진 이성낙.

아무리 값진 예술작품이라도 주변환경과 공존하지 못하고 관리를 소홀히 하면, 하루아침에 ‘잡물(雜物)’로 전락하고 만다는 만고의 진리를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그리고 여기 대형 조형물과 전시장소의 어울림이 참으로 환상적인 사례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강원도 원주시 소재 오크밸리에 있는 뮤지엄 산(Museum SAN)입니다.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다다오(安藤忠雄, 1941~)가 설계한 작품(2013년)인데, 건축물 주변에는 또 다른 조형물인 양 잔잔히 흐르는 수면이 건물의 수려한 아름다움을 더해줍니다.

알렉산더 리버만(1912~1999), Archway(1997). 뮤지엄 산. 사진 구글 캡처.
알렉산더 리버만(1912~1999), Archway(1997). 뮤지엄 산. 사진 구글 캡처.

그런데 그 물에 가볍게 떠 있는 듯 우뚝 솟은 리버만(Alexander Lieberman, 1912~1999)의 밝은 주홍색 대형 조형물이 보는 이를 압도합니다. 박물관을 찾는 이들을 환영하듯 설치예술품과 건축물이 함께 조화롭게 뿜어내는 ‘예혼(藝魂)’이 마음을 벅차게 만듭니다.

그래서 필자는 궁금했습니다. 저 대형 조형물의 위치를 설계자 안도 다다오 씨가 직접 결정한 것인지 말입니다.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작품과 위치 선정 모두 뮤지엄 산 관계자의 또 다른 창작품이라고 했습니다. 순간, 흐뭇하고 자랑스러운 기분이 들었습니다.

한 예술품이 잡품이 될지, 그 귀한 자태를 온전히 유지할지는 전적으로 그 작품 소장자나 관리인의 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예술품도 주인을 잘 만나야 그 가치를 잃지 않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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