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정일 신구대 원예디자인과 교수

전정일 교수
전정일 교수

갑자기 더워진 날씨에 주변 나무들의 잎은 한층 더 짙은 녹색으로 변해가고 있다. 이른 봄의 황량했던 들판, 잎은 없이 꽃만 오롯이 피어 화려했던 매실나무, 목련 나무 모습이 까마득한 옛일처럼 가물가물하다.

이번 봄은 그 어느 봄보다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매년 봄꽃이 필 때의 설렘과 꽃을 보며 느끼던 행복을 올해는 여유롭게 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이 많아 바빴던 탓도 있고, 식물원장으로서 매일 식물원에 가던 때와 달리 식물을 접하는 시간이 줄어든 탓도 있겠지만, 그 어느 해보다 날씨의 변덕이 심했던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전 세계가 고통받고 있는 기후 위기와 어느 정도 관련이 있는지 나로서는 확인하기 어렵지만, 올봄의 변덕스런 날씨는 아주 큰 실망감을 안겨줬다. 가끔 가는 시골집에 몇 년 전 매실나무 두어 그루를 심어서 이른 봄날을 밝혀줄 꽃을 기다리며 지냈다. 특히 밤 달빛에 빛나는 매화는 너무 아름다워서 그 모습을 볼 꿈에 부풀어 있었다. 드디어 올해 3월 말 어느 날, 수많은 꽃봉오리가 부풀어 오른 모습에 기대에 가득한 마음으로 며칠 뒤를 기약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대략 열흘 후면 나무 가득 매화를 볼 수 있겠다는 기대를 하던 중 전국적으로 여름철 집중 호우같이 엄청난 양의 비가 쏟아졌다. 비가 지나간 4월 초 다시 시골집을 찾았을 때는, 이미 꽃은 비바람에 흔적도 없이 모두 떨어지고 없었다. 떨어진 꽃잎과 함께 나의 부푼 꿈도 모두 떨어졌다.

때아닌 봄 폭우에 모두 떨어지고 남은 한 송이 매화.
때아닌 봄 폭우에 모두 떨어지고 남은 한 송이 매화.

사실 매실나무는 해거리가 비교적 적기 때문에 내년에 다시 꽃을 한가득 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어서 실망감을 좀 삭일 수도 있다. 과일나무에서 자주 나타나는 현상인 해거리는 격년결과(隔年結果)라고도 하는데, 과일이 많이 달리는 해와 아주 적게 달리는 해가 교대로 반복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열매가 많이 달리는 해를 성년(成年), 적게 달리는 해를 휴년(休年)이라고 한다. 감이나 감귤류는 격년결과가 잘 발생하고, 복숭아, 배, 앵두, 포도 등은 발생률이 낮다. 성년에는 꽃도 많이 피고 과일도 많이 달리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많은 양분을 소비하여 다음 해의 꽃이 될 꽃눈을 만드는 데 필요한 양분이 부족하게 된다. 즉, 성년에는 다음에 필 꽃을 충분히 준비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다음 해에는 꽃이 적게 피고 과일도 잘 안 달리는 휴년이 되는 것이다. 반대로 휴년에는 꽃과 열매에 양분을 많이 소모하지 않기 때문에 꽃눈이 잘 만들어져서 그다음 해에는 성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시골집 매실나무가 내년에 한가득 매화를 피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어린나무부터 키워서 처음으로 많은 꽃을 피울 것이 확실해진 상황에서, 꽃 볼 날을 목전에 두고 모두 잃어버리며 겪은 실망감은 한동안 치유하기 어려울 것 같다. 또, 매실나무가 해거리가 적다고는 하지만, 매년 피는 꽃이 같은 꽃일 수는 없다.

우리가 삶을 사는 동안에도 이런 일을 숱하게 겪는다. 아주 공 들인 일이 자그마한 실수 하나로 모두 물거품이 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그때마다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을 위로하고 치유하고 다시 꽃피우는 노력을 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당연히 그렇게 마음을 회복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물론, 나의 시골집 매실나무처럼 환경이 도와주지 않는 때도 있다. 그러나, 마음속에 남은 상처는 잘 치유되지 않는다. 이렇게 상처를 남기지 않으려면 근본적으로는 일을 끝까지 공들여서 마침내 꽃피우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내년에도 매화는 피겠지만, 올해 잃어버린 그 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음 글은 6월 8일에>

저작권자 © 데일리임팩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