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학중 논설위원, 가정경영연구소장, 서울가정법원 조정위원

 

강학중 논설위원
강학중 논설위원

해외 입양인이 홀트아동복지회와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받아냈다. 40여 년 전, 당시 세 살이었던 원고가 미국으로 입양되었지만, 양부모의 학대로 파양되고 열두 살 때 다시 입양되었지만 4년 후 다시 파양돼 영주권도 받지 못한 채 한국으로 추방된 사건이었다.

‘입양’하면 우리는 친부모와 자식의 극적인 상봉을 떠올린다. 또는 서너 명씩, 그것도 장애가 있는 아이를 입양한 부모, 자기 자녀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이들을 입양해서 키우는 부모의 감동 어린 사연을 생각한다. 그러나 입양인의 기구한 삶이나 양부모의 헌신적인 이야기에 묻혀 친부모의 입장은 외면당해 온 게 사실이다. 친모가 아닌 친부의 존재는 아예 언급조차 되지 않는 현실이다.

오죽하면 자식을 입양 보냈을까 하는 동정심보다 성적으로 문란한 사람일 것이다, 어떻게 자기 자식을 버릴 수 있느냐, 엄마를 찾는 자식의 연락에도 거절했다니 이기적이다, 무책임하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그런 비난 속에서 숨죽이며 평생을 살아야 하는 친모들의 삶은 어땠을까 생각하면 그 또한 가슴 아프다. 각자의 사연과 상황이 다 다를 텐데, 재정적 정서적인 지원만 있었다면 입양을 선택하지 않았을 텐데, 어쩔 수 없었던, 정말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던 상황은 돌아보지도 않고 그렇게 일방적으로 비난하고 매도할 자격이 우리에게 있는 걸까라는 의문이 남는다.

계획하지도 않은 임신이 느껴졌을 때, 생리가 좀 늦어지는 거겠지, 첫 성관계로 임신까지 되지는 않았겠지, 부인하다가 시기를 놓치는 경우가 많다. 하룻밤의 쾌락을 위해서였든, 사랑의 결과였든 아니면 강압이나 폭력에 의한 임신이었든, 임신을 확인한 순간부터 고민은 깊어진다. 친부에게 알릴 것인가, 누가 친부인지조차 모를 때에는 누가 아빠인지 확인할 것인지, 부모에게는 얘기해야 하나, 말아야 하느냐는 고민으로 혼돈과 불안, 두려움에 일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해진다.

친부에게 알리거나 가족에게 알리면 누구 책임인지를 놓고 싸울 게 뻔하고 도움보다는 비난과 처벌로 의절하자고 할 게 빤한데.... 도저히 용납 못 하겠다며 다시는 보지 말자고 할 부모 몰래 입양을 선택한다. 그러나 입양을 결정하고도 친부와 친모 간의, 가족 간의 그리고 부모 자녀 사이의 싸움과 자신과의 끝없는 싸움으로 매일매일 전쟁이 계속된다. 입양이 최선이며 입양만이 살 길이라는 주위의 권유로 입양을 결심했지만 정말 이게 잘하는 짓일까 혼란스럽다. 입양 결정 후에는 정을 아예 주지 말아야 한다고 아기를 보지도, 젖을 물리지도, 안아 보지도 못하게 하는 일도 있다. 편하게 웃으면서 모유를 먹이는 다른 엄마들을 보며 화장실에서 몰래 통곡한다.

열 달 동안 신체적 정서적으로 연결이 되어 있던 아이와의 애착 관계를 끊는 고통은 겪어보지 않고서는 아무도 모른다. 임신 기간 내내, 출산 과정 중에도 고립감, 외로움, 슬픔 등으로 고통받는다. 장애아나 신체적 이상이 있는 아이를 출산했을 경우엔 죄책감과 수치심까지 더해져 더욱 괴롭다. ‘좋은 양부모를 만나서 행복하게 살 거야, 아이를 원하는 사람에게 좋은 일 하는 거야’라며 스스로를 위로하다가도 학대받는 사례나 파양 기사를 보면 내가 이 아이에게 무슨 짓을 하는 것인가 싶어 소스라치게 놀란다. ‘우리 아이는 죽은 거야. 죽은 거나 다름없어’하고 마음을 다잡다가 다시 아이를 돌려달라고 울고불고 매달린다.

그런 과정을 거치며 일상으로 돌아가지만, 결코 아이를 잊을 수는 없다. 아이를 포기하겠다고 법적인 서류에 도장을 찍었지만 내 자식에 대한 감정과 관심까지를 포기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아이의 생일 때만 되면 촛불을 켜놓고 기도를 해 보지만 무능력과 상실감 때문에 무너지는 자신을 추스르기가 어렵다. 자기도 모르는 슬픔과 우울, 혼란, 무기력, 분노 등 주체할 수 없는 감정들이 입양과 관련된 것임을 알아채고는 또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다. 그것도 상담과 치료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던 소수의 사람에게 해당하는 일이다.

하지만 아이가 초등학교에 갈 나이가 되거나 생일, 어린이날, 크리스마스 등 기념일이 다가오면 또다시 불가사의한 감정들이 되살아나 정상적인 삶이 방해받는다. 다시 아이를 찾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과 아이를 입양했다는 사실이 드러나 자신의 삶이 산산조각이 나버리는 끔찍한 상상 속에서 갈팡질팡한다. 파양된 건 아닐까, 양부모가 학대하지나 않을까, 자기 정체성의 모호함에 한없이 방황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상상으로 나날이 황폐해진다. 죄책감으로 괴로워하면서도 서로서로 원망하고 비난하면서 할퀴고 헐뜯는다. 우리 아이가 나를 찾는 건 아닐까 하는 환상 때문에 잠 못 이루는 밤이 많아진다. 친부에게 알리지 않은 경우엔 죄책감으로, 알렸는데 나타나지도 않고 나 몰라라 하면 실망과 분노, 복수심으로 괴롭다.

다른 사람과 결혼해 살면서도 부부생활이나 임신에 지장을 받는 사람, 다른 자식을 지나치게 과잉보호하고 집착하면서 건강하게 독립하려는 자녀를 수용하지 못하는 엄마도 있다. 아이들이 성장하면 직장은 제대로 구했을까, 결혼할 나이가 되면 입양 사실이 걸림돌이 되지나 않을까, 아이를 건강하게 낳았을까. 상대방 부모가 입양 사실을 알고 파혼으로 치닫는 건 아닐까.... 걱정이 꼬리를 문다.

삶을 정리하는 시기인 노년기에 접어들면 손주를 보고 싶은 마음, 다시 자식을 찾고 싶은 욕구가 강해진다. 어디서 사는지, 행복하게 사는지 아무것도 모르지만 그 신세를 받아들여야 하는 처지가 초라하다. 그런데 사는 형편이 어렵고 병들거나 죽음을 눈앞에 두면 더욱더 비참해진다. 자신의 감정을 편하게 표현할 기회도 없이 사회적 지지가 결핍된 환경에서 지속적인 상실감으로 평생을 고통 속에 살아온 것이다.

어떤 이는 자식을 버린 비인간적인 부모를 지나치게 미화하지 말라고, 그러고도 잘사는 인간들도 많다고, 비극적인 사례를 지나치게 과장하는 거 아니냐고 흥분할지 모른다. 하지만 대중매체나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그들의 삶을 막연하게 추측할 수밖에 없는 우리가 얼마나 알겠는가. 친부모, 양부모, 입양인 그리고 입양을 구성하고 있는 복잡한 조각들과 그들이 평생 서로 주고받는 상호작용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그들을 이해한다고 말할 수 없다. 한 인간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5월 11일은 입양의 날이다. 18회를 맞는 2024년 5월 11일에는 좀 더 나은 환경과 따뜻한 눈길, 친절한 손길을 기대할 수 있을는지.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아무도 챙기지 않고 방임해버리면 친부모뿐만 아니라 양부모, 입양인들, 그리고 우리의 삶도 결코 행복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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