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하슬아 논설위원, 작가·컨텐츠 기획자

송하슬아 논설위원
송하슬아 논설위원

현관문을 열자마자 엄마가 끓인 미역국 냄새를 바로 알아차렸다. “누가 생일이야? 웬 미역국?!”이라는 말을 뱉고서 아차 싶었다. 5월 내 생일을 하루 앞둔 걸 깜빡했기 때문이다. 엄마와 나란히 식탁에 앉아 저녁 식사를 하면서, 입안에서 보드랍게 씹히는 따뜻한 미역의 식감은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가장 고생한 우리 엄마가 그날 미역국의 주인공이 되어야 마땅한데, 오히려 엄마께 대접받자 멋쩍었다. 자정에는 부모님께 감사 인사를 하면서도 사랑한다고 하기엔 영 쑥스러웠다.

엄마는 내가 태어날 때 엉덩이부터 나왔다고 했다. 태아는 보통 산모의 뱃속에서 머리가 아래쪽을 향해 있지만, 나는 세상 밖으로 나오기 전까지 거꾸로 된 자세였다. 나 같은 둔위(臀位) 태아는 전체의 4% 정도 되는데, 출산할 때 산모와 태아 둘 다 위험해 제왕절개 수술을 한다고 한다. 응급실에서 산통을 겪는 엄마 배 위로 차가운 소독약을 바를 때, 그때 내 엉덩이가 보였다고 했다. 의사가 자연분만은 기적과 같다고 했다. 만약 팔꿈치가 걸렸더라면, 만약 내가 1초만 늦게 나왔더라면 지금의 내가 숨 쉬고 있을지는 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내가 부모님을 고생시키며 어렵게 세상에 나왔다는 출생 비화를 알고 난 뒤부터, 심리적 방황은 끝이 났다. 값진 생명이 주어진 만큼 후회 없이 잘 살아야겠다는 책임감이 강해졌고, 머리가 아닌 엉덩이부터 내밀고 태어난 까닭에, 나는 엉덩이(‘본능’의 비유적 표현) 중심적으로 살고 있다.

나는 엉덩이 근육이 매우 발달했다. 그래서인지 남들에 비해 행동력이 꽤 좋은 편이다. 무언가를 새로 시작할 때 추진력이 좋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엉덩이(실행)부터 움직이며 직접 부딪혀보고 발품을 팔아 얻는 배움을 중요한 자산으로 여긴다. 산업과 분야를 넘나들며 작가, 기획자, 매니저, 연구원 등 거쳐온 직업의 개수가 이를 증명한다. 모든 경험은 인생의 밑거름이 되니까 나만의 땅이 비옥해지기를, 건강한 줄기가 뿌리내리기를 바란다.

나는 엉덩이(‘본능’의 비유적 표현)가 이끄는 대로 살고 싶다.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나답게 사는 것 말이다. 때때로 부모님이 바라는 대로 따랐을 때 곧바로 나에게 맞는 선택이 아님을 자각하고 다시 되돌아가는 걸 보면, 나는 정말 엉덩이로 사는 사람이 맞는 것 같다.

각자의 인생 시간대가 있다고 믿는다. 그 ‘때’는 부모님이 바라는 시기와 다를 수 있다. 인생은 장기전인데 인생의 후반전 60대부터는 인생이 잘 풀릴 거고 늦게 결혼해야 행복할 팔자라는 사주 전문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적 있다. 나는 나중에 잘될 사람, 즉 ‘대기만성형’이다. 서둘러봤자 일을 그르칠 뿐이니 조급해하지 않으며, 현재에 집중해서 감사와 행복을 찾는 것이 내가 지녀야 할 태도이다.

부모님은 남들만큼 늦지 않은 ‘그때’에 인생 과업을 이어가야 비로소 당신들이 행복해질 수 있다고 불같이 화를 내신다. 이렇게 에둘러 표현한 갈등은 바로 결혼을 원하는 시기에 차이가 있어서다. 자녀의 결혼 나이가 늦어질수록 부모님이 홀가분해지는 시간은 그만큼 뒤로 미뤄지는 게 안타깝지만 현실이다.

지금 나는 만혼이라는 범주에 속한 나이인데 아직은 출산과 육아가 내 일처럼 와닿지는 않는다. 나는 예전부터 애가 애를 낳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정말 강했다. 한창 나가 놀고 싶은 시기에 일찍 결혼하고 엄마로 사는 것은 나와 맞지 않다고 여겼고, 진지하게 만나던 남자친구와 원하는 결혼 시기가 늘 달랐다. 어린 나이에 결혼을 했다면, 불안한 마음을 가진 엄마가 되어서 부모님께 사사건건 기대 살 게 뻔하기 때문에 그런 삶이 현실로 벌어지지 않은 게 다행인 것 같다.

현재도 내가 더욱 어른스럽고 단단해지는 데 더 집중하고 있다. 꼭 결혼이 아니어도 내가 선택한 것들로 인해 행복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드리는 것이 효도라고 생각한다. 내 주변에도 결혼 생활을 시작한 친구들이 늘고 있어 또래에 비해 결혼-출산-육아의 과정이 전체적으로 늦춰지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주체적으로 원하는 삶을 결정하며 사는 것이 내게는 더 중요하다.

부모 세대에는 '당연히 결혼은 해야 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강했지만, 연령별 혼인율(해당 연령 인구 1천 명당 혼인 건수)은 30대 초반 40.8건, 20대 후반 38.2건, 30대 후반 13.8건 순으로, 만혼이 상승 추세다(통계청, 2021년 혼인·이혼 통계). 혼인 건수는 11년째 감소하며 역대 최소 건수를 찍었다.

또, 이혼 건수는 40대 초반이 7.6건으로 가장 높고, 30대 후반이 그 뒤를 이었다. 혼인 지속 기간별로 4년 이하가 1만 7천 건(비중 18.6%)으로 가장 많은데, 3040 나이대에는 확실히 결혼과 이혼의 부침이 심한 것으로 보이는 통계가 눈에 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전과 다르게 돌싱(결혼을 했다가 다시 돌아왔다는 ‘돌아온 싱글’의 준말) 임을 당당하게 밝히고 연예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한 일반인들이 적극적으로 매력을 어필하고, 이를 공감해 주는 팬들도 양껏 얻어 가는 걸 종종 접한다. 반드시 결혼 생활이 아니어도 선택에 따라 인생 방식을 다양하게 펼치는 유명인들 또한 세대 간의 문화와 이해를 돕는 정보인 것 같다. 평균 범주에 속한 사람들의 무리에서 벗어났다고 해서 실패했거나 비정상이 아니며, 다양한 선택권과 각자의 인생 시간대에 대하여 세대 간에 존중이 있었으면 한다.

부모님께서 결혼을 종용하시는 항의는 결혼식 전날까지 끝나지 않을 것 같지만, 나는 그럴 때일수록 감사하는 마음을 잃지 않으며 꼿꼿하고 뻔뻔하게 엉덩이 중심적으로 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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