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숭호 논설위원, 언론인· 전 한국일보 심의실장

“난 여자니까, 여자 화장실을 쓸 거야!” “난 남자니까, 남자 화장실을 쓸 거야!”

당연한 말이겠지요? 앞의 말을 한 사람이 여자이고, 뒤의 말을 한 사람이 남자라면 말입니다. 만일에, 남자가 앞의 말을 하면서 여자 화장실에, 여자가 뒤의 말을 하면서 남자 화장실에 들어온다면 어떨까요? 여자 화장실에 있는 여자들은 소스라치게 깜짝 놀라고, 남자 화장실의 남자들은 놀라기도 하겠지만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그 여자를 힐끔힐끔 쳐다보겠지요? 여자 화장실에 들어온 남자가, 남자 화장실에 들어온 여자가 아무리 ‘자기가 주장하는 성(性)’처럼 보이는 머리모양과 옷차림, 화장을 한다고 해도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행동-스스로 여자(남자)라고 생각하는 남자(여자)가 여자(남자) 화장실을 쓰는 행동-이 다른 나라에서는 허용되나 봅니다. 특히 미국이 그런 모양인데요, 엊그제 읽은 책에 이런 내용이 있습디다.

“2016년, 노스캐롤라이나주는 트랜스젠더들이 자신의 선택에 따라 원하는 화장실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한 샬롯(Charlotte)시 조례안에 반대하여, 주 내에서 생물학적 남성과 여성이 각자 다른 화장실을 사용하도록 하는 법안(화장실법, Bathroom Bill)을 통과시켰다.”

‘트랜스젠더’는, ‘두산백과’에 따르면, “출생 시 지정된 성과 스스로 정체화한 성별 정체성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두산백과’의 뜻풀이를 한 번 더 풀이하면 아마 이런 것일 겁니다. “남자(여자)로 태어났지만, 여자(남자)라고 느끼는 사람.” 그 뒤에는 “이들 중 수술 등 의학적 조치를 통해 성을 완전히 전환한 사람도 있지만 그런 수술을 안 했다고 해서 트랜스젠더가 아닌 것은 아니다”라는 설명이 있습니다.

남녀 모두 사용할 수 있다는 화장실 표시. 노스캐롤라이나주의 화장실에도 이 표시가 붙어 있음은 물론이다. (위키미디어) 
남녀 모두 사용할 수 있다는 화장실 표시. 노스캐롤라이나주의 화장실에도 이 표시가 붙어 있음은 물론이다. (위키미디어) 

노스캐롤라이나주의 ‘화장실법’은 집행되지 못했습니다. 극심한 반대 때문인데요, 특히 트랜스젠더에 대한 차별이라는 일부 소비자들의 불매운동 등 내외부에서 압력을 받은 미국 대기업들이 노스캐롤라이나에 투자를 하지 않겠다고 발표한 게 집행 중단의 큰 이유라고 합니다. 화장실법을 강행할 경우 노스캐롤라이나주에 닥칠 경제적 손실이 32억 달러쯤으로 추산됐다는 겁니다.

‘화장실법에 반대하다니, 이상한 사람들이군’이라고 생각한 분들은 ‘두산백과’의 트랜스젠더 뜻풀이에 “출생 시 지정된 성”이라는 문구도 이상할 겁니다. ‘출생 시 지정된 성이라니, 남자인지 여자인지는 태어나면서 결정되는 거지, 누가 지정하는 게 아니잖아?’라고 생각하실 거라는 말입니다.

노스캐롤라이나주의 화장실법에 관해 알려준 책에는 “성은 어머니의 뱃속에서 정해져 태어나는 게 아니라 태어난 후에 지정된 것”이라는 주장이 출현한 배경과 관련해서도 몇 줄 언급이 있습니다.

“미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의학 저널이라 할 수 있는 ‘뉴잉글랜드 의학저널’은 2020년 12월 간행물에서 출생증명에서 성별을 표기한 부분이 어떠한 임상적 효용도 제공해 주지 못하기 때문에 아예 그 부분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다. 과학계 구성원 중 상당수는 자신이 선호하는 성별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식으로 설명한다면 “호적에 남자라고 돼 있다고 해서 남자처럼 살아야만 한다는 것은 아니다”쯤 될 겁니다.)

“2018년 미국의사협회는 출산 또는 출산 전 결정되는 불변하는 생물학적 특징들에 기반해 성별을 정의하려는 그 어떠한 접근법도 배격한다며 성별은 태어날 때 결정되는 게 아니라 의사들이 신생아에게 임시적으로 배정하는 것일 뿐이라는 우스꽝스러운 주장을 내놨다.”

이 글을 쓰고 있는데, 우스꽝스럽게도, 해외여행이 쉬워지기 시작했을 때 유행한 유머 하나가 생각났습니다. “난생처음으로 국제선을 타러 간 분이 ‘출입국신고서’를 쓰다가 ‘성별(SEX)’을 써넣는 칸에 ‘가끔’이라고 썼다”라는 이야기 말입니다.

그런데, 요즘 대한민국 출입국신고서 양식에는 ‘성별(SEX)’이 없네요. 성별을 기입토록 한 칸이 있기는 한데 예전처럼 ‘남’ 혹은 ‘여’라고 직접 써넣도록 하지 않고 ‘MALE/FEMALE’에 표시만 하도록 돼 있더라고요. 남자면 ‘MALE’에, 여자면 ‘FEMALE’에 동그라미나 체크만 하면 되게끔요.

한국 출입국신고서에서 ‘SEX’가 사라진 게 ‘가끔’이라고 쓰는 분들이 더 나오는 걸 막기 위한 당국의 깊은 배려 때문이었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MALE/FEMALE’을 표시하는 칸도 곧 사라질 수 있겠다는 짐작도 하게 됩니다. 자기가 원하는 화장실을 사용하겠다는, 스스로 여성(남성)이라고 주장하는 남성(여성)이 신고서 양식에 들어 있는 성별 구분 따위에 구애받을 것 같지 않아서입니다. 실제로, 출입국신고서에서 성별 구분 칸을 아예 없애 버린 나라도 많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각양각색인 세계 여러 나라의 남녀 화장실 표시. 예술적인 것도 많지만 외설적인 것도 많다.   
  각양각색인 세계 여러 나라의 남녀 화장실 표시. 예술적인 것도 많지만 외설적인 것도 많다.   

앞에서 말한, 내가 읽은 책은 ‘권위주의적 순간’입니다. 미국 보수주의자인 벤 샤피로가 쓴 건데, 부제가 ‘미국 좌파들은 어떻게 시스템을 완전히 장악해 버렸을까’인 이 책의 내용은 매우 다채로워 다 옮기지는 못하지만 ‘화장실법’에 얽힌 이야기가 제일 충격적이라 이런 걸 모르시는 분들과 제 느낌을 공유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빼놓은 게 하나 있군요. ‘선호하는 대명사(Preferred Pronoun)’입니다. “내 겉모습만 보고 나를 그(He)나 그녀(She)로 부르지 마라. 내가 원하는 대명사로 나를 지칭해달라”라는 게 ‘선호하는 대명사’라고 합니다. 저자는 이와 관련해, “교수님이 선호하는 대명사를 사용하지 않으면 학점을 주지 않을 것 같아요”라며 걱정하는 한 여학생의 하소연도 소개하고 있습니다.

빼놓은 게 또 있습니다. “의견을 나눌 때 ‘내 생각에는(in my opinion)’이라고 말하는 대신 ‘나의 진실은 말이야(in my truth)’라고 말을 시작하는 사람이 많아졌다”라는 겁니다. 샤피로는 “오늘날 미국 사회에서는 객관적인 과학적 진실보다 각자가 생각하는 진실(your truth)이 더 중요하다고 부추기는 사람이 많다”라며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세상 참 복잡해졌습니다. 모르면 넘어갈 일을 알고 나니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도 들고, 각자의 진실로 싸움을 벌여야 하는 세상이라면 무엇을 나의 진실로 삼아야 하나를 두고도 깊이 생각해 둬야만 하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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