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낙 논설위원, 가천대 명예총장

이성낙 논설위원
이성낙 논설위원

1960년대 초 필자가 독일 중부 지역 소재 마르부르크(Marburg)대학에서 의예과 과정을 마치고, 임상 과정을 밟기 위해 독일 남부에 있는 뮌헨(München)대 의대로 전학하려 했을 때의 에피소드입니다.

독일은 모든 대학교가 국립이라 다른 지역 대학으로의 전학이 비교적 자유롭습니다. 따라서 필자는 대학교의 규모도 크고 도시 자체의 국제적·문화적 위상을 감안해 뮌헨대 의대에 전학 신청서를 냈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자리가 없어 필자의 전학원을 받아줄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필자는 뮌헨대학교 학생처에 청원서(Bittbrief)를 보냈습니다. 청원서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저는 유학생으로서 우선 독일 생활에 가능한 한 빠르게 적응하려고 작은 도시에 있는 마르부르크대학교를 선택했습니다. 저의 소도시 생활과 학업은 만족스러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저는 독일과 유럽, 더 나아가 세계 문화가 교차하는 뮌헨에서 의학 전공은 물론 뮌헨이 품고 있는 문화예술을 만나고 싶어 귀 대학에 전학을 신청했던 것입니다. 넓은 이해로 저의 청원을 재검토해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며칠 후, 뮌헨대학교에서 속달편(Eilbote)으로 “전학을 허용한다”는 내용의 답신을 보내왔습니다. 크게 기대하지 않았기에 기쁨은 더욱더 컸습니다.

그런데 뮌헨에 거주한 6년 동안 바이에른(Bayern)주 정부에서는 뮌헨국립극장에서 열리는 음악회를 비롯해 다양한 문화 행사 초청장을 보내주곤 했습니다. 한낱 유학생 신분이었던 만큼 특별한 혜택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많은 세월이 흐른 뒤에야 필자는 그때의 감사한 마음을 알릴 기회가 있었습니다. 1987년 주빈 메타(Zubin Metha, 1936~)가 이끄는 뮌헨필하모니오케스트라(Münchner Philh.)가 서울에 공연차 왔을 때 일입니다. 교향악단을 수행한 뮌헨시 문화담당관 뮐러 박사(Dr. Müller)를 만난 자리에서, 뮌헨에서 지낼 때 바이에른주 정부가 베푼 ‘문화 배려’를 언급하며 고마운 마음을 표하자, 그는 자못 놀라워하면서 “그렇게 똑똑한 공무원이 있다는 게 신기하다”며 행복해하는 마음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이번엔 책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언젠가 제자들과 담소하던 중 필자가 젊은 제자들 사이에서 멀리해야 하는 ‘기피 인물’이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필자는 순간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렇게도 아끼는 제자들이 필자를 멀리하고픈 인물로 보았다니 섭섭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당혹스럽기까지 했습니다. 필자가 곤혹스러워하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던지, 한 제자가 얼른 그 이유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필자는 전문의 수련 과정에 있는 레지던트들에게 걸핏하면 “근래 무슨 책을 읽었나?”라는 질문을 자주 했다고 합니다. 질문을 받은 첫 레지던트가 “네, 교수님. 윌킨슨(Wilkinson)의 《피부과학(Text of Dermatology)》을 읽고 있습니다”라는 식으로 자신 있게 대답하였는데, 필자는 “의학 전문 도서는 평생 읽어야 하는 거고, 내가 말하는 건 근래 무슨 재미있는 소설책이나 좋은 시집을 읽었는지 묻는 걸세”라고 핀잔 아닌 핀잔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 얘길 듣고 보니 제자들이 필자를 ‘기피 인물’로 여긴 게 당연하다 싶었습니다.

레지던트는 너나없이 “실컷 잠자는 게 가장 큰 소망이다”라고 할 정도로 시간에 쫓기기 마련입니다. 그런 사정을 훤히 알고 있는 필자가 한가롭게 그런 질문을 했으니 조금은 야속하게 느껴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도 필자에게는 시간이 없어 인문학 관련 책을 읽을 수 없다는 제자들의 변명이 왠지 어설프게만 다가왔었나 봅니다. 그래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줄기차게’ 의도적으로 그런 질문을 던졌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독서와 관련해 필자에게는 잊지 못할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마르부르크대학 의예과를 다니며 받아온 장학금 혜택을 뮌헨대학에서는 받을 수 없다는 사실에 필자는 아연실색했습니다. 이유인즉 필자에게 장학금을 준 마르부르크대학은 헤센(Hessen)주에 속해 있고, 뮌헨대학은 바이에른주에 속해 있어 어쩔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동안 필자가 받은 장학금은 주 정부 장학금이었던 것입니다. 당혹해하는 필자에게 담당자는 장학금 신청 절차를 다시 밟아보라고 조언해 주었습니다.

몇 주 후, 언제 어디서 장학금 관련 인터뷰가 있으니 참석하라는 대학 사무국의 통보를 받았습니다. 공고된 장소로 찾아가니 이미 많은 외국 학생이 여기저기서 초조해하는 모습으로 서성거리고 있었습니다. 필자도 다를 바 없었습니다. 차례가 되어 회의실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소강의실 한가운데 있는 기다란 책상에 조교수급 심사위원 4명과 정교수급 시니어 교수가 나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중앙에 자리한 시니어 교수가 가벼운 인사말과 함께 의자에 앉으라고 권했습니다. 모든 심사위원이 준비된 서류를 훑어보고 있는 가운데, 필자에게 자리를 권한 시니어 교수가 운을 띄웠습니다. “지난 긴 여름방학을 어떻게 보냈습니까?”

필자는 잠시 생각을 정리한 다음 대답했습니다. “아시겠지만 저는 지난 5월 마르부르크대학 의과대학 의예과에서 피시쿰(Physikum, 종합 평가시험)을 치렀습니다. 피시쿰을 비롯해 의대 3년 동안 각종 시험에 매달리다 보니 인문학 서적을 거의 읽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시험을 마치고 지난 5개월 동안 인문학책만을 읽었습니다.”

그랬더니 교수가 조금 의외라는 표정으로 “읽은 책 제목을 댈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필자는 프랑스 작가 로맹 롤랑(Romain Rolland, 1866~1944)의 1915년 노벨문학상 수상작 《요한 크리스토프(Johann Christof(獨)/Jean Christophe(佛)》를 읽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배석한 심사위원의 시선이 모두 필자에게 쏠렸습니다.

시니어 교수가 다시 물었습니다. “그럼 읽은 책의 내용을 간략하게 말해줄 수 있겠습니까?” 필자는 독일의 악성(樂聖)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의 일대기를 엮은 그 책의 내용과 20세기 초 독일과 프랑스가 제1차 세계대전의 전운(戰雲)에 휩싸이던 무렵의 배경을 간략하게 설명하고 이렇게 마무리했습니다. “지금도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큰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자 심사위원장인 시니어 교수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긴 책상의 모서리를 돌아 필자에게 뚜벅뚜벅 걸어오는 것이었습니다. 교수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필자도 어리둥절해서 반사적으로 의자에서 일어났습니다. 교수는 예를 갖추며 필자의 손을 잡고 선언하듯 말했습니다. “이성낙 씨는 뮌헨대 의대를 졸업할 때까지(4년) 전액 장학금을 받을 것입니다.”

필자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전액 장학금을 받게 된 것 자체도 가슴 벅찬 일이지만 ‘독서 이야기’로 그런 혜택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한동안 어리둥절했습니다.

로맹 롤랑의 '요한 크리스토프'. 1951년 동독에서 출판. 당시 사전(辭典)용으로 많이 사용하던 얇은 인디언 지(Indian 紙)로 1970쪽이나 되는 대하소설이었다. 구입 1962년, Marburg에서.
로맹 롤랑의 '요한 크리스토프'. 1951년 동독에서 출판. 당시 사전(辭典)용으로 많이 사용하던 얇은 인디언 지(Indian 紙)로 1970쪽이나 되는 대하소설이었다. 구입 1962년, Marburg에서.

심사위원들은 독일로 유학 온 지 3년밖에 안 된 외국인이 《요한 크리스토프》 같은 대작을 읽었다는 사실에 놀랐나 봅니다. 아마 국내 대학교에서 공부하는 외국인 유학생이 박경리(朴景利, 1926~2008) 선생의 대하소설 《토지(土地)》를 읽은 것쯤으로 여긴 듯싶습니다.

차분히 지난 반세기를 돌아보면, 필자가 큰 어려움 없이 독일 생활을 할 수 있었던 데에는 ‘독서의 힘’이 큰 작용을 했던 것 같습니다. 책 한 권의 무게가 얼마나 값진 것인지를 다시 한번 가슴 깊이 되새겨보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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