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우현 논설위원, 한불협회 회장, 전 주 프랑스 공사 겸 문화원장, 전 숙명여대 객원교수

손우현 논설위원
손우현 논설위원

지난주 네덜란드를 국빈 방문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유럽은 다른 강대국에 의존하지 않는 독자적 길을 걸어야 한다”며 “동맹이 속국(vassal)은 아니다”라고 말해 논란이 빚어졌다. 앞서 그는 중국 방문(4.5~7일)에 동행한 기자들에게는 “대만 문제에 유럽이 휘말려선 안 된다”, “미국에 종속되어서는 안 된다”는 발언을 해 “EU 분열 야기”라는 비판을 받았다.

마테우시 모라비에츠키 폴란드 대통령은 미국 방문길에 오르면서 “일부 서방 지도자들은 러시아, 극동의 일부 세력과 협력하는 꿈을 꾼다”고 말했다. 트럼프 전 미 대통령은 폭스뉴스에 출연해 "내 친구 마크롱은 그(시진핑)의 엉덩이에 키스하는 것으로 중국 방문을 끝냈다"고 원색적으로 비판했다.

한편 월스트리트 저널은 사설에서 “마크롱은 자신을 21세기의 (미국과 거리를 두려고 했던) 드골로 생각하고 있다”고 논평했다. 그러나 미국의 정치 전문지 폴리티코는 “마크롱의 (대만 불개입) 발언은 프랑스 주도의 유럽이 제3의 초강대국(‘a third superpower’)이 되기 위해서는 ‘전략적 자율성’(‘strategic autonomy’)을 가져야 한다는 그의 지론을 재천명한 것”이라고 풀이했다. 재임 7년차를 맞는 마크롱은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퇴임 이후 45세의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EU의 선임(senior) 지도자다. 그와 함께 방중한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 위원장은 “대만 문제 현상 변경을 위한 무력 사용은 용납할 수 없다”고 말해 마크롱 발언과는 차이를 보였다.

마크롱의 중국 국빈 방문은 중앙아메리카를 순방한 차이잉원(蔡英文) 대만 총통이 지난 5일 귀국 길에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케빈 매카시 미국 하원의장을 만난 후 이루어졌다. 중국은 마크롱이 떠나자마자 8일부터 사흘간 전투기 42대와 군함 8척을 동원하는 '대만포위' 훈련을 실시했다.

방중 기간 중 마크롱 대통령은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과 두 번이나 만나며 환대를 받았다. 중국은 에어버스 항공기 160대와 프랑스 컨테이너선 16척을 구입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이에 화답하듯 마크롱 대통령은 6일 “특정 국가를 국제 공급망에서 단절시키면 안 된다”, “중국으로부터 우리(서방)를 분리해선 안 된다”와 같은 시 주석이 듣기 좋은 발언을 내놨다.

마크롱의 이와 같은 발언은 단지 경제적인 이익 때문일까? 물론 외교관계에서 경제적인 이익은 주요 고려 사항이긴 하다. 그러나 마크롱의 이런 입장이 경제적 고려 때문만은 아니라는 분석이 더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일부 언론은 마크롱이 연금법 강행 처리가 야기한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이런 국면 전환용 발언을 쏟아내고 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르 몽드지는 마크롱이 설파하는 ‘전략적 자율성’은 그의 ‘유럽 DNA’에서 나온 것이라고 분석했다.

프랑스는 냉전 시절인 1949년 소련의 위협으로부터 서방을 보호하기 위해 창설된 집단 방위체제 나토(NATO, 북대서양조약기구)의 창립 멤버였다. 하지만 ‘프랑스의 영광’ 재현을 내세운 드골 대통령은 1966년 나토의 통합사령부로부터 탈퇴를 선언했다. 이로 인해 프랑스 주둔 미군은 철수해야 했고, 당시 파리에 있던 나토 본부도 브뤼셀로 옮겨야 했다. 드골의 나토 군사기구 탈퇴 이유는 “프랑스가 미국의 군사적 영향력에서 벗어나 자주성을 강화하고자 한다”는 것이었다. 1960년 핵폭발 실험에 성공한 프랑스는 독자적 핵무기를 보유한 유일한 EU 회원국이다.

다만 프랑스는 나토 군사기구 탈퇴 후에도 북대서양조약의 일원으로는 남아 정치 분야의 활동은 계속했다. 2003년 자크 시라크 대통령은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반대해 프랑스와 미국 관계가 급속도로 냉각됐다. 그러나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은 2009년 43년 만에 프랑스의 나토 통합군 복귀를 공식 선언했다.

그럼에도 드골의 독자적 국방·외교 노선은 좌우를 막론하고 프랑스 역대 정권의 공통 이념으로 내려오고 있다. 여담이지만 마크롱의 집무실 책상 위에는 드골 대통령 초상화 액자가 놓여 있다. 이는 드골의 적자임을 자임한 시라크 전 대통령이 2017년 그의 대통령 당선을 축하하기 위해 선물한 것이다.

드골은 1964년 미국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방 국가로서는 최초로 중공을 정식 국가로 승인했다. 미국은 당시 마오쩌둥(毛澤東)의 중국을 ‘중공’이라 부르며 경원시하는 대신 장제스(蔣介石)의 자유중국(대만)을 진정한 중국으로 인정했다. 프랑스가 중공과 수교한 건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 반공전선에 균열을 일으킨 일대 사건이었다. 그러나 미국도 1972년 닉슨 대통령이 중국을 공식 방문하며 미중관계의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유럽 주권’을 둘러싼 이견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와 미국은 절체절명의 역사의 고비에서 서로를 구출한 오랜 우방이자 동맹이다. 프랑스는 미국 독립전쟁에 참전해 식민지군을 지원, 요크타운 전투에서 영국군의 항복을 받아내고 독립전쟁의 승리를 이끌어 내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프랑스가 ‘미국의 가장 오랜 동맹국’(‘America’s oldest ally’)이라고 불리는 이유다. 또 몽테스키외 등 계몽주의 시대의 프랑스 사상가들은 미국의 건국 이념과 정치 제도의 초석을 놓았다. 한편 아메리카 혁명에 의해 자극 받아서 근본적인 구체제의 재편성을 위한 혁명이 1789년 프랑스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프랑스와 미국 간의 혈맹관계는 현대사에서도 재현되는데, 미국은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통해 나치 독일에 결정타를 안김으로써 프랑스의 구출에 앞장 선다.

자유민주주의를 공유하는 양국 간의 오랜 역사적 유대와 정신적 공통 유산에 비추어 볼 때 간헐적인 ‘주권’ 논쟁은 ‘찻잔 속의 태풍’이 아닐까?

저작권자 © 데일리임팩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