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정일 신구대 원예디자인과 교수

전정일 교수
전정일 교수

봄이 본격적으로 깊어지는 4월이 오면 식물이나 식물을 돌보는 사람 모두 다 분주해진다. 많은 식물에는 후손을 만들기 위한 첫 과정인 꽃을 피우는 시기이고, 대부분의 농부에게는 한 해 농사를 짓는 시작으로 씨앗을 심는 시기이다. 틈틈이 공부 삼아 식물을 기르는 내게도 여러모로 더 분주한 시기이다.

며칠 전 주말을 맞아 마음먹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화분과 육묘 상자를 정리하려고 둘러보던 때였다. 지난해 봄에 씨를 심었지만 결국 아무것도 나오지 않은 채 1년이 지난 육묘 상자를 막 비워버리려던 참에, 육묘 상자 한편에 예쁘게 줄지어 빨간 머리를 내민 새싹들을 발견했다. 작년 봄 파종했던 작약이다. 얼마나 반갑고 기쁜지 이 아이들을 본 순간 일상의 근심과 걱정은 머릿속에서 모두 사라졌다.

이름표에 기록된 날짜를 보니 지난해 봄 3월 25일이다. 1년 전에 파종했던 작약 씨앗이 그 봄에 새싹을 내지 않고 한 해를 더 기다렸다가 올해 발아한 것이다. 사실 작약이 이렇게 한 해를 더 지나고 발아하게 된 것은 순전히 나의 잘못이다.

두 봄 만에 예쁘게 싹을 틔운 작약. 지난해 3월 25일 파종했다.
두 봄 만에 예쁘게 싹을 틔운 작약. 지난해 3월 25일 파종했다.
 작약의 새싹이 자라나 꽃을 피우면 이런 모습이 된다. 
 작약의 새싹이 자라나 꽃을 피우면 이런 모습이 된다. 

작약은 늦여름에 종자를 따서 바로 그 가을에 심으면 추운 겨울을 지나 이듬해 봄에 바로 싹을 틔우는 식물이다. 그러니까 2년 전 가을에 종자를 수집했을 때 그때 바로 파종했어야 했다. 게으른 탓에 때를 놓치고 늦게 지난해 봄이 돼서야 겨우 파종한 잘못을 범했던 것이다. 겨울 동안 냉장 처리를 했기 때문에 봄에 파종했어도 발아할 것이라고 막연히 기대하면서 게으름을 변명했던 터였다. 그런데, 1년 내내 아무런 소식이 없다가 다시 겨울을 지내고 올봄에서야 반가운 새싹을 내민 것이다. 결국 작약은 약식으로 냉장고에서 추운 시기를 보내는 것으로는 부족했고, 너무나 정직하게도 제대로 추운 겨울을 보내고서야 싹을 틔우는 과정을 거친 것이다.

이 작약 씨앗이 두 봄 만에 새싹을 내게 된 것은 나의 게으름 탓이지만, 식물 중에는 실제로 2년, 3년 또는 여러 해가 지나야 발아하는 예도 많다. 작약과 비슷한 모란의 경우가 한 예이다. 연구에 따르면 5℃에 30일 정도 두었을 때 어린뿌리만 나오고 지상부로 싹은 나오지 않는다. 이 상태에서 20℃로 온도를 올려 뿌리를 충분히 자라게 한 다음에 다시 5℃에 30~50일 정도 두면 지상부가 자란다.

이러한 현상을 과학적으로는 ‘이중휴면’이라고 한다. 자연에서 이렇게 한 달씩 두 번의 저온을 거친다는 것은 겨울을 두 번 보내야 한다는 의미이다. 즉, 종자가 흙에 묻히고 나서 발아할 때까지 2년이 걸리는 것이다. 겉으로 보면 지상부로 싹이 올라오지 않으니 아무 일도 안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안 보이는 땅속에서는 부지런히 일을 하는 것이다. 더구나 광합성도 할 수 없으니 오직 씨앗에 들어 있는 양분으로만 두 겨울을 견뎌야 하는 어려움도 있다.

신구대학교식물원에서 보존하고 있는 ‘백부자’라고 하는 멸종위기 식물도 거의 비슷한 발아 과정을 보인다. 파종한 첫해에는 땅 위로 아무것도 올라올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답답한 마음에 파보면 씨앗은 한쪽 끝이 살짝 부풀어 오른 모습이다. 이 상태로 1년을 보내고 다음 해 봄이 돼서야 비로소 뿌리도 돋고 새싹도 내보낸다. 마치 정지한 상태로 1년을 보내는 것 같은 상황이다.

작약, 모란, 백부자 등등, 모두 겉으로 볼 때는 아무 일도 안 하고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면적으로는 많은 일을 하고 있다. 그중 하나가 발아 억제물질을 제거하는 일이다. 식물 종자 내부에는 여러 가지 이유로 발아를 억제하는 물질이 축적되어 있는데, 활동이 정지된 것처럼 보이는 기간에 식물 종자는 이를 분해해서 발아할 수 있도록 준비한다.

사람 중에도 이렇게 한동안 아무 일도 안 하고 시간만 보내는 것처럼 여겨지는 사람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렇지만 그들도 변화를 위해, 발전을 위해 내면적으로 무엇인가 노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남들에 비해 늦은 나이에 얻은 딸아이가 자신이 원한 대학에 합격하지 못해서 소위 ‘재수’를 시작했다. 혹시나 나의 실수로 늦게 파종했던 작약 씨앗처럼 부모의 잘못은 없었나 마음이 불안하다. 그래도, 작약 씨앗이 1년 늦었지만 결국 예쁜 싹을 틔웠듯, 딸아이도 내년에는 싹을 틔울 수 있길 기대해본다. 내년에도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할 수 있겠지만, 결과와는 별개로 보이지 않는 노력의 과정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으면 좋겠다.

그런데, 문득 한 가지 걱정이 떠오른다. 지금 정부가 출발한 지 1년이 다 되어가고 새봄이 왔는데도, 아직 그렇다 할 ‘싹’이 없어 보이는 것은 나만의 비뚤어진 생각일까. 여전히 보이지는 않지만 ‘싹’을 틔우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고 믿어야 하겠지만 말이다.

                                           <다음 글은 4월 27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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