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사회가 사라졌다

[데일리임팩트 권해솜 기자] 시민행동이 들불처럼 활활 타던 시기가 있었다. 환경·봉사·인권 등을 내세운 시민단체가 생겨났고 그 행위는 긍정적으로 발전했다. 주먹 불끈 쥐고 피켓을 들지 않더라도 존재감 드러내며 온갖 사회의 불만과 부조리를 유쾌하게 비판했다. 삼보일배로 환경 파괴와 생명의 존엄성을 알리고, 촛불을 들어 각종 사회 부조리와 맞섰다. 요즘은 예전과 사뭇 다르다. 여기를 봐도 저기를 봐도 피로(疲勞)사회. 몸을 사리고 표현하지 않는다. 활기찼던 시민의 목소리는 지금 어디로 숨은 걸까? 

프랑스 수도 파리의 콩코르드 광장(Place de la Concorde) 앞. 최근 시위가 잦아 화재의 흔적이 쉽게 눈에 띈다. 환경 미화원이 곳곳의 시위 문구를 지우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사진 권해솜 기자.  
프랑스 수도 파리의 콩코르드 광장(Place de la Concorde) 앞. 최근 시위가 잦아 화재의 흔적이 쉽게 눈에 띈다. 환경 미화원이 곳곳의 시위 문구를 지우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사진 권해솜 기자.  

지난해 겨울, 서울시 한 자치구 산하 공공기관에서 이해할 수 없는 인사가 단행됐다. 신임 구청장의 선거 캠프에서 일을 도왔던 전 구의원이 채용 과정을 거쳐 공공기관 이사장에 발탁됐다. 그는 10여 년 전 성매매와 관련한 전과가 있었다. 행정사무 감사 등을 통해 해당 이사장은 직원의 실수를 대신 뒤집어썼다고 상황 설명을 했다. 하지만 인사 문제를 수용할 수 없던 해당 지역 구의원들은 의회와 구청 앞, 거리에서 펼침막을 들어 불만을 표출했다. 이 일을 알게 된 몇몇 주민은 매일 정오 구청 앞에 나가서 추운 겨울 일인 시위를 벌였다. 지역 신문과 방송도 관련 보도를 했다. 토론회를 열어 불합리한 인사를 한 구청장을 주민소환하자는 의견도 피력했다.

그들은 이 문제에 의분을 느껴 함께 활동할 사람들이 모이기를 바랐다. 관심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야 사회운동이 되고, 시민의 목소리를 어디론가 전달할 수 있어서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활활 탈 줄로만 알았던 불꽃놀이가 꺼진 기분으로 마무리됐다. 

지난해 말, OO구청 앞에 나와 일인 시위를 하고 있는 주민. 불합리한 상황에 대해 주민의 뜻이 많이 모이기를 바랐지만 힘을 모으는 일은 쉽지 않았다. 사진 권해솜 기자. 
지난해 말, OO구청 앞에 나와 일인 시위를 하고 있는 주민. 불합리한 상황에 대해 주민의 뜻이 많이 모이기를 바랐지만 힘을 모으는 일은 쉽지 않았다. 사진 권해솜 기자. 

프랑스는 달랐다. 지난 3월 말, 행사 참여 목적으로 가게 된 프랑스 파리는 세계적 관광지라는 지명도와는 달리 싸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마크롱 정부의 국민연금 개혁에 반발해 많은 국민들이 거리로 나섰기 때문이다. 최근 프랑스 상황을 뉴스로 보아서 알겠지만, 특히 프랑스 수도 파리는 곳곳이 쓰레기로 넘쳐났다. 파리 시위의 중심인 콩코르드 광장 주변에서는 시위 중에 발생했을 법한 화재 흔적을 볼 수 있었고, 전투 경찰도 눈에 띄게 많았다. 이곳을 방문한 관광객은 역사의 한 페이지려니 하고 쓰레기 더미를 배경 삼아 사진을 찍었다. 시위에 가담하는 노동조합원이 많다 보니 일부 지하철역은 무정차 통과했다. 항공 관련 노조까지 가담하면서 항공기 운항에도 차질이 빚어졌다.

중요한 시위에 꾸준하게 참여하고 있던 프랑스인 친구와는 만남 대신 메신저로 이와 관련한 대화를 나눴다. 그는 “프랑스의 지금 상황에 대해서 너무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다. 국민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 정부에 대항하는 행동이며, 이게 바로 프랑스 스타일이라고 했다. 그의 말에 “한국도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정부 혹은 불합리에 맞서 한국도 다양하고 적극적인 방식으로 표현해왔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문득, 현재 우리 사회는 어떤지 되돌아보게 됐다. 분명 그랬다고 생각했는데 몇 년 사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한목소리를 내던 시민사회가 없다고 느낄 정도로 확 줄었다. 

지난 3월 프랑스 파리. 마크롱 정부의 국민연금 개혁에 반대하는 환경미화원 노조의 파업으로 쓰레기가 도시 곳곳에 쌓여 있었다. 사진 권해솜 기자.
지난 3월 프랑스 파리. 마크롱 정부의 국민연금 개혁에 반대하는 환경미화원 노조의 파업으로 쓰레기가 도시 곳곳에 쌓여 있었다. 사진 권해솜 기자.

시민사회는 사회 정의와 정화 차원에서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 정부나 소위 힘 가진 사람을 대상으로 문제를 지적하고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는 일이 시민사회의 역할이어야 한다. 흥미롭게도 과거 몇 년간 시민사회는 ‘관(官)’과 친하게 지내고자 하는 분위기로 급물살을 탔다. 지난 정부가 민·관 협치 아래 시민사회와 손을 잡고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고자 했기 때문이다. 시민단체가 정부기관에 등록되고, 시민단체인 듯 아닌 듯 행정청과 다양한 사업을 벌였다. 일정 부분 행정 지원을 받는 시민단체도 이전보다 더 늘었다. 세상이 바뀌고 시민사회의 비판이 필요했을 때 문제는 드러났다. 정부나 지자체 부처와 친하게 보냈으니 저항할 방법도, 명분도 잊고 말았다. 시민을 위해 활동했지만, 시민사회가 갖춰야 할 고유의 정체성, ‘비판 기능’을 상실해 버렸다.

지역 사회에서 특히 지역 언론의 문제는 더 극명하다. 1995년 지방자치 시대가 전격적으로 열리면서 지역 취재를 하는 신문 등 매체들이 성장했다. 지역 언론에 기대했던 바는 당연히 지역을 대표하는 정론지였다. 지역에서 벌어지는 소소한 일들을 주민 편에서 세밀하게 바라봤으면 하는 바람이 더 컸다. 하지만 대부분의 지역 신문은 해당 관청이 제공한 보도자료와 지역 단체장이 주인공인 행사 사진으로 도배됐다. 

그 이유는 적지 않은 수의 지역 언론이 자치단체의 구독과 광고에 의지하는 구조로 운영되기 때문이다. 지자체나 행정부를 비판하는 기사가 나가면 그다음 회계연도에 구독료나 광고에 대한 예산이 여지없이 깎이며 소위 ‘길들이기’를 당하게 된다. 지방 정부 비판에 눈을 감거나 기사화를 하더라도 축소 보도하는 곳이 꽤 많다. 서서히 지역 언론의 순기능에 금이 갈 수밖에 없다. 중앙언론 또한 정부와 무관하지 않겠지만 지역 언론과 지자체 관계는 이보다 더 복잡하다. 

시·군·구가 발행하는 소식지의 논조와 다르지 않다 보니 계도지(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 집권 당시 지방자치단체가 신문을 대량 구매해 통반장에게 제공하던 신문. 정언유착의 상징과도 같으며 서울 외 지역은 거의 없어졌다.)와 별반 다를 게 없는 모습으로 변했다. 지역 언론의 소멸 과정은 시민사회가 자기 모습을 잃어간  경로와 다를 바 없었다.

협동조합으로 운영되고 있는 지역언론 은평시민신문.  이 지역 미담은 물론 쓴소리도 할 수 있는 이유가 있다면 힘든 상황에서도 구독과 후원으로 운영되고 있어서다. 사진 권해솜 기자. 
협동조합으로 운영되고 있는 지역언론 은평시민신문.  이 지역 미담은 물론 쓴소리도 할 수 있는 이유가 있다면 힘든 상황에서도 구독과 후원으로 운영되고 있어서다. 사진 권해솜 기자. 

마침 지난해 말 서울시 강북구와 은평구는 계도지에 대한 예산 삭감을 감행했다. 특히 은평구의 경우 계도지와 전국 단위 신문에 대한 예산을 8000만 원 깎았는데, 관련 보도를 했던 은평시민신문은 바른지역언론연대 소속으로 언론 정화에 대해 고민하는 몇 안 되는 곳이다.

2004년에 주식회사로 창간했으나 동네 주민들이 만든 취지를 살려 2014년 협동조합으로 전환했다. 주민의 후원과 구독으로 운영하고 있으며 뉴스레터 ‘서울구경’을 발행해 시민과 소통하고 있다. 주민의 목소리는 물론 정부 비판, 시민사회의 쓴소리도 담아내면서 지역 언론 본연의 임무를 담당하고자 노력해왔다.

은평시민신문의 박은미 편집국장도 시민사회의 움직임을 찾아볼 수 없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박 국장은 이 같은 현상이 특정 지역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 모든 지역과 사회에서 그 움직임이 줄어든 분위기라고 말했다.

“지역에 어떤 일이 생기면 언론에서도 다루고, 진보정당이나 시민사회도 움직여야 뭔가 일이 될 텐데 그런 분위기가 아닙니다. 같이 받쳐주고 좀 싸워주고 문제를 제기해주는 사람들이 있어야 하지만 사실상 거의 없다고 보면 됩니다. 예전에는 좀 있었습니다. 범주가 좀 작더라도 역할을 했어요. 이제는 시민사회도 민간 위탁사업이나 ‘협치’로 들어가다 보니, 행정의 범주에서 시민사회를 바라보더라고요.”

시민 중심의 지역공동체다운 면모를 10년 넘게 보였던 인천 동구 배다리마을 또한 지방정부가 공동체에 개입하자 분위기가 달라졌다. 긍정적인 부분도, 부정적인 부분도 존재했다. 시민이 중심이 돼서 세상을 바꿔나갈 때보다 진행 속도는 빨라졌지만, 뭔지 모를 이질감이 공동체의 한 부분을 차지했다.

정부 차원의 지원을 지속해서 받은 시민단체 혹은 지역 언론은 결국 필연적으로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 게 어려워진다. 이를 원치 않으면 경제적 지원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하지만 그런 곳은 손에 꼽기 어려울 정도다. 건전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민·관 협치에 힘 쏟았지만, 뜻한 바와 다른 결과를 낳았다.

강서구 화곡중앙시장 모아생활배움터. 화곡동은 강서구 내 다른 지역에 비해 복지문화센터 수가 적다. 도시재생지원센터가 있던 공간을 아이들 배움터와 어르신 운동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협동조합 형태로 운영하고 있으나 강서구에서 일정 부분 지원을 받고 있다. 사진 권해솜 기자. 
강서구 화곡중앙시장 모아생활배움터. 화곡동은 강서구 내 다른 지역에 비해 복지문화센터 수가 적다. 도시재생지원센터가 있던 공간을 아이들 배움터와 어르신 운동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협동조합 형태로 운영하고 있으나 강서구에서 일정 부분 지원을 받고 있다. 사진 권해솜 기자. 

한때는 도시재생지원센터라는 곳을 중심으로 지역마다 색다른 프로그램이 생겨나 주민이 함께하는 문화가 생겨나는 듯했다. 지역을 위한 협동조합도 생기고 복지 혜택이 적은 곳에 주민이 움직여 교육 프로그램도 만들며, 작지만 큰 성과를 이뤄가기도 했다. 문제는 정부의 색깔이 달라지면서 협치의 중심에 서 있던 도시재생지원센터가 지난해 말 문을 닫거나 자체 운영으로 전환한 점이다. 

시민사회가 바르게 성장하려면 완전한 독립밖에 없다. 주민이 움직여야 비판도 거세게 할 수 있고, 현실 문제를 외면하지 않게 된다. 생명력을 잃어버린 시민사회가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 거리에서 우리 사회를 위해 열정을 다해 한목소리를 내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올바르고 성숙한 시민공동체의 조성과 지속을 위해 이제라도 되돌아보고 정비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러려면 먼저 스스로 자각하고 되돌아보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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