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식 논설위원, 전 KBS해설위원실장

이동식 논설위원
이동식 논설위원

일본 나라현 아스카촌(明日香村)에 있는 한 벽화무덤에서 잠자던 3개의 12지 신상이 긴 잠에서 깨어났다. 지난 3월 23일 일본 문화청 발표에 따르면 아스카촌에 있는 키토라고분의 석실 벽에 희미하게 남아 있던 12지 신상의 용과 뱀, 원숭이 등 세 신상의 모습이 X선 형광 검사를 통해 드러난 것이다. 이 무덤은 1983년에 처음 석실로 된 무덤 벽에 고구려 사신도(四神圖)에서 보던 현무(玄武)가 그려져 있는 것이 확인돼 큰 뉴스가 되었었다.

그 뒤 석실 벽에 12지 신상이 그려진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여 검사를 한 결과 20년 후인 2004년에 6개가 확인된 데 이어 완전히 사라진 것으로 보이는 3개 외에 이번에 추가로 3개가 더 드러남으로써 9개의 신상이 확인됐다. 처음 현무도가 확인된 지 40년 만에 신상들이 잠에서 깨어난 것이다.

   12지신상 중 새로 확인된 용과 뱀 원숭이(왼쪽부터) 신상. /NHK화면 캡처. 
   12지신상 중 새로 확인된 용과 뱀 원숭이(왼쪽부터) 신상. /NHK화면 캡처. 
 갈라진 혀가 뚜렷한 뱀의 형상. 
 갈라진 혀가 뚜렷한 뱀의 형상. 

이 고분은 7세기 말에서 8세기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돌방무덤, 곧 석실분이다. 긴 세월 지하에 갇혀 있느라 벽화 위에는 흙먼지가 묻고 채색은 날아가 잘 보이지 않았지만, 흙먼지 밑에 당초의 물감 흔적이 남아 있었고, 그 가운데 뱀으로 추정되는 사(巳) 신상은 옷자락과 함께 두 개로 혓바닥이 갈라진 뱀의 머리 형상이 뚜렷해 전신이 드러났다고 한다.

​이런 소식이 왜 우리에게 뉴스가 되는가? 그것은 이번에 드러난 신상의 개념과 배치, 신상들의 옷차림과 그림 수법 등이 곧바로 삼국시대 우리 조상들의 고대문화를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키토라고분은 1983년 NHK의 내시경 조사에 의해 벽화분으로 확인되었다. 고분은 구릉 사면을 정지(整地)한 평탄면에 석실을 쌓으면서 판축공법으로 분구를 축조하였다. 석실 규모는 240cm, 너비 104cm, 높이 114cm이다. 벽화는 전면에 석회를 바른 후 바닥을 제외한 벽면에 그렸다. 천장에는 천문도를, 천장석 하단에는 금박과 은박으로 해와 달을, 네 벽의 상단에는 사신을, 하단에는 12지신을 그렸다.

 키토라고분의 현무도(왼쪽)와 고구려 강서대묘의 현무도. 한눈에 같아 보인다. 
 키토라고분의 현무도(왼쪽)와 고구려 강서대묘의 현무도. 한눈에 같아 보인다. 

사신 가운데 북쪽 벽의 현무 그림이 가장 선명했다. 북한의 고구려 강서대묘에 그려진 현무도와 비교하면 같은 스타일임을 한눈에 확실히 알 수 있다. 동쪽 벽에 그려진 청룡은 얼굴과 다리가 선명하게 보였는데, 이 고분에서 북쪽으로 1㎞ 떨어진 곳에 있는 다카마쓰즈카(高松塚) 고분에 그려진 청룡과 구도가 매우 흡사해 양쪽 고분이 같은 밑그림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동안 보이지 않던 신상 3개가 추가로 확인됨으로써 이 고분의 구조가 그대로 드러났다.

  키토라고분의 내부 구조./NHK화면 캡처
  키토라고분의 내부 구조./NHK화면 캡처

사신(四神)이라는 개념은 물론 중국에서 형성된 것이다. 무덤에 사신과 함께 일월성신을 그려 넣기도 한다. 관 뚜껑이나 무덤에 별자리나 사신을 그려 넣는 것은 죽은 자의 영혼이 하늘로 돌아갈 수 있도록 표시한 것이라고 한다. 다만 중국의 경우 고분의 사신도가 한(漢)·당(唐) 시대에 걸쳐 나타나지만, 인물의 풍속화와 함께 그려지고 있다. 그것이 고구려로 와서는 4세기 중엽에서 7세기에 무덤에 크게 사신만 그려 넣는 독자적 양식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므로 키토라고분의 사신도는 고구려 양식이다.

​또 12지 동물의 개념은 멀리 티베트에서 시작돼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로 이어졌지만 이렇게 큰 그림으로 벽면을 채우는 것은 우리나라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개념은 특히 신라에서 발달해 몇 개의 벽화 묘가 나온 바 있다. 묘 둘레를 부조로 새긴 12지신 호석(護石)이 지키고 있는 김유신장군 묘가 대표적이다. 그 뒤 파주시 진동면 서곡리에서는 고려시대 12지 신상의 벽화가, 원주에서는 조선시대 무덤에서 12지신상이 그려진 것이 확인되는 등 우리들에게만 있는 매장문화다.

   키토라고분의 뱀 신상(왼쪽)과 김유신장군 묘의 뱀 호석.
   키토라고분의 뱀 신상(왼쪽)과 김유신장군 묘의 뱀 호석.

벽화의 신상을 비교해보면 왼쪽 것이 이번에 키토라고분에서 확인된 뱀 신상을 윤곽선을 따라 그려본 것이고, 오른쪽이 김유신장군 묘의 뱀 신상을 좌우 뒤집어 본 것인데, 옷차림이랑 선의 흐름, 구도 등이 똑같다. 그렇다면 이 무덤에 벽화를 그려 넣은 사람들은 신라계통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다.

​1980년대에 키토라고분이 확인됐을 때에 바로 그 근처에서 다카마쓰 고분의 고구려 벽화묘 인물도, 사신도와 거의 판박이인 그림들이 연이어 출토되면서 아스카 지방의 주인공들이 누구인가에 대해 역사 고고학자들만이 아니라 일반인들로부터도 높은 주목을 받았다. 당시에도 고구려와 백제, 신라 등 3국의 주요 문화가 그대로 드러나 무덤의 그 주인공들에 대한 많은 추측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 확인된 키토라고분의 경우에는, 정리해보자면, 고분에 사신도와 천문도가 그려진 것으로 보면 고구려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것이고, 12지신상 그림은 신라일 가능성이 있으며, 무덤의 축조방식은 백제식이다. 무덤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7세기 말~8세기 초라면 한반도에서 백제가 망하고 그 유민들이 대거 몰려온 때인 만큼 무덤의 주인공은 백제계의 주요 인사 등 한반도에서 온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보다 결정적으로는 얼마 전 일본인 학자의 연구에 따르면 벽화에 그려진 천문도는 고분이 위치한 아스카의 북위 34도에서 관측한 것이 아니라 북위 37도 이상의 지역이어서 한반도 중부지역에서 관측된 천문도임이 확인되었다. 적어도 한반도의 삼국문화가 그것을 갖고 온 사람들에 의해 융합되었음이 분명한 것이다.

이번에도 일본 학계는 특유의 논법으로 대륙문화와의 친연성을 강조하는 선에 머물고 있다. 이들 모두를 당(唐)시대 중국으로부터 기원하여 동아시아 전체에 파급되었다고 주장하는 식이다. 고대 벽화 연구가인 도쿄대학의 마스키 류스케(増記隆介)교수는 “이 뱀 신상은 중국이나 한반도로부터의 영향을 떠올리며, 그 뒤 헤이안(平安)시대의 회화자료와도 닮은 점이 있다. 동아시아 회화의 전개 등을 검토하는 새로운 자료다”라고 말한 것으로 인용되었다.

​이런 보도가 나왔다가 지나갈 때마다 느끼는 것은, 일본은 왜 일본에 나타나는 한반도 삼국시대 문화가 한국인의 선조들이 건너가서 만든 것이라는 것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지 못하는가 하는 궁금증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뿌리가 한국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 그렇게 싫은가? 고대 역사의 물결은 그렇게 한반도에서부터 사람과 물자가 같이 이동한 것이라면, 자신들의 피 속에 우리 한국인들이 있다는 것은 사실 아닌가? 백제가 망한 후 일본의 역사서인 ‘일본서기’를 새로 쓰면서 한반도에 있던 자신들의 뿌리를 끊어버린 것을 다 알면서도 아직도 천황가는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랐다고 믿고 싶은 것인가?

​고대 일본의 형성에 한반도 이주민들의 역사와 역할을 인정하면 이웃 나라에 대해 그렇게 부정적인 시선을 계속 갖지는 않을 것이다. 한국과 일본의 미래를 위해서라면 일본으로서는 고대 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들이 그들의 문화를 일구었다는 역사적인 사실과, 근세 이후 일본의 침략으로 인해 우리들이 고통받은 사실을 젊은 세대에게 가르쳐주는 것이 기본일 텐데 그것을 왜 그리 감추는지, 그리고 유독 우리한테만 냉정한 이웃이려고 하는지 그게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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