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우현 논설위원, 한불협회 회장, 전 주 프랑스 공사 겸 문화원장, 전 숙명여대 객원교수

손우현 논설위원
손우현 논설위원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지난주 연금제도 개혁 법안을 노조와 여론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헌법상 비상권한을 발동해 하원 표결을 건너뛰고 관철시켰다. 정년 및 연금 수령 연령을 62세에서 64세로 2년 늦추는 연금 개혁 법안은 당초 상·하원 표결을 거칠 예정이었다. 하지만 상원을 통과한 법안이 여소야대의 하원에서 부결될 가능성이 높아지자 마크롱 대통령은 정부 연금 개혁안을 총괄하는 엘리자베스 보른 총리를 통해 표결을 불과 몇 분 앞두고 ‘헌법 49.3조’를 발동했다. 프랑스 제5공화국 헌법 제49조 3항은 정부가 긴급한 상황이라고 판단할 경우 의회의 동의 없이 법안을 통과시킬 수 있는 조항이다. 이 경우 야당은 정부 불신임안을 24시간 안에 제기할 수 있다.

야당 연합이 제출한 내각 불신임안은 하원 표결에서 우파 공화당의 지원으로 9표의 근소한 차이로 부결되었다. 프랑스 의회는 하원 우위의 양원제다. 총 577석의 하원에서 여권은 250석으로 제1당이기는 하나 과반인 289석에는 미달한다. 이제 연금 개혁법은 프랑스 헌법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이변이 없는 한 연내로 공포될 전망이다.

    연금개혁 밀어붙이는 ‘개혁 대통령’

정부 불신임안 부결 이틀 뒤인 22일 마크롱 대통령은 프랑스 공·민영 TV 합동 인터뷰에서 연금 개혁의 당위성을 설명하면서 “내가 직장 생활을 시작했을 때 1000만 명이던 (연금 수령) 은퇴자가 현재는 1700만 명이고, 2030년에는 2000만명이 된다”며 “현행 연금 제도는 개혁 없이는 지속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는 “연금개혁은 나도 좋아서 하는 것이 아니고 피하고 싶으나 필요한 개혁이고 국민 전체를 위한 것이다. 모든 책임을 감수하겠다.”고 했다. 마크롱은 이날 인터뷰에서 르 파리지앵지가 보도한 선진국들의 정년 연령 비교표를 제시했다. 이 도표에 의하면 미국과 프랑스, 스웨덴을 제외한 대부분의 유럽 선진국들과 일본은 65세 이상의 정년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마크롱의 대국민 담화 다음 날인 23일 파리와 주요 도시에서는 총 100만 명 이상(정부 통계)이 참가한 가운데 격렬한 반대 시위가 일어났다. 시위를 주최한 노동총동맹(CGT)은 “최소 350만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며 “지난 1월 이후 벌어진 총 9차례 시위 중 최대 규모”라고 주장했다. 일부 지역에선 공공시설 방화 사건이 잇따르는 등 시위 양상도 격렬해졌다. 파리에는 청소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길거리에 쓰레기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일부 시위대는 식당과 상점, 은행 등의 창문을 부수고, 길가에 쌓인 쓰레기 더미에 불을 질렀다. 경찰이 곤봉과 최루탄으로 시위대 해산에 나서자 과격 노조원들이 돌을 집어던지고 폭죽을 쏘며 저항했다. 복면을 쓴 시위대와 경찰이 난투극을 벌이기도 했다. 프랑스 내무부 관계자는 “시위대의 공격으로 경찰 440여 명이 부상하고, 900여 건의 화재가 있었다”며 “폭력 시위 혐의로 전국에서 457명을 체포했다”고 밝혔다. 프랑스 남서부 보르도의 시청 정문에는 시위대 방화로 추정되는 화재가 발생했다. 파리 시위에서는 “짐이 곧 국가다”로 유명한 절대 군주 루이 14세의 복장을 한 마크롱의 몽타주가 ‘공화국의 경멸자’라는 타이틀과 함께 등장하기도 했다.

한편, 찰스 3세 영국 국왕은 26~29일 첫 해외 순방지로 프랑스를 국빈 방문하려던 계획을 프랑스 측 요청으로 연기했다. 르 몽드 보도에 의하면 마크롱은 찰스 3세의 방불을 예정대로 추진하려 하다가 23일 시위 사태를 보고 마음을 바꿨다고 한다. 28일도 시위가 예정돼 있어 이 상황에서 베르사이유 만찬과 100년 전쟁 당시 영국령이었던 보르도를 방문하는 건 무리라고 판단한 것이다. 국빈 방문의 연기는 프랑스에서는 이례적인 일이다.

일과 여가의 균형을 중시하는 프랑스 사회에서 여론의 70%는 이번 연금 개혁법안을 반대하고 있다. 정년을 2년 더 연장하는 것은 힘들고 위험한 일을 하는 육체노동자에게는 특히 불리하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비판자들은 마크롱을 ‘공화제 군주(monarque républicain)’라고 비난한다. 뉴욕타임스와 로이터통신은 마크롱 대통령이 연금 개혁법안은 통과시켰지만 이는 ‘치러야 할 대가가 큰 승리’를 뜻하는 ‘피로스의 승리’라고 평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크롱의 초강수가 가능했던 것은 모든 것을 거는 그의 개혁가적 결기와 프랑스의 정치 제도와 문화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불과 39세의 나이로 2017년 대통령에 처음 당선된 정치 신인 마크롱은 나폴레옹 이후 프랑스의 최연소 지도자다. 내외신 언론은 그의 등장을 ‘혁명’에 비유했다. 그는 집권하자마자 ‘30년간 복지부동’이었던 프랑스를 변화시키겠다며 친기업·친유로 중도실용 노선의 기치를 내걸고 노동법 개혁, 철도 개혁 등 전방위 개혁을 밀어붙였다. 그러는 와중에 ‘노란 조끼’ 시위대의 거센 저항에 부딪히기도 했다. 마크롱 대통령은 집권 초기부터 연금개혁을 핵심 공약으로 내세웠으나 국민적 저항과 팬데믹 위기에 한 차례 포기해야 했다.

     갖춘 권한 강력해 ‘군주’라는 비판도

한편 프랑스는 200년이 넘는 민주주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오랜 군주제와 중앙집권제의 전통 때문인지 자유민주주의 국가 중에서는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의 막강한 대통령제를 운영하고 있다. 1958년 출범한 프랑스 제5공화국은 이른바 ‘드골 헌법’을 바탕으로 헌법규범상으론 이원집정부제나 실제로는 직선 대통령에게 강력한 권한을 부여하고 있다. 이렇게 선출된 대통령은 외교, 국방, 내치에 걸치는 방대한 권한을 행사하는 한편 의회의 불신임으로부터 면제되는 초월적 지위를 누린다.

단 총선에서 여소야대 현상이 발생하면 대통령은 야당 출신 총리를 임명하여 동거 정부(cohabitation)가 출범하게 되는데, 1958년 출범한 제5공화국 역사에서 동거정부 기간은 9년에 불과하다. 또 2002년부터는 7년이던 대통령 임기를 하원의원과 같이 5년으로 단축하고(한 차례 연임 가능) 대통령 선거 직후 하원 선거를 실시함으로써 동거 정부의 출현 가능성은 매우 적어졌다. 이번에 마크롱이 발동한 정부가 의회의 동의 없이 법안을 통과시킬 수 있는 ‘헌법 49.3조’는 강력한 대통령을 담보하는 장치 중의 하나다.

프랑스-수아르(France-Soir)지는 “프랑스인들은 대체로 대통령을 ‘군주제의 대용품(un ersatz monarchique)’으로 대하는 경향이 있어 대통령은 ‘대통령답기’를 원하며 또 그러기 위해서는 직책에 걸맞은 위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논평했다. 대통령실 전 출입기자단장인 르 피가로지의 외교 전문 기자 알랭 바를뤼에(Alain Barluet)는 영국 BBC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아직도 ‘공화군주제’다”(“We are still a ‘republican monarchy.’”)라고 자조 섞인 표현을 썼다.

마크롱이 연금개혁에 따른 후폭풍을 지혜롭게 극복하고 ‘공화제 군주’가 아닌 혜안의 개혁 대통령이 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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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스의 승리=패전과 다름없는 실속 없는 승리. 고대 그리스 지방 에피로스의 왕 피로스는 두 번에 걸친 로마와의 전쟁에서 모두 승리했지만 장수들을 많이 잃어 마지막 전투에서 패망했다. 이후 많은 희생이나 비용의 대가를 치른 승리를 ‘피로스의 승리’라 부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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