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훈 논설위원, KBSI 분석과학마이스터

이석훈 논설위원
이석훈 논설위원

바쁜 일과 속에서도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신체의 활동 에너지를 저장하는 일상적인 행위를 넘어 즐거움을 추구하는 식도락 문화로 정착되고 있다. TV엔 맛집 탐방이나 요리 프로그램이 넘쳐나고, 먹방 유튜버가 수백만 명의 구독자를 확보하며 인기를 끌고, 소문난 맛집 앞에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는 방문객을 보는 게 일상이 되어버렸다. 2021년 9월 영국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새로 등재된 26개의 우리 단어에는 mukbang(먹방)을 비롯 banchan(반찬), bulgogi(불고기), chimaek(치맥), galbi(갈비), dongchimi(동치미), japchae(잡채), kimbap(김밥), samgyeopsal(삼겹살) 등 9개의 음식 관련 단어가 포함되었을 정도다.

집에 머무는 시간이 적은 가족들에게 맛난 음식을 빠르게 준비하는 것은 주부들이 늘 겪는 고민거리이고, 특히나 외부 활동이 많지만 경제적 여유가 적은 젊은 세대들은 값싸고 맛있는 음식을 찾게 된다. 늦은 저녁 시간 출출한 배를 달래 줄 야식으로 무엇을 먹을 것인지는 또 하나의 선택지를 만들게 한다.

저렴하면서도 맛난 음식을 빠르게 조리할 수 있을까? 있다. 있어도 너무 많아 차고 넘친다. 식당까지 발걸음을 재촉하지 않더라도 전화 한 번이면 집까지 배달이 되고, 학교 주변의 간이식당엔 달콤매콤한 떡볶이, 따끈한 국물에 담겨 있는 어묵, 거리마다 들어서 있는 편의점엔 식사 대용이나 간식으로 먹을 수 있는 라면 등 인스턴트식품, 조미식품, 가공식품에 굴소스, 치킨스톡 등 각종 소스가 잔뜩 진열되어 있어 손쉽게 접할 수 있다. 다만 한 가지 찜찜함만 덜어낸다면.

각종 음식이 넘쳐나는 요즘에도 한 끼 식사나 간식으로 익숙해진 라면, 화학조미료 유해론과 우지 파동을 겪으면서 잠시 주춤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포기할 수 없는 간편함과 국물에서 올라오는 감칠맛으로 인해 라면 소비가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K-푸드 바람을 타고 2022년에 8천억 원의 수출실적을 기록해 전년 대비 11.73% 증가했다고 한다.

2분만 끓이면 완성되는 라면, 냄새만 맡아도 유혹되는 라면의 감칠맛이 스프에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라면이 고급화되었다고 스프에 10여 시간의 노력이 함축되어 있을까? 원재료명을 보면 다양해진 라면의 종류만큼이나 다양하게 L-글루탐산나트륨, 5‘-리보뉴클레오티드이나트륨(육류 맛), 5-이노신산이나트륨(육류 맛), 5-구아닐산이나트륨(버섯 맛), 호박산이나트륨(조개 맛) 등이 1개 또는 그 이상 적혀 있다. 모두 감칠맛을 내는 향미(香味)증진제이지만 라면의 종류에 따라 특성에 맞게 조합되어 있다.

쉽게 말해 감칠맛이란 고기에서 느끼는 맛이다. 즉 고기를 구성하는 단백질이 분해된 아미노산 중의 일부가 감칠맛의 정체이다. 감칠맛은 아미노산계인 글루탐산과 핵산계인 이노신산 또는 구아닐산에서 발현되는데, 글루탐산은 다시마, 녹차잎, 토마토, 콩, 밀, 우유 등에 많이 있고, 이노신산은 가다랑어, 돼지고기 등에 많이 들어 있으며, 표고버섯 등 버섯에는 구아닐산이 많이 함유되어 있다. 대표적 단백질 식품인 콩에는 약 36%의 단백질이 들어 있고 이 중 글루탐산이 25%로, 콩 100g에 9g의 글루탐산이 있어 감칠맛이 엄청날 것 같지만, 대부분의 글루탐산은 단백질로 결합되어 있어 콩 자체로는 감칠맛을 느끼기 힘들다. 그래서 메주를 발효시켜 간장이나 된장으로 아미노산을 분해하여 조미료로 사용한다. 우유에 비해 파머산치즈에 수백 배의 글루탐산이 함유되어 있어 긴 시간의 발효·숙성기간을 필요로 한다. 또한 일본의 우동엔 다시마와 가다랑어포로 육수를 만드는 과정이 동반된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평생을 살아가며 감칠맛에 길들여져 왔다. 모유를 먹던 어린애에게 젖을 떼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대용으로 우유를 주면 거부하고 엄마 젖을 찾는다. 태어나서 처음 접한 모유의 감칠맛에 이미 길들여 있기 때문이다. 모유에는 100ml에 20mg의 글루탐산이 들어 있어 우유보다 단백질은 적지만 글루탐산은 10배나 많아 감칠맛이 더 강하다. 엄마가 섭취한 만큼 포함된 것이 아니라, 필요한 만큼 엄마 몸에서 생성시켜 분비하기에 모유에 포함된 글루탐산의 양은 거의 일정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혼을 하든 직장을 따라 타 지역에 가든 부모님과 떨어져 살게 되면서 어머니의 손맛이 깃든 음식을 그리워하게 된다. 특히 처음으로 집을 떠난 신혼부부의 경우, 요리가 서툰 신부가 남편을 위해 입맛에 맞는 식사를 준비한다는 것은 참 곤혹스러운 일이다. 만능 비법을 쓰고 싶지만, 떨쳐버리지 못한 염려스러움 때문에 각종 요리 레시피를 참고하면서 준비하는데도 어머니의 손맛에 길들여진 남편의 입맛에 맞추기엔 모자라 어머니의 정성을 왜곡하게 만든다.

인터넷 게시판에 올라온 사례로, 신혼인 남편이 아내가 해주는 반찬이 영 맛이 없어 아내에게 “우리 엄마가 해주던 음식보다 맛이 없다”라며 반찬 투정을 했는데, 아내가 “그럼 당신 어머니가 해주던 것하고 똑같이 해줄게”라며 음식을 차렸다. 남편이 먹어보고 정말 자기 어머니가 해주던 것과 같은 맛이 나기에 아내에게 비결이 뭐냐고 물었더니 MSG(L-Monosodium Glutamate, L-글루탐산나트륨)를 넣었다고 한다. 오죽하면 어머니의 집밥이 맛있는 이유가 MSG(Mother Sonmat Gadeuk) 때문이라는 유머가 생겼을까.

우리네 음식은 유달리 국물 있는 것이 많다. 국이며 탕도 모자라 전골에 각종 면 요리도 국물을 기본으로 하기에 국물 맛이 곧 그 음식의 맛을 좌우하게 되지만, 제대로 된 국물 맛을 내기에는 값비싼 재료에 더해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가정에서 육수를 낼 때 멸치, 새우, 다시마, 표고버섯 등을 넣는 것도 감칠맛의 정수인 조미료 성분을 뽑아내기 위한 과정으로, 번거롭기도 하면서 많은 시간을 들어야 맛을 낼 수 있다. 설렁탕집이나 냉면집에 가서 커다란 솥에 육수가 끓고 있는 것을 보게 되면 왠지 믿음이 가는 게 그 이유다.

바쁜 현대사회, 가정에서 매 끼니 그런 수고로움을 요구하는 것은 식사를 준비하는 가족 학대에 지나지 않는다. 신부는 MSG를 넣으면 맛있어지는 줄 몰라서 안 넣었을까? 어머니는 좋은 재료를 쓰고 오랜 시간 정성을 들여 맛있는 음식을 해주고 싶지 않아서 MSG를 넣었을까? 해묵은 MSG의 유해성에 현혹되지 말고, 개인 취향에 따른 선택의 몫으로 남겨두자.

저작권자 © 데일리임팩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