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학중 논설위원, 가정경영연구소장, 서울가정법원 조정위원

강학중 논설위원
강학중 논설위원

친구들과 영화관을 찾았다. 60대 중반의 남자 여덟 명이 ‘바빌론’을 감상했다. ‘라라 랜드’로 아카데미 감독상 최연소 수상자가 되었던 데이미언 셔젤 감독의 189분짜리 미국 영화였다. 감독에 대한 기대치 때문인지 혹평을 쏟아놓은 사람도 많았다는데 나는 지루한 줄 모르고 재미있게 감상했다.

술과 마약, 섹스와 욕망이 난무하는 광란의 파티 장면은 인간이 어디까지 타락할 수 있는지, 할리우드의 민낯을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성경에서 하늘에 닿을 만큼 높이 쌓아올린 바벨탑으로 인간의 오만함을 상징하던 악의 소굴 바빌론을 왜 영화 제목으로 썼는지 짐작되는 장면들이었다. 긴박하게 돌아가는 아수라장의 촬영 현장이나 방울뱀과의 싸움 등 충격적인 장면이 눈길을 끌기도 했지만, 나에겐 인생의 내리막길에서 삶을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지를 생각하게 하는 영화였다. 1920년대 무성영화를 주름잡던 스타들이 유성영화 앞에서 몰락해 가는 과정을 그린 ‘바빌론’은 흥행에는 실패했다고 한다. 15년의 준비 기간을 거쳐 8000만 달러나 투자했지만, 하고 싶은 얘기가 너무 많아 장황하고 산만해진, 감독의 절제가 아쉬운 영화였다.

‘바빌론’에는 주요한 인물 세 사람이 등장한다. 잭 콘래드, 무성영화 시절 당대 최고의 톱스타였지만 유성영화 시대를 맞으며 서서히 침몰한다. 술에 절어 끊임없이 아내를 갈아치우며 대여섯 번의 결혼생활도 파국으로 몰아넣고 출연한 작품도 연이어 실패하자 지쳐간다.

넬리 라로이, 자신을 스타로 태어난 사람이라고 자부하는 당찬 여배우로, 출연 예정이었던 배우가 갑자기 죽는 바람에 대타의 기회를 거머쥔다. 첫 번째 출연한 영화로 주목받으면서 일약 스타 반열에 오른다. 그러나 불우한 성장과정 속에서 자기감정이 이끄는 대로 살아온 습성을 버리지 못하고 도박과 마약으로 추락한다.

매니 토레스, 멕시코에서 열두 살 때 LA로 이주한, 한낱 잡부 신세였던 그가 잭 콘래드의 눈에 띄어 그리도 꿈꾸던 촬영 현장에 투입된다. 몇 차례의 위기를 극적으로 해결한 공로를 인정받아 영화사의 임원으로 출세한다. 그러나 사랑하는 넬리를 구하기 위해 무리수를 두다가 본인마저 영화판을 떠난다.

내가 꼽은 이 영화의 압권은 잭 콘래드와 영화 평론가 엘리노어 세인트 존과의 대화 장면이다. 20년 동안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온 엘리노어가 ‘잭 콘래드는 이제 끝났나?’라는 제목의 칼럼을 발표하자 설전이 벌어진다. 왜 그런 기사를 썼느냐고 따지는 잭에게 그녀는 “무엇이 궁금한가? 내가 왜 그런 기사를 썼는가가 아니라 관객들이 왜 당신의 연기를 보고 비웃었는지를 알고 싶은 거냐?”며 이렇게 응수한다.

“이유는 없다. 당신 외모나 목소리 탓도 아니다. 당신 시대는 끝났다. 그것도 아주 오래전에. 그래서 당신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잭이 다시 일리노어에게 반격을 가한다.

“당신은 스스로 한 게 아무것도 없는, 가십거리나 쓰는 기자였다. 내 덕분에 당신 같은 사람이 먹고사는 거다. 당신은 바퀴벌레 같은 사람이다.”

그러자 엘리노어가 다시 일침을 놓는다.

“집에 불이 나면 인간은 타 죽지만 바퀴벌레는 불을 피해 어둠 속에서 살아남는다. 당신이 받았던 스포트라이트는 못 받았지만, 난 바퀴벌레처럼 살아남았다.”

세계적인 스타의 눈에는 바퀴벌레같이 더럽고 혐오스러운 인생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평범하게 사는 것이 더 이상 불가능한 스타보다 일상에서 소소한 즐거움과 행복을 느낄 수 있는 평범한 삶을 택하는 사람도 많지 않을까?

유독, 잭과 넬리와 매니, 세 사람의 말로에 관심이 갔다. 정상에 섰다가 인생의 내리막길을 마감하는 방법이 제각각이었다. 엘리노어에게 고맙다는 한마디를 남기고 쓸쓸히 떠난 잭은 자신과의 관계가 끝날 것이라곤 상상도 못 하는 또 한 명의 여자, 결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아내를 남겨 두고 총으로 생을 마감한다. 넬리는 자길 위해 영화사도 옮기고 재기를 위한 파티도 열어 주고 도박 빚까지 갚아준 매니와 멕시코로의 탈출 길에 나선다. 하지만 결혼해서 애 낳고 영원히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매니가 잠시 자리를 떠난 사이, 마약에 취해 춤을 추면서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평소 자신이 말해왔던 것처럼. 그리곤 시체로 발견된다. 매니는 악의 소굴에서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간신히 탈출에 성공하지만 자길 기다리지 않고 홀연히 사라져버린 넬리를 더 기다릴 수 없어 멕시코로 도주한다. 그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평범하게 사는 길을 택한다.

인생의 정점에서 내리막길을 걸으며 삶을 마감하는 방법이 다 달랐다. 나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를 떠올려 보았다. 인생은 올라갈 때보다 내려올 때가 더 힘들고 위험한 등산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약해지는 나 자신을 인정하고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정상에 오르기도 어렵지만 그 정상에 계속 머물 수도 없다. 언젠가는 정상에서 내려올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왜 다들 잊는 것일까. 산 아래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서야 내려오는 법을 미리 익혀야 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 것이 인간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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