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낙 논설위원, 가천대 명예총장, 전 (사)현대미술관회 회장

이성낙 논설위원
이성낙 논설위원

‘조선의 백자, 군자지향(君子志向)’ 전시회가 2월의 마지막 날인 28일 리움미술관에서 개막했습니다. 전시장에 들어서자 경탄의 찬사가 절로 나왔습니다. 도자기, 그것도 조선의 백자가 이렇게 장엄하게 전시장을 압도하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을 비롯해 일본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大阪市立東洋陶磁美術館) 등 국내외 박물관과 개인 소장품을 한자리에서 만나는 게 흔히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아니기에 백자 명품을 감상하는 즐거움이 더욱 컸습니다.

 조선 18세기 백자청화철채동채초충난국문병. 국보. 높이 42.3cm, 입지름 4.1cm, 굽지름 13.3cm. (재)간송미술문화재단 제공.
 조선 18세기 백자청화철채동채초충난국문병. 국보. 높이 42.3cm, 입지름 4.1cm, 굽지름 13.3cm. (재)간송미술문화재단 제공.

특히 이번 전시회에서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이 협조 출품한 백자청화철채동채초충난국문병(白磁靑華鐵彩銅彩草蟲蘭菊文甁)을 만난 것은 큰 자부심과 자랑스러움이 솟구치는 경험이었습니다. 바로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 1906~1962) 선생님의 잔잔한 숨소리를 들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간송 전형필(1906~1962) 선생.
 간송 전형필(1906~1962) 선생.

그렇지 않아도 104회째 삼일절에 즈음하여 간송 선생님을 다시 뵙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던 차였습니다. 필자는 삼일절이 가까워지면 간송 선생님께서 육성으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시던 고아(高雅)한 모습이 해를 넘길수록 더욱 선명하게 다가오곤 합니다.

간송 선생님은 필자가 다닌 보성(普成)중·고등학교의 교주[校主(지금의 재단이사장)]이셨습니다. 말하자면 간송 선생님이 ‘주인’인 학교에 다녔던 것입니다.

그런데 6년이란 결코 짧지 않은 시·공간 동안 교주 간송 선생님을 먼발치에서나마 뵈었던 것은 서너 번밖에 없었습니다. 이는 간송 선생님께서 학교 행정에 직접 관여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간송 선생님의 자택이 보성학교 후문 고개를 넘으면 가시권에 있던 보화각(葆華閣, 1938년 설립)과 대지를 공유했으니 오가며 시시때때로 ‘자기 학교’를 들러볼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간송 선생님은 당시 학교 운영을 서원출(徐元出, 1899~1965) 교장선생님께 일임하셨다고 들었는데, 그만큼 공사(公私)가 분명하셨던 것입니다.

몇 년 전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대한 콜렉숀’이라는 제하에 ‘삼일운동 100주년 간송 특별전’이 열렸습니다. 필자는 그때 전시회를 여러 차례 찾아가곤 했는데, 간송 선생님께서 직접 육필로 쓰신 독립선언서를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간송 선생님께서 전교생이 모인 운동장 앞 연단에서 삼일절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시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1955/56년 3월 교내 운동장 곳곳에 작은 빙판이 있을 만큼 추운 날씨였습니다. 당시 우리네 운동화 고무밑창은 지금처럼 두껍지 않아 언 땅에서 전해오는 냉기에 발바닥이 아렸습니다.

 삼일절 기념식에서 간송 선생이 낭독하셨던 육필 독립선언서. (재)간송미술문화재단 제공
 삼일절 기념식에서 간송 선생이 낭독하셨던 육필 독립선언서. (재)간송미술문화재단 제공

하지만 간송 선생님께서 낭독하시는 ‘삼일절 선언문’을 집중해서 경청하는 학생은 아마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추위도 추위려니와 마이크나 확성기 등의 오디오 시스템도 만족스럽지 않아 학생들의 집중력을 모으는 데 한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간송 선생님께서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셨던 ‘삼일절 정신’만큼은 필자의 마음속 깊이 스며들었던 기억이 또렷합니다.

1906년 개교한 보성고등보통학교(普成高等普通學校)가 1930년대 말 폐교 직전에 이르자 간송 선생님께서는 재정적 부담을 감수하면서 학교를 인수하셨습니다. 물론 1940년대 들어 일제가 더욱 강하게 밀어붙인 우민정책(愚民政策)에 항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간송 선생님께서 해마다 삼일절이면 그리도 묵묵히 독립선언서를 굳이 몸소 낭독하신 이유는 분명합니다. 일제 식민 지배하에서 혹독하게 강탈당했던 우리의 모습이 얼마나 비통했으면 그리하셨을까 싶어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간송 선생님의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또한 잊어서는 안 될 이야기입니다. 1940년 보성학교를 넘겨받은 후, 간송 선생님은 아들 셋을 모두 보성에 다니도록 하셨습니다. 당시 보성학교는 요즘 말로 ‘일류’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자식들을 더 좋은 다른 학교로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그럴 만한 충분한 재력이 있음에도 말입니다. 그러는 한편 학교의 내실을 다져 빠르게 반듯한 면모를 갖추도록 하셨습니다. 이처럼 조용히 솔선수범하신 간송 선생님의 모습을 되새기며, 작금 우리 사회 지도층의 엘리트들이 그분의 올곧은 정신을 본받았으면 합니다.

간송 선생님께서 직접 낭독하기 위해 손수 원고지에 정갈하게 써놓으신 육필 ‘독립선언서’를 보면서, 간송 선생님이 후세에 그리도 전하고 싶으셨던 삼일운동 정신을 가슴 깊이 아로새겨봅니다. 그리고 5월 28일까지 석 달간 열리는 이번 전시회를 많은 사람들이 감상하기를 바랍니다.

주해: 위의 글에는 필자가 기고한 다음 글과 겹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 나라에 이런 사람들이> (기파랑, 2017), <그가 있었기에–최순우를 그리면서> (진인진,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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