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낙 바른사회운동연합 자문위원

이성낙 자문위원
이성낙 자문위원

근래 ‘저주의 굿판’이 대낮에 나타나 우리 사회가 들끓고 있습니다. 정령 놀랍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고,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조선 시대 사극에서나 보았던 것을 오늘 우리네 현실에서 직면하니 너무 당혹스럽습니다. 그것도 공개된 공간에서 미성년자가 ‘저주의 굿판’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도록 기성세대가 유도했다고 하니 암담한 심정입니다.

●우리 사회의 품격은 어디에

이런 사태가 벌어진 것은 그간 우리 사회가 보여온 품격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 한 예를 보겠습니다.

1992년 8월 24일, 우리나라는 중국(중화인민공화국)과의 외교 관계 수립을 위해 ‘대만(타이완)’과 단교를 단행합니다. 바로 그 마지막 날 오후 5시에 서울 소재 대만대사관에서 대만 국기의 하기식이 거행되었습니다. 하기식에서는 두 명의 무관이 정장 차림으로 예를 다하며 마지막 예식을 정중히 수행했습니다.(아래 사진 참조)

같은 날, 대만. 현지 시각으로 오후 5시에 대만 주재 한국대사관에서도 우리 국기의 하기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대사관 직원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홀로 하기식을 진행했습니다. 우리 국기의 ‘하기식’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초라하고, 보기 민망하고, 가슴 아픈 상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 남자는 대사관 직원이기보다는 마치 하우스보이(house-boy)처럼 슬리퍼에 반바지, 러닝셔츠 차림이었습니다.

한 시간 전 서울 상황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습니다.

더 기막힌 일은 상기 영상 자료가 다음 날 국내 일간지에 버젓이 실렸는데도 그걸 크게 문제 삼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필자는 우리 사회의 ‘품격’이 이렇게까지 땅에 떨어졌나 싶어 가슴이 아팠던 것을 기억합니다. 한 사회의 품격이란 과연 무엇인지 자문하면서 말입니다.

1980년대에 필자는 대만학회에 참가한 적이 있습니다. 서울보다 타이베이(臺北)의 날씨가 훨씬 덥기에 가벼운 여름 옷차림으로 가려다 혹시나 해서 정장을 준비했습니다.

타이베이는 더울 뿐만 아니라 습도가 매우 높았습니다. 그런데 학회 전야제 분위기가 우리의 기분보다 훨씬 가라앉았다고 느낄 정도로 차분했습니다. 당시 필자는 그 주된 요인이 참석자들의 의복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참석자 대부분이 감청색 계통의 정장 차림이었기 때문입니다. 품격을 지키는 데에서는 대만 사회가 우리보다 다른 차원의 높은 의식을 갖고 있다는 것에 내심 놀랐습니다. 옷차림은 사람의 언동(言動)에 영향을 주고, 그 사회의 품격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근래 우리 사회의 품격을 보란 듯이 짓밟는 현상이 다름 아닌 국회의사당에서 자주 벌어지고 있습니다. 활발한 정치 토론의 장이 아니라, 살벌한 정쟁(政爭)의 도가니 같습니다. 오가는 언어에서 품격이라는 것을 도무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의사당 내 언어폭력의 수준은 이미 위험 수위에 이른 지 오래입니다.

이러다간 머지않아 입에 담지 못할 쌍욕이 의사당에서 난무(亂舞)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죽하면 국회의원을 선량(選良)이라고 부르던 호칭이 슬며시 사라졌겠습니까.

그와 같은 살벌한 현상은 우리 주변에서도 다르지 않습니다.

인격 모독을 당한 아파트 경비원이 분신(焚身)자살한 사건이 있었습니다(dongA.com, 2014-11-08). 그 엄청난 비극적 사건의 중심에는 입주민의 언어폭력이 있었습니다. 부끄럽고 가슴 아프게도 이는 결코 드문 현상이 아닙니다. 저품격 사회이기에 발생할 수 있는 비극입니다.

●저품격 사회에서 ‘탈출’, 가능한가

그렇다면 국회의사당에서의 난잡한 언동이나 일반 사회생활 공간에서의 언폭(言暴) 현상을 제거할 수만 있다면, 우리도 분명 정화(精華)된 사회로 한 걸음 다가가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런 맥락에서 결국 ‘언어 품격’이 해결의 중심에 있다고 믿습니다.

언어는 개인이 발현하는 품격의 결정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습니다. 필자는 프랑스 군대나 독일 군대에서 가장 큰 변혁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을 겪은 프랑스와 독일은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군영 언어’에 획기적인 행정 조치를 취한 바 있습니다. 바로 영내에서 ‘반말 쓰기’를 엄격하게 금한 것입니다.

잘 알려진 대로 우리 한글처럼 두 나라 언어에도 높임말 <당신> [Vou(佛), Sie(獨)]과 낮춤말 <너> [Tu와 Du]가 널리 쓰입니다. 그러나 두 나라에서는 군영 언어로 높임말[敬語]만을 허용합니다.

만약 장교가 일반 병사에게 존댓말을 하지 않으면 무거운 군법회의에 부쳐집니다. 한 예로 고향 친구들이 군대에서 만났는데, 한 명은 장교이고 다른 한 명은 부사관이라면, 제삼자가 있는 곳에서는 무조건 높임말로 서로 소통해야 합니다. 물론 제삼자가 없는 곳에서는 낮춤말로 정답게 대화할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 국군이 크게 참작할 대목이 아닌가 싶습니다.

국내 부대에서 자살 같은 불행한 사건이 발생하면, 군영 시설 개선이 일차적인 대처 방안으로 언급되곤 합니다. 그 결과 군대의 복지 시설이 많이 개선되었다는 홍보까지 합니다. 물리적 접근 방식의 범주를 못 벗어난 사례입니다.

그러나 군대에서의 자살 사고는 다분히 정신적인(Mental) 결과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울러 이는 군영에서 사용하는 언어와 무관하지 않다는 게 필자의 생각입니다.

(참조: ⌈말(言)의 ‘갑질’ 사라져야 (<바른소리 쓴소리> 2018.04.27.)⏌에서 기술한 내용과 겹치는 부분이 있다)

언제인가, 필자는 젊은 간호 장교가 나이 든 사병에게 반말하고, 훨씬 나이 많아 보이는 사병은 존댓말로 응답하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몹시 불편했습니다. 민망함을 넘어 군영 언어의 ‘인권화’가 절실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군 복무 기간에 사회 언어 개혁의 기회가 있다

필자가 군영 언어에 관심을 두는 것은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절대 짧지 않은 시·공간을 군영에서 생활하기 때문입니다. 군 복무기간에 ‘존경어 사용’을 일상화하면, 퇴역 후 사회 각 분야에서 종사할 때 존경어 사용이 자연스레 생활화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 사회의 품격을 한결 높이는 데 크게 이바지할 기회입니다.

언어학자들은 누군가를 꾸지람할 때 존경어로 시작하면, 고성이 오갈 가능성을 현격히 낮출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한국사회의 차별과 억압》, 최봉영, 지식산업사, 2005.) 언어의 무게를 깨닫게 하는 대목입니다.

존경어가 없는 영미권에서는 선생이 어린 학생에게 엄한 메시지를 전하려면, 이름이 아닌 성을 먼저 ‘정중하게’ 거명합니다. 예를 들면, 초등학교에서 ‘Frank Schmidt’에게 꾸지람을 하려면, 평상시 ‘Frank’라고 부르다가도 ‘Mr. Schmidt’로 호명하는 식입니다. 그러한 언어 관습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점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반세기를 돌아보면, 우리 사회는 시민의 복지권이 생각보다 빠르게 그리고 폭넓게 상승해왔습니다. 그래도 더 발전해야 할 면면이 많습니다만, 특히 물리적 발전에 비하면 아직도 수치화하기 어려운 소프트웨어에서는 거리감이 존재합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언어의 복지’ 아닌가 싶습니다.

필자는 군영에서 존경어 언행을 생활화한 장병이 우리 사회의 주축이 되는 날, 오늘날 국회의사당에서 일고 있는 괴이한 관행은 설 자리를 잃고 말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언어 품격을 높였기 때문에, ‘현대판 저주의 굿판’ 같은 추태도 설 자리를 자연스레 잃고 말 것입니다. 군영에서의 존경어 시행은 시도할 이유와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굳게 믿어서입니다.

저작권자 © 데일리임팩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