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철순 데일리임팩트 주필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이 타계한 지 1년이 돼갑니다. 지난해 2월 26일 부음을 들은 그 시각에 나는 하필 당 시인 유상(劉商)의 ‘왕영을 보내며’[送王永]라는 시를 읽고 있었습니다.

그대 가고 나면 봄 산을 뉘와 함께 노닐까 君去春山誰共遊

새 울고 꽃 지는데 물은 하염없이 흐르네 鳥啼花落水空流

지금 냇가에서 그대를 보내노니 如今送別臨溪水

뒷날 그리우면 이 물가로 오겠네 他日相思來水頭

그 뒤 안타깝고 애도하는 마음에서 되지도 않은 붓글씨로 이 시를 써본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조선 중기의 서예가 황기로(黃耆老, 1521~1575)의 활달하고도 연면(連綿)한 초서를 보면 그저 기가 질리고 감탄만 하게 됩니다.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독창적 글씨라고 생각됩니다.

 유상의 시 '송 왕영(送 王永)'을 쓴 황기로의 초서 작품.
 유상의 시 '송 왕영(送 王永)'을 쓴 황기로의 초서 작품.

일반인들에게는 덜 알려졌지만 이어령 장관의 호는 능소(凌宵)입니다. 능소 선생의 타계 후 인터뷰와 강연내용을 수록하거나 직접 쓴 글 등 많은 책이 여러 출판사에서 나왔습니다. 특히 2019년 10월부터 타계 한 달 전인 2022년 1월까지 생명과 죽음에 관한 생각을 자유롭게 적은 노트를 원문과 함께 공개한 ‘눈물 한 방울’이 인상적입니다.

더러는 그림을 곁들인 110편의 짤막한 글을 이어령은 낙서(落書)가 아니라 승서(昇書)라고 했습니다. 버릴 글이 아니라 내면에서 솟아오른 글이라는 뜻이지요.  “물음표와 느낌표 사이를 쉴 새 없이 오간 게 내 인생”이라고 말하는 그는 호기심을 품고 삶의 진실을 탐구하고, 의문이 풀릴 때 크게 감탄하며 살아온 분입니다. 육신의 괴로움과 불면 속에 죽음과 마주한 밤의 기록, 생명과 인간의 삶을 응시하는 낮의 기록을 읽으면서 그 기간에 그분의 고통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살아온 내가 죄송했습니다.

 이어령의 '눈물 한 방울'과 맞춤법 스트레스를 언급한 2021년 12월 30일의 메모.
 이어령의 '눈물 한 방울'과 맞춤법 스트레스를 언급한 2021년 12월 30일의 메모.

특히 인상적인 것은 타계 50여 일 전인 2021년 12월 30일 아침의 메모입니다. “이제 떠납니다”로 시작해 “안녕”으로 끝나는 이날의 기록에 “내 낙서도 여기에서 끝이 납니다. 맞춤법 스트레스에서 벗어납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걸 보고 놀랐습니다. 이미 20대에 대가가 됐고, 구십 가까운 평생에 깊은 통찰이 담긴 온갖 글과 말을 쏟아놓으며 하고 싶은 일을 다한 것 같은 분도 맞춤법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살았다니! 글을 지우고 다시 쓴 게 순전히 생각을 수정한 것만이 아니라 맞춤법을 바로잡은 부분일 수 있다는 짐작도 하게 됐습니다.

다산 정약용의 ‘노인일쾌사(老人一快事)’라는 시도 생각했습니다. 이가 빠지니 치통이 없어졌다는 등 늙어서 좋은 것 여섯 가지를 차례로 읊은 이 연작시의 다섯 번째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늙은이의 한 가지 유쾌한 일은/붓 가는 대로 미친 말을 마구 쓰는 것/경병에 굳이 구애될 것 없고/퇴고도 꼭 오래 할 필요가 없네.”[老人一快事 縱筆寫狂詞 競病不必拘 推敲不必遲]

여기 나오는 경병(競病)은 시를 짓는 데 어려운 운자(韻字)를 사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중국 양(梁) 나라 조경종(曹景宗)이 개선할 때 양무제가 잔치를 베풀고 시를 쓰게 했는데, 험운(險韻)인 경 병 두 자만 남았으나 맨 마지막에 참여한 조경종은 막힘없이 바로 시를 지어냈다고 합니다. 그 뒤 경병은 운(韻)과 격에 맞게 시를 짓는 것의 어려움을 상징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다산은 이제 늙었으니 ‘시의 맞춤법’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게 됐다고 읊은 것입니다.

이어령과 다산 같은 천재들도 그러한데, 율격과 규칙을 지키며 글을 쓰는 일이 일반인들은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특히 우리글의 맞춤법은 제대로 알기가 어렵고 왜 그런지 납득이 안 되는 게 많습니다. 최근 인터넷에 올라온 어떤 사람의 글을 보니 부부간은 붙여 쓰지만 가족 간은 띄어써야 하고, 야구팬은 붙여 쓰지만 축구 팬은 띄어써야 맞는다니 대체 그 이유가 뭘까요? 이상규 전 국립국어원장도 언젠가 “띄어쓰기, 나도 자신없다”고 할 만큼 어려운데, 실은 띄어쓰기만 어려운 게 아니라 붙여쓰기도 어렵습니다.

혼란스러운 우리 띄어쓰기에 대한 불평. 여기 거론한 사례는 다 맞는 것일까.
혼란스러운 우리 띄어쓰기에 대한 불평. 여기 거론한 사례는 다 맞는 것일까.

“나 너 안 본 지 두 달 다 돼 감”, 이 문장의 정확한 띄어쓰기에 대한 국립국어원의 답변은 이렇습니다. “단음절 단어가 연이어 나타날 적에 붙여 쓸 수 있다는 규정이 있기는 하나 모든 상황에서 붙여 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일단 세 개 이상의 단어를 붙여 쓰는 것은 적절하지 않으며 의미적으로 자연스럽게 한 단위를 이루는 경우에만 붙여 씀이 허용됩니다. 따라서 '두 달'이나 '돼 감' 정도를 붙여 쓸 수는 있겠으나 다른 단어들을 붙여 쓰는 것은 허용되지 않겠습니다.” 그러니까 “나 너 안 본 지 두달 다 돼감”은 가능하다는 이야기인데, 두 달을 어떻게 붙일 수 있는지 나는 이해가 안 됩니다. ‘살아 있다’도 ‘살아있다’와 ‘살아 있다’, 두 가지 다 가능하다니 오히려 더 헷갈립니다.

최대한 규정대로 따르기는 해야 하겠지만 의문이 생기고 납득되지 않는 부분은 조속히 해결해주면 좋겠습니다. 한글은 세계적으로 배우기 쉬운 글자입니다. 그러나 한글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규정한 맞춤법은 배우고 가르치기가 쉽지 않습니다.

글을 다루는 나도 이러니 일반인들의 불편과 고통은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나도 맞춤법 스트레스에서 벗어나면 좋겠습니다. 메일이나 문자, 카톡을 보내는 사람들이 나 때문에 맞춤법 스트레스를 받는 것도 원치 않습니다. 내 직업상 남의 글을 보고 다듬는 경우는 어쩔 수 없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남의 글에 대해 왈가왈부, 시비를 가리는 일을 삼가려 합니다.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남의 티끌을 들추는 경우가 점점 늘어나는 것 같아 이런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1주기를 맞으면서 이어령 선생의 천상 안식과 명복을 다시 간절하게 빕니다. 세월은 빠르지만, 그의 타계가 여전히 아쉽고 안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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