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호 논설위원, 서울시립대 명예교수(도시설계)

김기호 논설위원
김기호 논설위원

목욕탕은 특별한 목적을 위해 지어지는 건물이기에 그 건물 형태나 공간 구조가 독특하다. 특히 대중목욕탕은 대체로 주거지 중심에 위치하고 높은 굴뚝도 있어 어디서나 잘 보이는 동네 랜드마크이며 마을 공동생활의 중심시설이기도 하다. 이용자가 어린이부터 어르신까지 말 그대로 남녀노소 모두라서 어느 동네나 ‘○○탕’하면 대체로 모르는 사람이 없는 경우가 많다.

동네 목욕탕(왼쪽). 근처 슈퍼, 정육점 등과 마당(길)을 공유하며 작은 동네 중심을 형성한다. 높은 빨간 벽돌 굴뚝과 온천탕 표시로 동네의 랜드마크가 된다. 서울 동대문구 휘경동 평안탕. 평안탕은 벌써 철거되고 다세대주택이 들어섰다. 사진: 김기호, 1997.
동네 목욕탕(왼쪽). 근처 슈퍼, 정육점 등과 마당(길)을 공유하며 작은 동네 중심을 형성한다. 높은 빨간 벽돌 굴뚝과 온천탕 표시로 동네의 랜드마크가 된다. 서울 동대문구 휘경동 평안탕. 평안탕은 벌써 철거되고 다세대주택이 들어섰다. 사진: 김기호, 1997.

집 화장실에 딸린 옹색한 욕조보다 대중목욕탕에서 목욕하는 것은 여러모로 이점이 많다. 우선 넓어서 온탕, 냉탕이나 사우나실 등 이리저리 움직이며 목욕할 수 있어 지루할 사이가 없다. 물바가지로 머리부터 몸 전체에 마음대로 물을 쏟아부을 수 있는 호쾌함도 있다. 거기에 좀 규모 있는 곳은 찜질방이나 다양한 오락시설과 식음료서비스까지 더해지니 그 편리함이 이를 데 없다. 많은 서민들이 가까운 곳에서 쉼과 만남과 즐거움을 가질 수 있는 유용한 시설로 한때 크게 명성을 떨쳤다.

그러나 지난 20여 년 사이 단독주택들이 다세대, 다가구 주택(공동주택)으로 변하고 집집마다 욕조나 샤워실이 들어서면서 목욕탕은 점점 그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더하여 사람들의 생활도 빠르게 개인생활 위주로 바뀌면서 대중목욕탕 같은 마을 공동시설에 대한 수요도 급히 감소하고 있다. 세태의 흐름을 역행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동네에서 작은 랜드마크가 사라지고 또 동네 공동생활의 한 부분이 없어지는 것이 대중목욕탕을 즐겨 찾는 어르신들로서는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다. 점점 마을이 공동체가 아니라 모래알같이 개인들이 모인 곳으로 되어 가는 것에 대하여 전문가들도 우려하기는 마찬가지다.

몇 년 전 청주의 한 목욕탕(학천탕)을 방문하면서 나는 목욕탕의 새로운 가능성을 엿보았다. 도심의 유수한 목욕탕이 결국 문을 닫게 되었는데 철거해 버리지 않고 여러 층에 걸쳐 카페 등 다른 형태의 만남의 공간이 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기능이 바뀌었지만 목욕탕 외관뿐 아니라 내부의 탕이나 수도, 거울, 옷장 등을 유지하면서 재치 있고 유머 있게 카페의 한 부분으로 디자인되고 재사용되고 있는 점이다.

한편으로는 예전 목욕탕을 보여주는 박물관 같은 느낌을 주면서 목욕 대신에 커피나 맥주 등을 제공하여 사람들이 만나는 커뮤니티 공간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나이 든 사람들에게는 커피를 마시며 목욕탕이라는 공간 구성과 소품을 새롭게 보고 사용하는 진기한 경험을 제공하며 목욕탕을 경험해 보지 못한 젊은이들에게는 예전 부모들의 목욕문화를 부분적으로나마 체험해 보며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목욕탕의 변환과 재이용. 물을 뺀 탕 속에 테이블이 놓이고 손님들은 신 벗고 들어가 앉아 커피와 담소를 즐긴다. 청주 학천탕. 사진: 김기호, 2019.
목욕탕의 변환과 재이용. 물을 뺀 탕 속에 테이블이 놓이고 손님들은 신 벗고 들어가 앉아 커피와 담소를 즐긴다. 청주 학천탕. 사진: 김기호, 2019.
탕 속에서 쉬는 사람의 모습을 한 찻잔 속 티백(tea bag)이 유머러스하게 장소의 역사성을 암시한다. 청주 학천탕. 사진: 김기호, 2019.
탕 속에서 쉬는 사람의 모습을 한 찻잔 속 티백(tea bag)이 유머러스하게 장소의 역사성을 암시한다. 청주 학천탕. 사진: 김기호, 2019.

최근에 손녀가 보는‘장수탕 선녀님’(백희나 글, 그림)이라는 그림책과 뮤지컬 이야기를 듣고 나는 또 다른 목욕탕을 만나게 되는 즐거움을 맛보았다. 엄마를 따라 억지로 목욕탕에 간 여자 어린이가 냉탕에서 놀다 할머니 선녀를 만나 신나게 놀고 친해지며 때밀이 아픔을 감수하고 엄마에게서 받은 요구르트를 선사하고 우애를 나누는 이야기다. 뮤지컬 공연은 한 시간 정도 되는데 세 살배기 우리 손녀는 물론 많은 어린이들이 제법 긴 시간을 조용히 초집중하였다고 한다. 한편으로 선녀를 도시 내 목욕탕으로 불러들인 작가의 상상력에 감탄하며 다른 한편 아이들에게 생소한 목욕탕이라는 공간이 이렇게 아이들을 즐겁게 하는 이야기의 무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되었다.

‘장수탕 선녀님’ 뮤지컬 입장 전 관객들의 흥미와 이해를 돕기 위해 설치한 목욕탕 시설과 주인공인 ‘할머니 선녀(우측)’와 여자 어린이(좌측). 관객이 들어가서 사진을 찍을 수 있다. 사진: 김민수, 2023.
‘장수탕 선녀님’ 뮤지컬 입장 전 관객들의 흥미와 이해를 돕기 위해 설치한 목욕탕 시설과 주인공인 ‘할머니 선녀(우측)’와 여자 어린이(좌측). 관객이 들어가서 사진을 찍을 수 있다. 사진: 김민수, 2023.

우리는 이후 바로 손녀를 데리고 대중목욕탕으로 목욕을 갔다. 할머니와 함께 여탕으로 갔기에 나는 아쉽게도 전해 듣기만 했지만 손녀의 목욕탕 체험기는 놀라움과 즐거움 그 자체였다. 처음인데도 손녀는 전혀 목욕탕에 대해 어색해하지 않고 신나게 목욕탕 내를 달리며 때밀이, 요구르트 등을 이야기하고 나아가 전혀 겁내지 않고 탕 안으로 쏙 들어갔다고 한다. 그날 내 아내는 졸지에 할머니 선녀가 되었다.

이 같은 목욕탕의 변환과 재해석을 보며 나는 은근히 이를 통해 젊은이나 어린이들이 목욕탕과 좀 친해져서 그에 따라 목욕탕이 쉽게 없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엉뚱한 꿈을 꾸었다. 다만 한 가지 걱정은 할머니 선녀가 나타날 수 없는 남탕에는 손자 녀석들을 위해 뭔가 대책이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다음에는‘할아버지 산신령님’이 금도끼라도 들고 나타나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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