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찬국 논설위원, 전 충남대 무역학과 교수

 

허찬국 논설위원
허찬국 논설위원

정부 간섭 축소로 경제를 활성화시킬 것이라고 목소리 높이던 정부가 올 상반기 공공요금 동결을 강하게 주문하자 임박했던 인상이 무산됐다. 원유·가스 등 에너지 가격 상승으로 적자가 커져 요금 인상이 불가피하다던 공기업, 지자체 등 서비스 공급자들은 꿀 먹은 벙어리 신세다. 방송에서 본 어느 전문가는 “이제 연내 공공요금 인상은 물 건너갔다”고 한다. 올 하반기는 내년 봄 총선이 너무 가까워 각종 공공요금이 한꺼번에 큰 폭으로 오르면 민심이 나빠지고 선거의 악재가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내년 총선이 끝난 후나 되어야 인상이 가능하게 된다는 말이다.

23일 열리는 한은의 금통위가 금리를 인상하지 말도록 눈치를 주고 있다. 최근 경제부총리가 한은 총재보다 더 적극적으로 물가 안정을 강조하는 듯하다. 정부의 경제부처가 우리의 경기가 부진한 국면에 접어들었다고 발표한다. 정부가 공공요금 억제 등을 통해 물가를 잡을 테니 한은은 민생에 부담이 되는 금리 인상을 자제해달라는 것이다. 물가와 금리 상승에 따른 민생 부담은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만약 국제 원자재 가격 등 여건이 연내 개선되지 않는다면 자칫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아야 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어 걱정된다.

20년 전쯤 한국은행이 목표로 삼는 물가에 공공요금을 포함하지 말아야 된다는 글을 쓴 기억이 난다. 우리나라처럼 정부가 관리하는 ‘공공요금’이 거의 전무한 미국에서 10년 넘게 중앙은행 연지준에서 이코노미스트로 근무하다 한국에 온 터였기에 중앙은행이 통화정책을 통해 간접적으로 관리하는 대상인 물가목표에 정부가 관리하는 공공요금을 포함하지 않아야 된다는 논리였다. 소비자물가지수(CPI)를 통화정책의 성과를 엄정하게 평가하는 성과 지표로 삼는다는 이 논리는 지금도 유효하다. 동시에 꽤 긴 시간이 흘렀음에도 ‘물가관리’를 둘러싼 여건이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아 아쉽다.

한국 경제가 빠르게 성장했던 1980년대까지는 인플레이션이 높아 가격통제가 물가관리의 단골 정책이었다. 과거 대표적 서민 음식 짜장면 가격을 묶었던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회고하는 기사를 보면 중국음식점들이 원가상승 압력을 못 견뎌 짜장면값을 기습적으로 올리자 정부는 대규모 위생 감찰로 군기를 잡았다고 한다. 새로운 종류의 품목으로 가격통제를 피하려는 동기가 짜장면 종류가 많아지는 데 중요하게 작용했다 한다.

통화가 크게 늘면 물가가 오른다는 인식이 자리 잡은 후 선진국에서 물가관리는 중앙은행의 몫이다. 하지만 우리의 경우 고도 성장기에 정부 지출이 많고, 육성 대상 산업분야에 정책대출이 늘어났는데 중앙은행의 역할은 물가관리라기보다 필요한 곳에 자금을 공급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경제가 발전하며 점차 세태가 바뀌었고, 특히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정부가 주도하는 경제 운용방식이 위기를 막는 데도 실패했다는 국내외의 혹평에 관치가 후퇴했다. 물가관리도 직접적인 통제가 줄어들고 한국은행의 역할과 위상이 높아졌다.

그런데 최근 상황은 이명박 정부(2008년 2월~2013년 2월) 때 한 번 본 듯한 영화다. 당시 7%의 높은 성장률 목표를 포함한 ‘747 공약’을 내세우며 호기롭게 출범했으나 첫해 미국의 주택금융시장 붕괴로 촉발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충격, 그리고 환율과 국제 원자재가격 상승으로 물가압력에 직면했다. 아래의 전년 동분기 대비 증감률 그림에서 보듯이 당시 국제 원자재가격을 반영하는 생산자물가가 크게 오르며 소비자물가를 끌어올렸다.

물가가 오르자 생필품 52개를 선정해 특별 관리에 나섰고, 어떻게든 한은의 금리 인상을 막고자 했다. 대표적인 에피소드가 2010년 당시 기획재정부 차관이 한은의 금통위에 참석한 일이다. 정책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행사한 적이 없었던 ‘열석 발언권’을 행사한 것인데, 전례 없는 저돌적인 행보여서 설왕설래가 많았다.

 2001년 1분기~2022년 4분기 생산자물가(PPI)와 소비자물가(CPI) 전년 동기 대비 증감률(단위 %).
 2001년 1분기~2022년 4분기 생산자물가(PPI)와 소비자물가(CPI) 전년 동기 대비 증감률(단위 %).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작년부터의 물가상황은 이명박 정부 초기를 연상시킨다. 우크라이나 전쟁 등의 외부 요인, 에너지 가격 상승에 의한 물가상승 압력이 대부분 주요국에서 목격되었다. 소비자물가 상승세가 우리보다 훨씬 더 가시적인 미국에서는 연지준이 공격적으로 금리 인상을 지속하고 있다. 국내 물가상승과 미국과의 금리 차가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한은도 2020년부터 금리를 계속 인상하고 있다. 2021년까지 과열이 우려되던 부동산 시장이 얼어붙고, 자영업자 대출 상환부담이 느는 등 높아진 금리의 영향이 가시화되고 있다.

이런 마당에 정부로서는 한은이 금리 인상을 멈추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사정이 딱하다. 하지만 만약 원유가 등 원가 상승요인이 올해 중 하락 반전하지 않고 더 오른다면 공공요금을 내년까지 묶는 것이 ‘언 발에 오줌 누기’가 될 수 있다. 서비스 공급자들의 적자는 더 커지게 된다. 최근 미국의 물가 상황이 크게 개선되지 않았다는 평가가 나오며 금리 인상이 예상을 넘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한미 간 금리 차가 너무 커지면 원화 환율가치가 떨어지며 수입물가가 올라 물가에 악재가 되고, 자본유출을 야기할 수 있다. 공공요금을 부분적으로 인상하고 취약계층을 중심으로 보조금을 대폭 지원하는 것도 현실적인 방안이 될 것이다.

끝으로 정상적 인상요인이 있을 때 시의적절하게 이를 반영하는 것이 중요하다. 물가상황이 양호하여 공공요금을 적절히 나누어 올릴 수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이를 미룬 문재인 정부의 행보는 상당히 유감스럽다. 필요한 조치를 지연시키는 인기영합적인 정부를 뽑으면 나중에 청구서가 온다는 교훈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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