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정일 신구대 원예디자인과 교수

전정일 교수
전정일 교수

가끔 가는 시골 마을에 큰 상수리나무가 있다. 어느 날 문득 잎이 다 떨어진 나무 높은 가지를 올려다보았더니 뭔가 까치둥지 같은 것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나무가 녹색 잎을 달고 있을 때는 보이지 않던 것이 잎이 다 떨어진 겨울을 지나면서 드러나기 시작했다. 식물을 조금 공부한 티를 내듯이 직감적으로 겨우살이라는 이름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겨우살이’란 이름은 말 그대로 겨울에도 살아있다는 뜻이다. 겨울에도 녹색 잎을 달고 있는 상록성인 특징을 보고 옛날 사람들은 ‘살아있다’라고 여겼으리라. 사실 이제는 모두가 알고 있어 새삼 언급할 필요는 없겠지만, 녹색 잎을 달고 있는 상태만이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잎을 떨군 나무도 살아있는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겨우살이는 식물분류학적으로는 꽃식물 중 쌍떡잎식물 단향목에 속하는데 살아가는 방법이 독특하다. 보통 식물처럼 땅에 뿌리를 내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식물의 몸체에 뿌리를 내려 그 식물로부터 물과 양분을 뽑아 먹고 살아가는 기생식물이다. 물론 삶을 온전히 숙주 식물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잎과 가지에서 광합성을 해서 필요한 에너지원을 스스로 만들어 쓴다.

겨우살이는 다른 나무들에 기생하지만, 삶의 과정 일부를 새에 의존하는 측면도 있다. 새가 겨우살이 열매를 먹고 다른 나무의 나뭇가지에다가 똥을 싸면 거기서 새싹이 자라는 것이다. 겨우살이 열매는 아주 끈적해서, 새가 씨앗이 들어 있는 똥을 나뭇가지에 비벼야만 떨어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씨앗이 나뭇가지에 붙게 된다. 겨우살이 씨앗은 나뭇가지가 아닌 곳에서는 다른 식물처럼 발아까지는 하지만 제대로 생육하지 못한다. 이 과정에서도 기생식물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한편 새의 입장에서는 먹을 것을 얻을 수 있으니 겨우살이는 새와 공생한다고 할 수 있겠다.

사실 기생식물 종류에 겨우살이만 있는 것은 아니다. 겨우살이는 앞에서 보았듯이 숙주 식물로부터 필요한 모든 것을 얻어오지는 않는다. 이런 면에서 겨우살이는 ‘반(半)기생식물’이라고 부른다.

또 다른 기생식물로 ‘새삼’이라는 식물이 있는데 겨우살이와 달리 숙주 식물 입장에서는 정말 끔찍한 식물이다. 겨우살이가 숙주 식물로부터 필요한 물과 양분을 가져오는 양이나 방식은 숙주 식물의 생장에 큰 피해를 가져올 정도는 아니다. 가져오는 물과 양분의 양은 숙주 식물이 가진 전체 양에 비하면 극히 일부이며 가져오는 방식도 뿌리를 숙주 식물 몸체에 빨대처럼 넣는 방식에 불과하다.

  겨우살이(왼쪽)와 새삼. 같은 기생식물이지만 기생 방법이 전혀 다르다. 
  겨우살이(왼쪽)와 새삼. 같은 기생식물이지만 기생 방법이 전혀 다르다. 

반면에 새삼의 특징은 광합성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물과 무기양분, 에너지원인 영양분까지 모두를 숙주 식물로부터 빼앗아 자라는 ‘전(全)기생식물’이다. 더구나 새삼은 숙주 식물의 모든 것을 빼앗는다고 할 정도로 숙주 식물에 심각한 피해를 초래한다. 우선 숙주 식물의 줄기에 자기의 줄기를 칭칭 감고 그 닿은 면 전체에서 촘촘하게 빨대를 뻗어 숙주 식물로부터 모든 것을 빨아낸다. 이렇게 새삼이 감은 숙주 식물의 줄기는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다. 이렇게 볼 때 겨우살이와 새삼은 기생하는 정도의 등급이 다르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최근에 밝혀진 기생식물의 또 다른 측면이 충격을 준다. 새삼을 포함한 여러 기생식물이 숙주 식물로부터 물과 양분과 같은 물질만 빼앗는 것이 아니라, 숙주 식물의 유전자까지도 훔친다는 것이다. 이렇게 훔친 유전자를 기생식물이 자신의 진화에 활용한다는 것이다. 사람으로 보면 돈만 빼앗는 것이 아니라 영혼까지 빼앗아 파멸에 이르게 하는 정도라고 할 수 있겠다.

사람 사는 세상에서도 식물 세상의 기생식물과 같은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이 역사책에 심심치 않게 등장하지만, 오늘날 점점 더 많아지는 것 같다는 느낌은 나만의 생각일지도 모르겠다.

콩밭에 새삼이 자라기 시작하면 제거하기가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다. 인간 세상에서도 그런 사람들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없앨 수 없다면 새삼과 같이 심각한 기생식물보다는 기생의 정도가 약한 겨우살이 같은 사람들만 남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겨우살이라는 이름의 유래가 ‘겨울에도 잘 살아가는 식물’이라는 뜻 외에 ‘겨우겨우 근근이 기생하여 살아간다’라는 의미도 있다는 것을 떠올려본다.

기생식물 같은 어떤 사람들이 우리들의 영혼, 유전자까지 훔쳐가지는 않는지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겠다. 그렇게 해서 그들을 없앨 수는 없겠지만 ‘겨우겨우 살아갈 정도’만큼으로 조절할 수 있으면 좋겠다. <다음 글은 3월 2일에>

약력=1969년 강원 원주 출생. 서울대 임학과 학사 석사 박사. 식물분류학 및 수목학 전공. 서울대수목원 연구원, 중국 남경식물연구소・식물원 교환연구원을 거쳐 2001년부터 신구대 교수로 재직. 신구대식물원 원장 역임. 저서: 길에서 만나는 나무 123, 자연 자원의 이해(공저), 세계의 식물원 산책(공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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