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훈 논설위원, KBSI 분석과학 마이스터

이석훈 논설위원
이석훈 논설위원

2020년에 우리나라는 GDP 1조 806억 달러인 세계 10위 경제 강국으로 도약했다. 인터넷 천국으로 세계인의 부러움을 사는 첨단문화가 생활 속에 자리 잡고 있다. 1965년 GDP 31억 달러로 세계 최빈국이었던 이 나라가 반세기 만에 선진국 반열에 진입할 수 있었던 것은 수많은 산업 근로자들이 흘린 피와 땀의 결과이지만, 과학기술이 대한민국 발전의 초석이 되었음은 그 누구도 부정하진 못할 것이다.

과학기술의 불모지였던 이 땅에 1965년 우리나라 최초의 과학기술분야 정부출연연구소(이하 출연연)인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가 설립된 이후, 현재 28개로 늘어난 출연연은 선진기술 추격과 원천기술 개발을 통해 후진국에서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원동력이 되어왔다. 우리의 삶을 변화시킨 대표적 성과를 보면 컬러TV 수상기 국산화(‘73), 섬유의 혁명을 가져온 폴리에스터필름 국산화(‘78), 1가구 1전화 및 전국 전화 자동화를 실현한 TDX교환기 국산화(‘78~‘86), 세계 반도체 시장의 주도권 확보 기반이 된 DRAM 개발(‘86~‘93), 국내 산업경제의 획기적 전환을 가져온 코드분할다중접속(CDMA) 세계 최초 상용화(‘89~‘96), 전국을 반나절 생활권화한 한국형 KTX(‘03), 초고속 휴대인터넷 및 지상파 DMB를 실현한 WiBro(‘04)와 3.6 Gbps 4세대 무선전송시스템 NoLa (‘07) 세계 최초 개발, 탄소제로 시대 전력 생산의 대체 불가인 스마트원자로 개발(‘14), 우주시대를 열어준 한국형발사체 누리호 발사(’11~‘22) 등이 있고, 한정된 화석연료의 대안인 핵융합에너지로 개발(’05~ ) 등 세계 선도적인 연구개발이 진행 중이다.

이 바탕에는 자원이 부족한 우리나라가 글로벌 경쟁력을 갖기 위해서는 우수인력을 통한 국가과학기술 지식재산 창출이 유일한 해답임을 역대 정부 인사들이 인식했고 과학기술 연구개발에 많은 투자를 해왔음을 국제적인 평가기관의 보고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2021년 블룸버그 혁신지수(BI) 세계 1위, 유럽혁신지수(EIS) 글로벌 경쟁국 중 1위, 국가과학기술혁신역량평가(COSTII) 5위, 세계지식재산기구(WIPO)의 세계혁신지수(WII) 5위로 최상위 수준의 과학기술 토대를 확보하고 있다.

또 GDP 대비 정부연구개발예산 1위, GDP 대비 총연구개발투자비 2위 및 연구개발투자 총액 4위로 국가연구개발 투자 비중이 높고, 인구 만 명당 연구원 수 1위, 총연구원 수 4위 등 비교우위의 과학기술인프라를 기반으로 연간 특허 수 4위, 최근 10년간 특허 수 5위, 과학분야 SCI논문 수 10위 등 연구개발의 양적 성과는 매우 우수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2021년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IMD)의 발표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과학경쟁력 2위, 기술경쟁력 17위임에도 국가경쟁력은 63개국 중 23위이고, 2022년엔 27위로 4단계 하락해 과학기술 혁신역량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우수한 과학기술 인프라에도 불구하고 인구 대비 이공계 박사 비중 21위, 연구개발투자 대비 기술 수출액 비중 30위, 연구원 1인당 SCI논문 수 및 인용도 33위로 질적 성과는 미흡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법·제도적 지원 정도 23위(10년간 24~26위), 교육방식에서의 비판적 사고 장려 정도 31위(최근 3년 30~31위), 법적 환경이 기술개발 및 응용을 지원하는 정도 44위로 법률과 제도가 과학기술 혁신을 뒷받침하지 못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특히 공무원 의사결정의 편파성 80위, 정치인의 신뢰성 97위 및 정부 정책 결정과정 투명성 123위로, 정부 규제 및 관료 간섭이 국가경쟁력 향상의 최대 장애 요인이 되고 있다.

지난 1월 30일 기획재정부 장관 주재 공공기관운영위원회에서 347개의 공공기관 지정과 함께 연구기능과 고등교육 기능을 동시에 가진 기관의 특수성을 반영하여 4대 과학기술원(KAIST, GIST, DGIST, UNIST)을 공공기관에서 해제했다. 10여 년 동안 공공기관 지정 해제를 촉구해왔던 출연연으로선 공공기관 재지정에 따른 실망감과 더불어 연구 수월성 창출에 규제보다 자율성이 필요하다는 정부와의 공감대 형성으로 자율적 연구몰입 환경 조성에 대한 기대감이 공존하고 있다.

출연연은 2007에 제정된 ‘공공기관 운영에 관한 법률’(이하 공운법)에 따라 기타 공공기관으로 지정되어 공기업, 준정부기관 및 여타 기타 공공기관과 함께 경영 공시, 주무 부처의 경영평가, 정부의 공공기관 기능 조정 및 혁신 등을 통해 관리·감독을 받아야 한다. 즉, 공익적 속성이 큰 출연연이 인력 운영, 예산 집행 및 기관평가에서 시장성 중심인 강원랜드 등 다른 공공기관과 같이 관리되고 있다. 지난해는 새 정부 출범 때마다 연례행사처럼 진행되는 '공공기관 혁신가이드라인' 강제이행 요구로 기능, 조직·인력, 예산 및 자산 분야 칼질도 겪어야 했다.

또한 연구기관의 특성이 고려되지 않은 정규직 정원 관리와 총인건비 규제는 연구개발 전담기관으로서 우수 연구인력 확보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세계적인 연구역량을 가진 연구자의 위상에 맞는 처우가 불가능한 인건비 제한이나, 연구역량과 관계없이 일정 나이가 되면 임금이 삭감되는 정년연장 없는 임금피크제는 오히려 우수 연구인력의 대학 등 타 기관 유출을 부추겨 출연연의 연구 수월성을 가로막는 비현실적 정책이지만 여전히 강제되고 있다. 2016년 ‘알파고’가 주목을 받자 2020년까지 AI 1조 투자라는 계획을 밝히는가 하면, 최근엔 ‘양자’, ‘ChatGPT’ 사례와 같이 이슈가 있을 때마다 과제를 급조해 출연연에 내려보내는 것 또한 연구 자율성과 독립성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공운법에 따른 제한을 완화하고자 2019년 당시 출연연, 4대 과학기술원 등 75개 기관을 연구개발목적 기관(공운법 제5조 5항)으로 지정하였으나, 이후 시행령이 개정되지 않아 연구현장에서 실효성을 체감할 수 없었다. 다만 최근 규제혁신 차원에서 연구목적 기관에 대해 우수 연구자 확보를 가로막은 정책으로 규정한 ’블라인드 채용‘과 연구현장과 동떨어진 '고객만족도 조사'가 폐지되어 일부 완화됐지만, 공공기관 지정에 따른 근본적인 문제는 해소되지 않고 있다.

과학기술 강대국들은 연구개발의 창의성과 혁신역량이 연구 자율성에 있음을 일찍부터 인식하고, 정부예산이 투입되는 연구기관을 대상으로 정부의 간섭을 배제하는 자율적 연구환경에 대한 철학과 원칙을 100년 이상 고수해오고 있다. 영국은 1918년부터 ‘연구기금은 정치가가 아닌 연구자에 의해 결정되어야 한다.’는 홀데인원칙(Haldane Principle)을, 독일은 ‘지원은 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하르낙원칙(Harnack Principle)을, 미국은 프로젝트가 아닌 사람을 지원해야 한다’는 쇼팽(Choppin)의 과학기술 정책철학을, 일본은 기초과학 연구 강화를 위해 1917년 설립된 이화학연구소(RIKEN)가 독립행정법인으로 운영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보장받고 있다.

과학기술 분야 출연연은 국가 미래성장 동력 창출 및 국가적 난제 해결을 지향하는 연구기관이다. 연구자의 창의성과 자율성을 기반으로 도전적인 분야의 연구개발을 통한 연구 수월성을 추구하려면 우수 연구인력 확보와 자율적 연구환경 조성은 필수 조건이다. KIST 최형섭 초대 소장은 “연구 성공은 우수 연구자 확보에 달려 있으므로 이를 위한 연구 자율성 보장이 가장 중요하다.”는 최형섭 원칙을 적용하여 정부의 간섭이 최소화되도록 부처 직할 국립연구소가 아닌 출연연구소라는 제도를 도입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연구개발의 생명인 자율성이라는 철학이 퇴색되고, 정부의 직·간접적 간섭 및 통제, 법률·제도적 규제의 강화 등으로 자율적 연구환경은 오히려 악화되어 왔다.

신정부 들어 규제혁신위원회를 구성하고, 각계의 의견을 수집하여 규제혁신안을 만들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벤트성으로 용두사미가 되는 우를 범하지 않기를 바란다. 정부가 목표로 하는 과학기술 5대 강국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국가 과학기술의 핵심 주체인 출연연의 자율적 연구몰입 환경이 우선되어야 한다. 정부는 과학기술 연구개발 분야의 연구 수월성 창출을 방해하는 규제가 무엇인지 연구현장의 목소리에 더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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