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인희 논설위원,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함인희 논설위원
함인희 논설위원

대학가 교수 중 자칭 ‘구사일생파’가 있다. 1990년대 초반 대학평가가 시작될 무렵, 학생 수 대비 교수 충원율이 주요 평가지표로 부상함에 따라, 전국의 대학에서 신임교수를 대거 공채한 적이 있다. 1994년 운 좋게 교수로 임용된 이들이 스스로를 ‘구사(94)일생파’라 부르기 시작한 것이 원조라 한다.

올해는 구사일생파 중 ‘아기 풍년’(baby boom)의 정점에 태어난 58년 개띠들이 65세에 진입한다. 때맞춰 연금개혁도 손봐야 하고 정년연장도 도입해야 하고 지하철 무임승차제도 재고해야 한다는 논의가 고개를 드는 건, 한 해 무려 100만 명 이상 태어났던 신생아가 65세로 진입하기 시작했음과 무관하진 않을 것이다.

초등학생 시절 학급당 학생 수가 90명을 넘었던 기억, 3학년 때까지 오전반 오후반 2부제 수업을 했던 기억, 4학년 때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로 시작되는 국민교육헌장을 암기하던 기억 등을 떠올리자니, 새삼 58년 개띠들이 공유해온 지난 65년의 세월 속 비애가 슬며시 올라오는 듯하다.

58년 개띠는 흔히 ‘뺑뺑이 세대’로 불리는 연합고사 원년 멤버다. 고교 평준화를 기치로 고교 입시제도가 폐지됨에 따라, 연합고사를 치른 후 추첨을 통해 고등학교를 배정받았다. 당시만 해도 명문고 아우라(?)가 남아 있던 때라, 서울 시내에 있던 경기 서울 경복(남고), 경기 이화 숙명 진명(여고) 등은 공동학군으로 분류되었는데. 추첨 운이 좋았던 친구들에게는 명문고 진학의 기회가 주어졌고, 나머지 탈락한 친구들은 일반학군에 속하는 고등학교를 배정받았다.

한국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연결망은 남녀 공히 고등학교 동창이라는 연구 결과가 있다. 하지만 58년 개띠들은 뺑뺑이로 배정받은 고등학교에서 동창 대접도 못 받은 채 어정쩡한 사춘기 시절을 보내야 했다. 고교 평준화 이전 고등학교 교실은 1등과 꼴등이 친구로 어울릴 수 있는 분위기였지만, 뺑뺑이 세대의 고등학교 교실은 성적 상위권 학생과 하위권 학생은 물과 기름처럼 어울리기 어려운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58년 개띠의 대학 진학률은 지금의 절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할 만큼 저조했다. 그나마 예전엔 ‘명문고 상위 10%면 서울대’ 식의 예측이 가능했지만, 뺑뺑이 세대는 ‘맨땅에 헤딩하는 기분’으로 입학 원서를 써야 했기에, 대입 눈치작전이 그 어느 때보다 치열했다. 77학번 58년 개띠들의 대학생활은 행운의 숫자가 둘이나 겹쳤음에도 결코 순조롭지 않았다. 당시 대학은 1972년 선포된 유신헌법 철폐를 외치며 하루가 멀다하고 데모가 이어졌고 최루탄에 눈물 마를 날이 없던 시절을 지나고 있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이 발생했다. 위수령이 발동되었고 전국의 대학은 곧바로 문을 닫았다. 1980년 한국 정치에 봄이 오는가 했는데, 5월 18일 ‘광주사태’(당시 명칭)가 발발했다. 대학 문은 즉시 잠겨버렸고, 학기를 끝내지 못했던 학생들은 교수에게 과제를 우편으로 제출한 후 점수를 받는 전무후무한 경험을 했다. 5월 중순에 닫혔던 대학 문은 11월이 돼서야 열렸고, 대학 3학년 4학년이라는 황금 같은 시절은 허망하게 지나갔다.

77학번 남학생 중 다수는 데모하다 군대에 끌려가거나, 자진 입대를 했다. 58년 개띠들이 데모를 주도했던 당시엔 전대협도 없었고 주사파도 등장하기 전이었다. 후일 후배들로부터 ‘현실과 괴리된 낭만적 운동’에 머물렀다는 혹평을 받았다고 들었다. 세월이 흘러 386(60년대생, 80년대 학번으로 당시 30대) 운동권 세대가 정치권 세대교체를 부르짖으며 대거 정치권에 진입했을 때, 58년 개띠들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심정이 되어 상대적 박탈감을 아프게 느껴야만 했다. 누군가 58년 개띠 운동권에게 붙여준 이름은 ‘좌절한 진보주의자’였다.

그러고 보니 58년 개띠야말로 윗세대에게 눌리고 아랫세대에게 치이고만 “낀세대”의 전형임이 분명한 것 같다. 이제는 공짜 지하철 타면서 눈치 보다가, 국민연금 받으며 가슴 졸이다가, 정년이 지나도 버텨야 하는 건지, 행여 아들딸 일자리 빼앗는 건 아닌지 안절부절못하고 마는 건 아닐는지.

웃픈 반전이 기다리고 있다. 58년 개띠들은 연합고사 볼 때 체력장 시험도 함께 치렀다. 당시 대통령 아들 ‘박지만 군’이 운동을 워낙 잘해서 체력장이 도입되었다는 풍문이 떠돌아다녔다. 유신체제 덕분에 남녀 불문 고등학교 시절 교련 훈련에 매진했고, 대학 입학 후에도 남학생은 교련, 여학생은 체육을 필수로 이수한 덕분에 58년 개띠들은 남부럽지 않은 체력을 자랑하게 되었다. 그러니 연금개혁도 정년연장도 지하철 무임승차제 폐지도 ‘닥치면’ 거뜬히 돌파할 수 있는 저력을 보여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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