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낙 논설위원, 가천대 명예총장

이성낙 논설위원
이성낙 논설위원

근래 ‘슬리퍼 신은 기자’를 두고 언론에서 이러쿵저러쿵 떠들썩했습니다. ‘슬리퍼’가 문제가 아니고, 그 실내화를 신고, 공적 공간에 나타난 기자의 무감각증이 문제의 핵심이 아닌가 싶습니다.

즉, 신발과 슬리퍼가 어떻게 다른지 몰라서 생긴 해프닝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눈에 띄는 것은 슬리퍼를 신고 기자회견장에 나타난 기자의 옷차림은 흠잡을 수 없는 ‘정장’ 차림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일명 '슬리퍼 기자'. 구글 이미지.
일명 '슬리퍼 기자'. 구글 이미지.

1920~30년대 사진에서나 보듯이 중절모를 쓴 한 신사가 신발은 흰색 고무신을 신은 사진을 보는가 싶었습니다. 그래서 격식은 때와 장소에 맞지 않으면 촌스럽고, 거북스럽게 보일 수 있다고 하는가 봅니다.

그 본보기가 있습니다. 일본 아베 신조(安倍晋三, 1954~2022) 총리가 정장의 대명사인 연미복(燕尾服) 차림으로 실내화 없이 양말만을 신은 채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에서 활보하는 모습이 외신에 포착되어 가십거리가 된 적이 있습니다. 양말만 신은 총리의 발을 본다는 것은 서양 문화권에서는 생소한 일입니다. 바로 격식과 품격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고, 동양과 서양이 다른 시각을 가질 수 있는 이유입니다.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러 간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1954~2022)가 예복 차림에 실내화 없이 양말만 신은 채 입장하고 있다.  서유럽권에서는 눈에 거슬리는 일이었다.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러 간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1954~2022)가 예복 차림에 실내화 없이 양말만 신은 채 입장하고 있다.  서유럽권에서는 눈에 거슬리는 일이었다. 

그런 가운데, 프랑스 파리의 한 미술관 출입을 놓고 일어난 ‘신발 vs 슬리퍼’ 논쟁이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한국에서 온 숙녀가 미술관에 입장하려는데 미술관 직원으로부터 입장할 수 없다고 제지당했다고 합니다. 이유인즉슨 “슬리퍼를 신고는 입장할 수 없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숙녀는 당당하게 “이 신발은 바로 파리 여기에서 구매한 명품이다”라고 항변하듯 일갈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미술관 관리인은, “족부의 ‘뒤꿈치’가 보이는 신발은 ‘슬리퍼’로 분류된다”고 하였다 합니다.

작은 사건이 남긴 일화가 실내화인 슬리퍼와 보행용 신발 간의 선명한 선 긋기를 하였습니다. 즉 신발의 뒤축을 발꿈치로 눌러 신으면, 신발이 슬리퍼가 된다는 이치는. 우리가 마음에 담아야 할 작은 규범(Etiquette)입니다.

미국에서 젊은 시절을 보낸 저명인사와 슬리퍼를 두고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서구사회에는 슬리퍼가 없다고 하기에, 필자 역시 곰곰이 생각해보니 독일에 체류하는 동안 슬리퍼를 사들였거나 집안에서 사용한 기억이 없었습니다. 그만큼 슬리퍼가 넓게 사용되는 것은 아닌가 싶었습니다.

그러나 공처가(恐妻家)를 두고 영어권에서는 ‘Slipper hero(슬리퍼 영웅, 매 맞는 남편)’, 같은 의미로 독일어권에서도 ‘Panthoffelheld(슬리퍼 영웅)’라는 표현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예전에는 슬리퍼가 오늘날보다 흔히 볼 수 있었던 생활용품인가 싶다고 공감하였던 것이 생각납니다.

그런데, 멀쩡한 신발의 뒤축을 눌러 신어 ‘반(半) 슬리퍼’형 신발을 신고 온 동네는 물론 시내를 누비는 것을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습니다. 웬일인지 보기가 거슬립니다.

백화점의 ‘신발코너’에 진열된 실내화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전시된 상품이 실내용 슬리퍼입니까?, 실외 보행용입니까?”를 담당 직원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실내에서도 신을 수 있고, 실외에서도 신고 다닐 수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대답이 바로 작금의 우리네 거리풍경을 강변하고 있었습니다. 

 백화점 진열대에 놓여 있는 스칸디나비안 슬리퍼. 실내용이지만 보행용으로 신는 사람들이 있다. 
 백화점 진열대에 놓여 있는 스칸디나비안 슬리퍼. 실내용이지만 보행용으로 신는 사람들이 있다. 

서구인의 시각에서는 상기 ‘스칸디나비안 슬리퍼’는 분명 실내화, 즉 문밖에 나와서는 안 되는 신발입니다. 소소한 ‘구두 신기’에도 ‘때와 장소’가 있는 것입니다. 품격은 항상 규정의 준수와 함께합니다.

문득 생각납니다. 1960년대 중반 일본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1918~1993) 총리가 일본인의 해외여행 자유화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들고 나섰습니다. 이젠 일본도 풍요를 누릴 만큼 되었으니 삶을 즐기고 누려야 한다며, 해외여행을 권장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결과, 일본 여행객이 유럽의 명소로 쏟아져 들어왔는데 그 바람은 참으로 거셌습니다. 단체로 일본 대학생을 태운 대형버스가 지나가며 일장기와 어느 대학교 학생이 탑승하고 지나간다는 것을 마음껏 시위하듯 뽐내기도 하였습니다.

그 무렵 독일 언론매체에서 일본 여행객이 파자마 차림 또는 슬리퍼를 신고 호텔 로비에 나타날 수도 있으니 놀라지 말라고 경고하는 기사가 실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러하듯이 기자가 슬리퍼를 신고 공공장소에 등장하는 것은 기자의 품격에 걸맞지 않은 행동이라 생각합니다. 아마 기자실에 있다가 대통령 도어스테핑(Doorstepping)에 허둥지둥 참석하느라 기자실에서 신고 있던 슬리퍼를 신고 참석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여기서 필자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모든 행사에 따른 절차에는 그에 걸맞은 행동 지침(Manuel code)이 있기 마련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를 준수하는 것이 상식이며 사회인이 지켜야 할 평범한 규범이기도 합니다. 아울러 파리의 미술관 지킴이처럼 대통령실 지킴이가 행사장을 적절히 관리했다면, 슬리퍼를 둘러싼 소동이 그렇게 시끄럽게 되지는 않았으리라 하는 아쉬운 마음으로 돌아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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