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훈 논설위원, KBSI 분석과학 마이스터

이석훈 논설위원
이석훈 논설위원

현대 사회에서 전기를 사용하지 못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암흑으로 바뀐 밤을 상상만 해도 끔찍하기 그지없다. 다시 조선시대로 회귀하여 우리 주변에 넘쳐나는 전자제품을 사용할 수 없다면 그 무료함과 불편함을 견딜 수 있는 이는 얼마나 될까? 전기로 인한 화재사고나 전기를 생산하는 원자로의 가동 불능으로 인한 방사능 유출 문제를 접하면 무서워지는 맘이 들어 잠깐 머뭇거리기는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전기제품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또한 우리 주변에서는 이동이 필요한 거의 모든 장치에 전기를 충전하여 쓰기 위한 리튬이온 배터리 이차전지를 사용하고 있다. 하루도 없으면 안 되는 휴대전화는 물론이고, 오디오, 노트북, 디지털카메라, 완구용 자동차 등 생활에 필수적인 제품들은 셀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전기자동차, 드론, 잠수함 등 미래 핵심 산업에 이르기까지 구동이 필요한 거의 모든 장치에 리튬이온 배터리가 사용되고 있다.

세계적인 기술경쟁력을 갖고 있다고 자부하는 리튬이온 배터리 산업이지만, 전국경제인연합회 국제무역센터의 세계 무역통계에 따르면 CATL, BYD, CALB 등 중국 기업의 출하량 기준 전기차 배터리 세계시장 점유율은 2020년 38.4%에서 2021년 48.7%로 10.3%p 증가했다. 반면에 한국 배터리 3사(LG에너지솔루션, 삼성SDI, SK온)의 세계시장 점유율은 같은 기간 34.7%에서 30.4%로 4.3%p 줄었다. 다만 중국의 전기차 배터리 세계시장 점유율은 1위이지만 수출보다 내수 비중이 높아 중국 시장을 제외한 세계 전기차 배터리 시장에서 한국산 점유율은 2021년 57.0%로 세계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러나 리튬 이온 배터리 총수출시장 점유율에서 한국은 2020년까지 압도적 1위인 중국(35.4%)에 이어 2위를 유지하다가 2021년 8.8%로 중국(38.4%)과 격차가 더 벌어지면서 폴란드, 독일에 이어 4위로 떨어졌다. 대용량 전기차 배터리 분야에서 여전히 선전하고 있지만, 후발 국가들의 배터리 기술개발에 가속이 붙으면서 한국의 위상은 점점 떨어지고 있다. 그만큼 기술 격차가 줄어들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종전에 배터리 기술의 주류였던 리튬이온 전지는 획기적인 에너지 저장 효율 덕분에 현대 사회에서 가장 널리 쓰이고 있지만, 그 구조적 한계로 인해 활용성을 제한받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리튬이온 배터리는 전지의 양 끝에 양극과 음극이 있고, 이 사이를 액체 전해질로 채워 리튬이온을 이동시킴으로써 충·방전을 하는 이차전지이다. 액체 전해질을 사용함에 따라 항상 전해질을 담는 용기를 갖춰야 하고, 밖으로 흘러나가지 않게 밀봉을 해야 한다.

액체 전해질이 흘러나오게 되면 배터리로서의 기능이 상실되지만, 문제는 액체 전해질이 인화성이 높은 물질이라 외부 충격 등으로 내부에서 쇼트(전기 회로의 절연(絕緣)이 잘 안 되어 두 점 사이가 접속되는 일)가 난다든가 과충전으로 인해 고열이 발생하게 되면 폭발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2022년 카카오 데이터 센터 화재를 비롯해 노트북, 휴대폰 등의 폭발 사고뿐만 아니라, 전기자동차, 전기자전거 등 화재사고가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어 이용하는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생산업체에서는 보상 문제로 연간 수천억 원이 지출되고 있다.

리튬 이온 전지는 이런 명확한 단점과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성능이 우수해 지금까지도 쓰이고 있다. 이런 단점을 극복할 새로운 배터리 개발이 필요하다. 전고체(電固體) 배터리가 배터리 혁명의 후보로 꼽히는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 전고체 배터리는 액체 전해질 대신 물성이 안정된 고체를 전해질로 사용함으로써 폭발이나 화재 위험이 적다. 이외에도 높은 에너지 밀도, 빠른 충전시간 및 저렴한 가격과 같은 장점으로 인해 미래 모빌리티 시장 주류로 자리 잡을 수 있는 선도적 기술로서 전 세계가 개발에 매진하고 있다. 2035년쯤에 전고체 배터리 시장이 28조 원 규모로 성장할 것이라는 게 업계의 전망이다.

그러나 전해질이 고체이다 보니 리튬이온의 이동이 어려워 전기전도도가 낮고, 고체와 고체가 접하는 경계면에서의 저항이 커 효율적인 전고체 배터리 상용화는 난관에 부딪혀 있다.

2025년에 전고체 배터리 상용화를 예정했던 일본은 배터리 산업 육성을 위해 실시한 민관합동 조사에서 전고체 배터리 상용화 기점을 2030년 이후로 전망했다. 전고체 배터리 분야에서 최고의 기술력을 보유한 일본이 상용화 가능성을 시장 예상보다 늦은 시점으로 잡은 것은 효율적인 전고체 배터리 제작이 얼마나 어려운지 시인한 셈이다. 현 시점에서 전고체 배터리 상용화 제품이 나오면 이 분야 시장을 선점할 수 있으며, 지속적인 연구개발을 통해 초격차 기술로 자리매김할 수 있음은 명백하다.

세계 각국의 배터리 기업들이 전고체 배터리를 상용화하겠다고 선언하고 경쟁에 몰입한 가운데, 최근 한국에서 대학과 연구소의 융합연구를 통해 안전은 물론이고 자유 변형까지 가능한 전고체 배터리를 개발했다. 이 배터리는 흔히 알고 있는 박스나 원통 모양이 아니라 1mm 이하 두께로 얇고 넓적해 종이처럼 보이는데, 실제 종이처럼 접거나 구길 수도 있고, 심지어는 일부를 잘라내도 작동한다. ‘구겨도, 잘라도 작동하는 안전한 전고체 전지’를 개발한 것이다. 특히 기존의 이차전지 제작 공정을 그대로 활용해 제작할 수 있어 상용화가 용이하다. 그래서 2021년 국가연구개발 우수성과 100선에도 선정되었고, 2022년 말 현 단계 기술 상용화를 목적으로 239억 원 기술료로 국내 기업에 기술이전이 되었다.

하지만 미래전략기술인 전기자동차에 적용할 수 있는 대용량의 전고체 배터리 개발을 위해선 앞에서 언급한 전기전도도 향상과 계면저항 감축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연구를 지속할 국가연구개발비를 받을 수 없다고 한다. 같은 분야의 연구를 하는 다른 과제와 중복된다는 이유이다. 과거 추격연구를 할 때 중복연구는 중복투자 가능성이 높아 제한하는 것이 타당했다. 하지만 선도연구, 특히 원천연구는 복수연구가 성공 가능성을 높이는 수단임에도, 더군다나 이미 원천기술이 확보되어 성능 향상을 통한 초격차기술 확보가 눈에 보이는 연구를 앞에 두고, 여전히 과거의 정책에 묶여 세계시장을 선점할 기회를 놓치는 것은 개인의 연구 의욕을 좌절시키는 것을 넘어 국가경쟁력을 퇴보시키는 행위이다.

과학기술 경쟁력이 국가패권이 되고 있는 세계 흐름 속에서, 걷고 있는 과학기술정책이 날고 있는 과학자의 걸음에 맞춰야 신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글로벌 5대 기술강국’이라는 비전에 한 발짝 더 다가설 수 있을 것이다.

약력=서울대 지질과학 학사~박사. 현재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 책임연구원, 국제표준위원회(ISO/TC202) 위원. 전 한국광물학회 회장. 전 출연(연)과학기술인협의회 총연합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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