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찬국 논설위원, 전 충남대 무역학과 교수

허찬국 논설위원
허찬국 논설위원

얼마 전 금융과 문화의 세계적 중심 도시 뉴욕을 다녀왔다. 런던도 비슷한 명성을 누리나 차이가 있다. 런던은 왕실과 정부가 위치한 정치권력의 중심지인 반면 뉴욕은 정부가 없는 곳이다. 런던의 영국박물관(British Museum)은 1753년 의회의 입법으로 설립되어 주로 대영제국 시절 수집품으로 가득 찬 공공기관이다.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Metropolitan Museum, 이하 Met)은 1870년에 문화예술에 관심이 있는 뉴욕 사업가들의 주도로 설립된 사립기관이며 기증받거나 매입한 소장품을 전시한다.

이런 뉴욕의 위상에 전설적 은행가 JP모건(John Pierpont Morgan, 1837~1913)의 역할이 컸다.

     금융위기 해법의 산실 JP모건의 서재

미국 경제는 19세기 후반 약 30년(도금시대, Gilded Age)에 걸쳐 고삐 없는 자본주의하에서 엄청난 경제발전을 이루며 영국과 유럽을 추월하는 산업국가가 되었다. 미국은 철도, 철강, 정유, 농업 등 산업의 폭발적 성장을 뒷받침할 재원이 필요했고 유럽의 투자자들에게는 꿈의 투자처였다. 이때 뉴욕은 자금을 조달하는 금융의 중심지가 되었고 주식시장도 자리를 잡았다.

금융업과 산업을 분리하는 오늘날의 금산분리개념이 생소했던 당시엔 독점적 트러스트가 많았고, 금융자본이 비(非)금융 분야 대기업을 소유하는 일이 흔했다. 이 시대에 카네기, 밴더빌트, 구겐하임, 록펠러 등 시각에 따라 강도남작(robber baron), 또는 산업의 지도자(captain of industry)라고 불리는 신흥 부호들이 출현했다, 수리능력이 천재적이었던 JP모건은 아버지에게서 금융사를 이어받아 키우며 금융계의 거물이 되었고 금융 외 분야 대기업을 지배하는 부호가 되었다,

역사적인 경제 대참사 ‘대공황’은 1929년 미국 주식시장의 대폭락으로 시작되며 경제의 심각한 위축이 10년 넘게 지속되었다. 이런 위기가 그 이전에도 간간이 발생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1907년의 위기이다. 그해 주가가 전년도 고점에 비해 50%나 떨어지며 다수의 은행과 금융사에서 신뢰를 잃은 고객들이 대거 예금을 인출하려는 ‘뱅크런’이 발생했고, 다수의 금융사들이 파산한다. 일파만파 사태가 커지며 금융시스템의 붕괴가 임박한 것이 2008년 미국의 금융위기와 흡사한 상황이었다.

당시에는 무제한적 재원을 동원할 수 있는 최종 대부자 중앙은행이나 예금을 일정 한도까지 보장해주는 예금자보험제도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차이점이다. 실제로 미국 중앙은행 연방준비제도는 이 위기의 여파로 정·재계의 중지가 모아져 1913년 입법을 통해 설립되었다. 2008년 금융시스템 붕괴를 막기 위해 지원 대상, 규모, 방식 등을 구체적으로 정해 해결에 앞장섰던 인물이 연지준 의장 버냉키였는데, JP모건은 1907년 위기의 버냉키였다.

중앙은행의 발권력과 정부의 지원을 동원할 수 있는 버냉키에 비해 그런 정책 수단이 없었던 JP모건이 직면한 문제는 더 컸다. 금융사들이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여 위기를 해소했지만 이 과정이 순탄할 리 없었다. 위기 발생에 영향을 미친 정도, 문제 해결에 필요한 재원 마련에 얼마를 기여할지 등 금융사마다 이해관계가 제각각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더해 반(反)트러스트 개혁가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정부를 설득해야 했다. 속설에 의하면 그는 주요 금융사 대표들을 자신의 서재에 소집한 후 합의가 도출될 때까지 가두었다고 하나 그냥 속설이다.

 1907년 금융위기 해결책을 모색했던 JP모건의 서재. 사진 허찬국.
 1907년 금융위기 해결책을 모색했던 JP모건의 서재. 사진 허찬국.

그해 10월 중순부터 상황이 악화되었고 11월 초 안정을 회복하기까지 여러 차례 급박한 회동이 그의 서재에서 이루어졌다. 위기 막바지 주식시장 폐쇄, 뉴욕시 파산을 목전에 둔 마지막 회의는 매우 극적이었다. 월요일 주식시장 개장 직전 새벽에 반독점 개혁을 강하게 밀어붙이던 루스벨트가 예외를 인정하며 해결책을 마무리한 에피소드 역시 극적이었다.

     MET박물관 조성한 문화유물 수집가

그의 생전 모건도서관으로 알려졌던 모건의 서재는 1906년 완공된 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의 고풍스런 건물에 위치해 있는데, 지금 보면 건물이 그리 크지 않다. 그의 아들의 기증으로 이제는 독립된 공익재단이 운영하는 모건도서관과 박물관(Morgan Library&Museum)으로 확장되어 운영되고 있다.

  고서적, 지도는 물론 악보 등 예술품을 많이 소장하고 있는 JP모건 도서관. 사진 허찬국.
  고서적, 지도는 물론 악보 등 예술품을 많이 소장하고 있는 JP모건 도서관. 사진 허찬국.

모건은 예술품, 역사적 유물, 악보(樂譜)와 더불어 고(古)서적 수집에 열성적이었고, 가격을 따지지 않는 그의 수집벽을 우려해 주위에서 말리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그가 수집한 서적들이 현재 전시 공간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아마 제일 유명한 것이 15세기 구텐베르크의 라틴어 성서이나 더 오래된 희귀한 유물과 고서들이 많았다.

필자가 찾았을 때 보았던 특별 전시의 하나가 ‘어린 왕자’의 작가 생텍쥐페리의 유고와 그가 그린 삽화들이었다. 1943년 미국에서 책이 처음 출판되었는데, 작가가 2차대전 전에 뉴욕에 머무를 때 책을 쓰고 삽화를 그렸다고 했다.

JP모건은 Met와도 인연이 깊었다. 창립 이사였으며 1904년부터 1913년 사망할 때까지 Met의 대표직을 맡았다. 대표 시절 기증품을 가려 받는 등 박물관을 체계적으로 관리했다고 한다. 생전에도 많은 예술품을 Met에 기증했지만, 아버지 사후 아들이 소장품을 대거 기증해 그 합계가 약 7000점에 이르렀다. 이런 규모의 기증은 많지 않았다고 한다.

Met 자료에 따르면 그곳에는 이집트 밖에서 제일 많은 이집트 유물이 소장되어 있고, 어느 박물관 못지않게 많고 다양한 역사적 유물이 전시되고 있다. 동시에 유럽의 르네상스 거장들, 19세기 인상파, 20세기 추상적 표현주의 그림과 조각 등 세계 굴지의 미술관 규모의 예술품도 소장하고 있다. 뉴욕에는 Met와 같은 세계 최대 박물관이자 미술관 외에도 현대미술관, 솔로몬 구겐하임 미술관, 프릭 미술관 등이 있다. 이 모두가 미국 경제, 뉴욕의 금융업이 지난 150년간 축적한 부(富)의 한 단면을 잘 보여주며 그 과정에서 JP모건의 역할이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강도남작처럼 벌어도 정승처럼 써서 세상을 밝히면 후대도 정승이라고 평가한다는 교훈을 준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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