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철순 데일리임팩트 주필

내가 장애인이라면? 내 가족 중에 누구 하나가 장애인이라면? 나라면 그 고통과 어려움을 견뎌낼 수 있을까? 심신의 괴로움이 당연히 크겠지만 세상 사람들의 눈길과 말질을 이겨내면서 세상과 화해하며 살아가기가 참 어려울 것 같다.

그래서 장애인의 처지에 공감하며 그들을 돕는 사람들의 말과 글이 소중하고 고맙게 느껴진다. 자연스러운 감정의 발로든 의도된 선행이든 나라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를 저절로 생각하게 된다. 요즘 한창 시끄러운 전장연(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지하철 시위를 보는 시각과는 별개로, 생활 속에서 자신의 일처럼 장애인을 배려하는 일은 흐뭇하고 값지다.

카페를 운영하는 청년의 아래 글을 읽으며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진 일이 있다. “우리 카페는 11시부터가 러시아워임. 근데 약간 장애가 있는 아들이랑 어머니가 왔음. 어머니는 키오스크 주문하라고 아들을 시킴. 그리고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때는 사람이 없다가 갑자기 직장인들이 몰려온 거라. 그래서 속으로 ‘뒷사람들이 주문 느리다고 눈치주면 어쩌지’ 하고 조마조마하고 있었음. 아들은 주문이 서툴러 계속 첫 화면으로 돌아감. 사람들은 기다리고, 아들이 자꾸 시간을 끌자 어머니가 이제 그만하자고 했는데 아들은 갑자기 시무룩해져서 안절부절못했음.”

어머니는 아들을 데리고 다니며 혼자서도 세상에 적응할 수 있게 일부러 이런저런 일을 시키곤 한 것 같다. 하지만 그거 쉬운 일 아니다. 장애가 없는 나도 음식점이나 카페 영화관에서 뭘 눌러 주문하려면 잘 안 된다. 뒤에서 사람들이 기다리면 더 당황하게 된다. 그런 때 “세상 살기 정말 힘들어졌다”고 저절로 투덜거리게 된다. 그런 처지인데도 나라면 뒤에서 기다리다가 짜증내며 뭐라고 불평했을 것 같다.

“근데 아들 뒤에 서 있던 여자가 ‘괜찮아요’ 하고 기다렸는데, 아들은 한 5분 정도 지나서 겨우 주문을 마침. 어머니가 죄송하다고 하자 뒤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이 “아드님이 주문을 엄청 잘 하시네요. 내 것도 대신 해줘요.” 이래서 신이 난 아들은 뒷분들 것도 느리지만 하나씩 다 주문해주었음. 화내거나 짜증내는 사람 하나도 없었음. 다들 돌아가면서 ‘저는 아메리카노요’, ‘저는 아메리카노 옆에 바닐라라떼로 눌러주세요’ 이러고 한 7분 주문을 대신시켰음. 아들은 짱 신나서 계속 누르고 어머니는 연신 감사하다고 그러면서 울었음. 나도 음료 만들다가 그 소리 듣고 눈물 개터짐. 알바생이랑 둘이서 존나 울면서 만들었네. 배달이랑 주문이 좀 밀려서 포스기에서 주문을 대신 받아줄 수 없어 조마조마했는데 괜한 걱정이었어.“

이렇게 끝난 그 글의 제목은 ‘아침부터 울었어. 세상은 살 만한가봐’였다. 아무데나 '개'를 붙이고 습관처럼 '존나'라고 하는 게 읽으면서 좀 거슬리긴 했지만 젊은이다운 글이었다. 맨 끝에 나오는 포스기는 POS(Point of Sales, 판매시점 정보관리)를 담당하는 기기로, 보통 '포스기'라고 말하나 보다.

 끌고 밀며 함께 걷는 가족. 며칠 전의 모습이다. 사진 임철순
 끌고 밀며 함께 걷는 가족. 며칠 전의 모습이다. 사진 임철순

 

 몇 달 전 여름에 만난 가족. 그들의 삶이 빛으로 환해지면 좋겠다. 사진 임철순
 몇 달 전 여름에 만난 가족. 그들의 삶이 빛으로 환해지면 좋겠다. 사진 임철순

이 글을 읽으면서 우리 동네의 한 이웃을 생각했다. 심신에 장애가 있는 30대 아들을 부부가 밀고 끌고 다니는 모습을 도처에서 만나게 된다. 키가 180cm는 돼 보이는 아들은 말도 잘 못 하고 걸음걸이도 온전치 못해 한시도 부모가 눈을 뗄 수 없는 장애인이다. 동네 목욕탕에서 아버지가 그 덩치 큰 아들을 씻겨주느라 쩔쩔매던 모습을 본 게 처음이었다.

그때 유심히 보아서 그런지 그다음부터 그 가족을 자주 보게 된다. 그들은 빠지지 않고 천주교 미사에 참석하는데, 아들은 가만있다가도 자기가 아는 성가가 들리면 갑자기 외마디 소리를 질러 주위를 놀라게 한다. 그 나름대로 노래를 하는 것이리라. 며칠 전에는 동네 주민들을 위해 조성한 테마공원 트랙에서 끌고 밀며 함께 걷는 그들을 보았다. 걸음이 느린 그들을 몇 바퀴나 추월하면서 나도 모르게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하는 탄식을 하게 됐다.

하지만 부부는 의외로 표정이 밝고, 주위의 눈길을 별로 의식하지 않고 사는 것 같다. 왜 그렇게 장애로 고통받게 됐는지 궁금하기도 하지만 알은체를 하지 않고 지나쳐 걸으면서 나는 괜히 미안하고도 존경스럽다. ‘이들 부모는 언제까지 이러고 살아야 하나. 아들보다 더 오래 살아야 할 텐데.’ 괜히 걱정도 하게 된다. 

 월드컵 포르투갈전을 이긴 뒤 태극기를 들고 관중과 함께 기뻐하고 있는 '중꺾마' 선수들. 
 월드컵 포르투갈전을 이긴 뒤 태극기를 들고 관중과 함께 기뻐하고 있는 '중꺾마' 선수들.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는 문구가 이 겨울에 유행하고 있다. 한국 축구대표팀의 선전이 이어진 '2022 카타르 월드컵'부터다. 12월 3일 포르투갈에 2대 1로 역전승하며 16강 진출이 확정된 후 선수단의 태극기에도 등장했다. 1무 1패로 궁지에 몰려 반드시 포르투갈을 이겨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그 어려운 경우의 수를 뚫고 해냈으니 '중꺾마'는 참 적절한 말이었다.

'중꺾마'가 처음 등장한 건 글로벌 온라인 게임 대회인 '리그 오브 레전드(LOL) 월드 챔피언십'이라고 한다. 월드컵에 빗대 '롤드컵'이라고 부르는 세계적 대회다. 한국팀 DRX의 주장 '데프트' 김혁규는 1라운드 패배 이후 한 인터뷰에서 "지긴 했지만, 저희끼리만 안 무너지면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DRX는 승승장구하더니 T1의 '불사대마왕(the Unkillable Demon King)'이라 불리는 페이커를 '꺾이지 않는 마음(the Unbreakable heart)'으로 제압하며 우승했다. 이 기적을 본 뒤부터 '중꺾마'가 유행어가 되어 축구 경기는 물론 '꺾이지 않는 할인'처럼 프랜차이즈점의 광고 문구로도 등장하게 됐다. 

장애가족의 삶에도 이 '중꺾마'의 정신과 힘이 선물처럼 주어지면 좋겠다. 아니 사실은 그들 스스로 이미 이런 자세로 살아가는 게 아닌가 싶다. 축구경기처럼, 게임처럼 부디 그들의 삶에도 멋지고 아름다운 기적의 역전승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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