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식 논설위원, 전 KBS 해설위원실장

이동식 논설위원
이동식 논설위원

러시아 모스크바 서쪽 구릉지에서 발원해 벨라루스를 거쳐 우크라이나를 가로질러 흑해로 흘러 들어가는 긴 강이 있다. 드니프로강이다. 총길이 2200여 ㎞로, 러시아에서는 볼가강 다음으로 긴 강인데, 이 강을 따라 비옥한 흑토 지대가 형성돼 오래전부터 농업이 발달했다. 우크라이나가 세계 최대의 철광석 매장량을 보유한 것도 이 일대 덕택이며 이 강을 따라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이우 등 곳곳에 내륙항이 건설돼 북유럽과 흑해를 잇는 물류망 역할도 해왔다. 키이우 체르카시 드니프로 자포리자 헤르손 등 우리가 최근에 자주 들은 도시나 지명이 다 이 강 유역에 있다. 드넓은 평원의 도시들을 우리가 알 이유가 없었는데, 지난해 봄 시작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우리는 이 이름들을 자주 듣게 되었다.

   우크라이나를 관통하는 드니프로강(두산 백과).
   우크라이나를 관통하는 드니프로강(두산 백과).

그렇지만 이 강은 우리 역사에서 아주 생소한 이름은 아니다. 기원전 7세기를 전후해 스키타이족이라고 하는 기마유목민족들이 이 일대의 주인이었기 때문이다. 스키타이라고 하면 우리 문화의 북방 원류로 일컬어지는 스키토 시베리아 문화를 갖고 있는 사람들인데, 이들의 유목문화가 우리나라와 비슷한 점이 많다.

당시의 역사를 세밀하게 기록한 그리스의 헤로도토스는 “스키타이의 왕이 죽으면... 땅에 사각형의 커다란 구덩이를 판다. 유해를 묘지 안의 침상 위에 안치하고 그 위에 나무 막대기를 걸쳐 놓고 다시 그 위에 멍석을 덮는다.... 묘지 내의 공간에는 온갖 황금 술잔과 보물들을 함께 묻는다. 그 의식이 끝나면 전원이 달려들어 서로 더 많이 쌓아 올리려고 경쟁하여 될 수 있는 한 거대한 흙무덤을 만든다.”(헤로도토스, 『역사』 박광순 역. 범우사. 1987.)고 했다. 이것은 경주 일대에서 발견되는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의 축조방식과 흡사하며 많은 황금제품들을 무덤에 부장하는 것은 신라의 무덤에서 확인되는 그대로이다.

또 이들 민족의 시조는 하늘의 최고신과 물의 신[河神]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고구려의 주몽신화를 연상시켜주며, 이들이 천신(天神)의 자손으로서 하늘에서부터 왕권을 직접 받았다고 하는 것도 가야를 거쳐 일본으로 이어지는 사상이기에 기마민족국가설을 주장한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 등 일본 학자들도 일찍부터 스키타이에 주목해 왔다. 그 문화가 우리 쪽으로 온 것은 직접 사람들이 왔거나 아니면 문화의 접촉으로 전파되었을 것인데, 여하튼 그곳이 아득한 시절 우리 문화와 깊은 연관성이 있다는 데서, 이번 우크라이나 전쟁은 그냥 멀리 떨어진 국가들끼리의 분쟁을 보는 것과는 다른 의미가 있다.

​그래서 그런 것인가 최근 이 강 일대에서 대치하고 있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새로운 의미로 우리와 관계를 맺어가고 있는 것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우크라이나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폴란드가 러시아의 침공에 대비해 이웃을 돕다가 군비의 공백이 생기자 급히 우리나라에 군사장비 수출을 요청하게 되었고 그리해서 그들의 군비 확충에 우리의 기술을 쓰기로 하는 등 군사부문 협력이 추진되고 있다. 이와 함께 우리는 드니프로강 서쪽을 주 무대로 하는 우크라이나에 직접 전투무기를 제공하지는 않지만 비전투용품 등으로 우크라이나를 돕고 있다.

그런데 우리와 휴전선을 맞대고 있는 북한이 최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쟁을 돕고 있는 러시아 민간 용병회사인 와그너그룹에 무기를 판매한 것으로 알려져 주목을 받고 있다. 미국 백악관이 밝힌 데 따르면 북한이 지난해 말 와그너그룹이 사용할 보병용 로켓과 미사일을 러시아에 전달했고, 이미 와그너그룹에 1차 무기 인도를 완료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북한은 완전히 모략을 하기 위한 낭설이라고 주장하지만, 미국의 정찰위성망으로 파악한 것이기에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와는 너무나 먼 우크라이나의 드니프로강 유역에서 우리는 서쪽, 북한은 동쪽을 지원하는 총성 없는 전쟁을 하는 셈이 되었다는 뜻이다. 다른 점은 우리가 무기를 폴란드에만 판매하는 것으로 우크라이나를 간접적으로나마 지원하지만, 그들은 우크라이나와 싸우는 러시아 측 용병들에게 무기를 직접 공급했다는 것이다. 어찌 됐든 휴전선에서 최고의 긴장 높은 군사적 대치를 벌이고 있는 남과 북이 지구 반대편으로 돌아서 드니프로강을 사이에 두고 다시 적대하는 양상이 아이러니컬하다는 것이다.

​필자는 우리가 휴전선을 두고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것은 20세기 이후 세계사적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왔다. 18세기 이후의 세계 역사는 크게 보면 프랑스혁명으로 촉발된 ‘자유’와 ‘평등’이라는 두 이념이 각 나라나 민족이 추구하는 가치관이자 목표가 되었는데, ‘자유’라는 이념은 프랑스가 지원한 미국을 통해 서쪽으로 달려가서 태평양을 건너 일본을 지나 우리나라에 도달했고 그 끝이 바로 휴전선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평등’이라는 이념은 사회주의라는 개념을 통해 이웃 나라 독일을 출발해 동유럽, 러시아, 중국을 거쳐 북한까지 왔고 그것이 우리의 휴전선 북쪽에 와서 멈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우리나라의 휴전선은 인류사적으로 자유와 평등이 (진정한 평등이 이뤄졌다는 의미가 아니라 내세웠다는 뜻이지만) 극(極)에서 만나 대치하고 있는 최전선이라고 필자는 생각해왔다. 그러한 대치가 6·25전쟁 휴전 이후에도 70년이 다 되도록 풀리지 않고 마주 보고 있는 상황에서 드디어는 그 기운들이 뒤로 지구를 돌아 이제는 우크라이나의 드니프로강을 사이에 두고 다시 대척하게 된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것을 다시 보면 우리 사이에 놓여 있던 이념이라는 장벽이 경제라는 새 물결에 따라 서서히 바뀌고 허물어지는 것이 아니냐고 할 수 있다. 그 옛날 스키타이들이 이 일대를 지배했을 때에도 잔혹한 통치와 비정한 순장제도 등으로 악명이 높았지만 그리스 아테네인들은 이곳을 찾아와 포도주·올리브유를 팔고 밀을 사갔다고 한다. 북쪽의 바이킹은 이 강의 상류와 북해로 흐르는 다우가바강을 연결한 무역로를 타고 내려와 동로마제국과 교류했다. 그것이 현재 강의 서부 사람들은 친(親)서방, 동부는 친러 성향이 강해 강이 심리적 경계선이 됐다는 얘기도 있는데, 이처럼 긴 역사 속에서 경제라는, 사람들의 삶이라는 목표는 인적 지역적 장벽을 허무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 되어 온 것이다.

 드니프로강(우크라이나 유학생 블로그사진 캡처).
 드니프로강(우크라이나 유학생 블로그사진 캡처).

바라건대 새해에는 이 강이 남북이 무기로 만나는 곳에서 사람들의 삶을 키워주는 곳이 되기를 소원해본다. 이 전쟁이 언제 끝날지는 모르지만 푸틴이 사실상의 항복을 선언하며 휴전을 종용하는 상황이어서 어찌 됐든 끝난다고 보면, 북한과 공산 중국의 침공으로 초토화됐다가 50여 년 만에 세계 주요 국가로 발돋움한 우리나라의 경험이 우크라이나에 가장 중요한 교과서가 될 수 있다. 말하자면 그들이 ‘한강의 기적’처럼 ‘드니프로강의 기적’으로 다시 일어나면 우리가 인류 역사에 공헌을 하는 것이 된다. 그것이 다시 북한으로 가서 ‘대동강의 기적’으로 이어지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때야 비로소 인류는 큰 전쟁의 빌미가 없어지고 평화로운 시대의 문을 함께 열어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북한의 인식 변화가 필요하고 그 인식 변화를 촉진할 관련국들의 인식변화도 필요하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교훈도 작용해야 할 것이다. 이런 일이 언제 어떻게 이뤄질지는 알기 어렵지만, 그것이 수천 년을 말없이 흘러온 드니프로강이, 눈앞에서 펼쳐지는 전쟁으로 강 유역에서 평화롭게 살던 수십만 명이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것을 보며 우리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닐까? 새해가 되어 그런 당연하고도 원대한 꿈과 소망을 실어 하늘로 띄워본다.

*** 강의 이름을 종전엔 러시아어 표기에 따라 드네프르강으로 썼으나 2022년 3월 3일 발표된 외교부의 우크라이나 지명 표기 방침에 맞춰 드니프로강으로 표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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