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우현 논설위원, 한불협회 회장, 전 주 프랑스 공사 겸 문화원장, 전 숙명여대 객원교수

손우현 논설위원
손우현 논설위원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이 ‘2022년도 인물(2022 Person of the Year)’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우크라이나의 투혼(‘the spirit of Ukraine’)을 선정했다. 타임은 젤렌스키가 “지난 수십 년간 본 적이 없는 방식으로 세계를 깜짝 놀라 행동하게 만들었다(galvanized the world in a way we haven't seen in decades)”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젤렌스키와 우크라이나 국민은 골리앗 러시아군을 종이호랑이로 만들었다. 핀란드와 스웨덴은 오랜 중립국 지위를 포기하고 나토 가입을 결정했다.

우크라이나 전쟁 300일이 되는 지난달 21일 젤렌스키 대통령은 미국을 전격 방문했다. 전쟁 발발 후 첫 해외 방문으로 007을 방불케 하는 작전이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예의 짙은 녹갈색 셔츠와 바지, 부츠 등 ‘전투 복장’을 한 젤렌스키 대통령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양국 간의 동맹을 과시했다. 젤렌스키는 미국 의회에서의 연설에서 “당신들의 돈은 자선이 아닌 세계 안보와 민주주의를 위한 투자”(“Your money is not charity. It is an investment in the global security and democracy.”)라며 지원을 호소했다. 26분간의 간결체 영어 연설은 33번의 박수와 21번의 기립박수를 받았다. 미국 의회는 이틀 후인 23일 패트리엇 미사일 등 군사장비 지원 등을 포함하는 500억 달러 규모의 우크라이나 원조를 승인했다.

그러나 젤렌스키 대통령이 ‘영웅의 환영’(‘hero's welcome’)을 받으며 패트리어트 미사일을 얻어내고 미국의 지지는 재확인했지만 정작 잃어버린 영토를 단기간에 수복하고 전쟁을 끝내기 위한 공격 무기는 얻지 못했다고 뉴욕타임스(NYT) 등 미국 언론은 보도하고 있다.

이들 보도는 젤렌스키가 어태켐스(ATACMS: Army Tactical Missile System) 장거리 미사일, 첨단 공격용 드론, F-16 전투기, 첨단 전차 등의 지원을 요구했지만 바이든 대통령은 이를 거부했다고 전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의 실질적인 방미 성과는 방어용인 패트리어트 미사일 등 일부 무기 지원을 받는 데 그치는 등 절반의 성공에 머물렀다는 것이다.

실제 바이든은 젤렌스키와의 공동 기자회견에서도 “우크라이나에 대한 공격용 무기 지원은 나토(NATO)와의 단결을 깨뜨릴 수 있다”며 “유럽은 러시아와 전쟁을 할 생각이 없으며 3차 대전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미국은 우크라이나가 장거리 미사일을 사용해 러시아 본토를 타격할 경우 전쟁이 확대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그러나 무기 공급 관련 미국과 우크라이나의 ‘불협화음’(‘dissonance’)을 과장해서는 안 된다고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의 마크 캔시언(Mark Cancian) 선임 연구원은 경고한다. 정책 차이를 보이는 것은 장거리 미사일(ATACMS)뿐이며 젤렌스키의 미국 방문은 ‘매우 성공적’이었다는 것이 그의 평가다. 그는 특히 미국 의회에서의 젤렌스키 연설은 매우 적절했으며 미국의 지원이 ‘책임 있게”(‘responsibly’) 사용되고 있다는 확신을 공화당 의원들에게도 심어 주었다고 평가했다.

프랑스의 르 몽드지는 ‘상징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사설에서 젤렌스키 대통령의 깜짝 방미를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1년 윈스턴 처칠 당시 영국 총리의 방미에 비유하면서 바이든 대통령이 젤렌스키의 방문을 받아들인 것은 크렘린의 조기 협상에 대한 환상을 깼다고 보도했다. 미국은 세력 분포가 러시아에 유리하게 된 현 상태의 고착을 원치 않는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군은 러시아군이 점령한 지역의 54%만 현재까지 수복했다.

르 몽드는 젤렌스키가 미국에 이어 전쟁 피해를 직접 겪고 있는 유럽 동맹국들도 방문할 가능성이 있다며 그럴 경우 자유와 민주주의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들의 전선이 더욱 강화될 수 있을 것이라고 논평했다. 신문은 우크라이나전쟁이 ‘한 지도자(푸틴)의 강박적인 기행’으로 야기된 것이라며 ‘워싱턴에서 보여준 분명한 결의를 계속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작년 2월 24일 러시아의 침공으로 시작된 우크라이나전쟁은 양국 군인만 20만 명 넘는 사상자(미국 합동참모본부 추정)를 내는 등 막대한 피해를 남기고 있다. 또 에너지 등 원자재와 식량값 급등으로 인한 인플레이션, 금리 인상 등을 연쇄적으로 촉발해 이미 코로나19에 따른 글로벌 공급망 붕괴로 휘청이던 세계 경제에도 치명상을 안기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측의 입장 차이로 가까운 장래에 평화 협상 개최는 어려울 것이라고 미국과 EU 관리들은 보고 있다.

‘역사의 종언’으로 유명한 미 정치철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는 계간지 ‘민주주의 저널’(Journal of Democracy) 2022년 가을호에 실린 기고 ‘우크라이나는 왜 승리할 것인가’(Why Ukraine Will Win)에서 푸틴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진짜 이유는 나토 확장 가능성 때문이 아니라 자유민주주의의 확산을 막기 위해서라고 분석하고 있다. “자유민주주의는 슬라브 세계에는 특히 맞지 않는다(‘liberal democracy was particularly inappropriate in the Slavic world’)”고 주장해온 푸틴이 ‘자유 우크라이나’(‘A free Ukraine’)를 용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후쿠야마는 사기충천한 우크라이나 군대가 서방 연대에 힘입어 전쟁을 기피하는 러시아인들 대신 전과자들과 빈곤층의 소수민족까지 동원한 오합지졸의 러시아 군대를 물리치고 승리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우크라이나는 절대 항복하지 않을 것이다(Ukraine will never surrender).” 처칠 전 영국 총리는 1940년 6월 4일, 히틀러에 대한 항전을 촉구하며 절대 항복하지 않겠다고 연설했다. 이 처칠의 명연설을 소환하는 젤렌스키의 미 의회 연설이 새해 아침에 큰 울림을 주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승리는 자유민주주의의 승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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