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호 논설위원, 윤보선민주주의연구원 원장

김용호 논설위원
김용호 논설위원

우연히도 필자가 논설위원 중에서 올해 마지막 칼럼을 작성하게 되어서 희망찬 새해를 맞이하는 독자들을 위해 어떤 칼럼 주제를 선정해야 멋진 메시지를 전할 수 있을지 고민을 많이 했다. 필자의 전공이 정치학인지라, 자연히 국내외 정치적 이슈를 찾아보았다. 먼저 올해 국내 정치에서 가장 큰 사건이 윤석열 정부의 출범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현 정부의 장래를 전망해 보는 칼럼을 준비하였다. 그런데 내용에 새로운 것이 없어서 포기하였다.

다음으로 국제 사회에 눈을 돌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의 종착점을 다루는 글을 마련하려고 노력했으나 정보의 한계를 느껴 포기했다. 다음으로 내년도 국제정세를 전망하는 글을 작성하려고 했으나 ‘복합위기 속에 더 위험한 세계’라는 우울한 글이 되어서 주저하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강점(디지털 역량, 글로벌 네트워킹의 우수성, 한류 등)을 강조하면서 “새해에 희망을 잃지 말자”는 글을 작성하려고 했으나 역부족을 느꼈다.

결국 필자가 가장 관심을 가지고 있는 한국 민주주의의 장래와 관련하여 독자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얘기를 칼럼 주제로 선정하게 되었다. 필자의 메시지는 두 가지이다. 첫째, 한국 민주주의가 민주적 제도 속에서 퇴보하고 있다는 것이다. 과거처럼 군부가 힘으로 민주주의를 망가뜨리는 것이 아니라 정치인과 유권자들이 스스로 민주주의를 허물어뜨리고 있는 것이다. 둘째, 우리나라가 민주공화국인데도 불구하고 그동안 정치인들과 국민들이 민주주의만을 강조하고 공화주의를 등한시하였는데, 앞으로 공화주의를 강화해야 민주주의가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신생 민주주의국가 중에서 가장 모범적인 사례로 꼽힐 정도로 민주화에 성공하였다. 국민의 자유와 인권이 신장되었고,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를 통해 대통령을 선출하여 네 번에 걸쳐 평화적인 정당 간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21세기 들어 국민들의 정치적 요구와 참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데, 정당, 국회, 행정부, 사법부가 이들의 요구를 충족시켜 주지 못하여 정치적 불만이 커지고 있다.

더구나 1997년 IMF 외환위기, 2007년 미국발 금융위기, 코로나19 팬데믹 등으로 인해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커졌으나 정치권이나 정부가 해결책이나 비전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특히 권력에 대한 견제와 통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바람에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이 결탁한 거대 부패가 근절되지 않아 국민의 분노를 자아내고 있다.

또 기득권층의 이익이 제도적으로 강화되는 가운데, 다수의 정치적 요구가 민주적으로 배제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이익집단, 시민단체, 정치인 팬클럽을 중심으로 국민들이 거리에서, 또는 온라인을 통해 정치적 요구를 폭발시키고 있다. 최근엔 국민과 정치인들의 좌우 진영 대립이 심해지면서 상대방을 악마화시키고 있다. 대의제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거리의 정치, 온라인의 전략적 극단주의가 횡행하는데, 이러한 것이 다시 대의제도의 작동을 가로막는 악순환이 일어나고 있다.

이런 정치상황은 포퓰리즘(populism)에 취약하다. 정치인들이 선악이라는 이분법적 논리로 기득권을 질타하고, 국민들에게 단순명료하게 해결책을 제시하면서 선거에서 표를 얻어 국민을 앞세워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달성하는 것이 포퓰리즘이다. 그런데 포퓰리즘은 흔히 민주주의를 통해서 등장하기 때문에 국민들이 민주주의와 포퓰리즘을 구별하기 어렵다. 따라서 한국 국민이 포퓰리즘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을 우려한다.

이러한 한국 민주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그동안 합의제 민주주의, 더 많은 민주주의, 심의 민주주의, 참여 민주주의 등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민주주의가 현실정치에서 제대로 작동하기는 매우 어렵고, 오히려 문제를 악화시킬 수 있다. 예컨대 참여 민주주의는 무분별한 참여가 오히려 집단 간 정치적 갈등을 부추길 우려가 많다. 더욱이 참여를 제대로 수용할 수 있는 정당이 발달하지 않은 우리나라에서는 갑자기 참여가 늘어나는 경우 정치적 불안을 초래한다. 또 참여자의 의사가 과연 소속 집단의 의사를 정확히 대변하고 있는지도 의문이다.

결국 현 단계에서 민주주의를 심화 발전시키려면 새로운 민주주의보다 공화주의가 필요하다. 공화주의는 공공선의 창출, 시민의 정치참여와 책임의식, 공직자의 윤리와 책임성 등을 강조함으로써 우리 사회의 갈등과 양극화를 완화할 수 있다. 또 시민의 정치적 책임의식의 약화와 사적 이익의 무분별한 추구에 따른 공공이익의 훼손 등을 해결하고, 특히 정치인과 공직자의 권력 남용, 권위주의적 행태 등을 바로잡을 수 있다.

공화주의는 우리나라 선각자들이 강조한 홍익인간 정신과 별다른 차이가 없으며, 한국인의 공동체 전체에 대한 애정, 향토애, 민족애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우리 사회의 우파와 좌파가 모두 공화주의를 강조하고 있어 국민 통합에도 기여할 것이다. 따라서 대통령 직속 국민통합위원회는 우리 국민들이 공화주의로 뭉칠 수 있도록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캠페인을 벌여야 한다. 공화주의적 애국주의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전우애를 바탕으로 한다. 이러한 공동체에 대한 사랑이 계급 타협이나 지역 화해를 가능하게 만든다.

그렇다고 해서 권위주의정부가 강요하는 맹목적인 애국주의가 아니라 자유와 공동의 번영을 보장해 주는 나라에 대한 ‘조건부 사랑’이다. 결국 공화주의는 시민과 정치인, 기업주와 노동자, 지배하려는 자와 지배를 받지 않으려는 자들이 함께 공동체에 대한 조건부 사랑을 바탕으로 정치적 책임을 다하여 구성원 모두에게 공동의 번영과 자유를 보장하는 나라를 함께 건설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공화주의 정신이 넘쳐날 때 한국 민주주의의 품질이 향상될 것이다. 새해에는 정치인과 국민들이 너도나도 “나는 공화주의자”라고 선언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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