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식 논설위원, 문화칼럼니스트

이동식 논설위원
이동식 논설위원

얼마 전 열린 한중일 3국 바둑연승전을 보다가 깜짝 놀랐다. 한국과 중국 기사가 혈전을 벌여 마지막에 반집을 역전승으로 이긴 대국인데, 모든 수를 1분 안에 두어야 하는 초읽기의 급박한 상황에서도 두 기사가 머릿속에서 온갖 계산을 하며 최선의 수를 찾아내어 두는 모습은 경이롭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더 놀랄 일이 있었다. 그것은 이 대국의 중계 화면에 연결된 AI(인공지능)에 의한 이른바 바둑컴퓨터가 대국의 모든 수를 놓고 그때 그때 유불리를 판정하는 것이다. 몇 년 전 우리나라 이세돌 9단과의 대결에서 이미 그 실력이 입증된 바 있지만 대국의 처음 몇 수에서부터 끝날 때까지 한 수마다 누가 이길지를 한 집, 반 집, 혹은 0.4집, 0.7집으로 정확히 계산해준다는 것이다. 이것은 한 수가 두어지면 그에 대한 최선의 대응수를 즉각 다 찾아낸다는 것이고 결과는 그 예측 그대로 되더라는 것이다.

  바둑TV 캡처 화면.
  바둑TV 캡처 화면.

사실 이제 컴퓨터가 계산을 잘 하는 것은 당연한 상식이자 일상이 되어 있고, 최근에는 바둑뿐 아니라 체스, 그리고 그보다 더 복잡하고 교묘한 전략이 필요한 것으로 여겨지는 보드게임도 AI가 인간을 이길 정도가 되었기에 바둑의 인공지능 이야기를 하면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이라고 핀잔만 받을 것이 뻔하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둑컴퓨터가 대국하는 기사들의 바둑 수, 기량, 성향 이런 것들을 넘어서서, 모든 수마다 잘잘못을 금방 판정해준다는 것이다. 대국 당사자들은 볼 수 없지만, 관전자들은 바둑을 잘 알건 모르건, 컴퓨터 바둑의 평가를 보고 승패를 예측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이렇게 바둑경기를 판정하는 컴퓨터가 정치에는 도입될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요즈음 우리 정치는 정치가 아니라 서로 치고 받고, 헐뜯고,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고, 심지어는 뻔한 거짓말도 진실인 양 몰아세우는 장터 싸움판이 되어 버렸다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생각과 주장이 진실이 아닌 것이 뻔히 보여도 진실인 것처럼 우기고, 거짓으로 드러났을 때에는 또 교묘한 변설로 넘어가면서 그 이유와 핑계를 상대방에게 떠넘긴다. ​

어쩌면 우리 정치인들이 생각하는 정치는 당장 눈앞에서 자신이나 자기 편에 유리하면 된다고 보고 있는 것인가? 자신들의 생각이 절대적이라고 믿고, 그 반대의 것은 무조건 악으로 몰아서 무너지기를 추구해도 되는 것인가? 관전자인 국민들은 잘잘못을 다 아는데도 마치 모를 것이라는 듯 국민들의 생각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

거기에다 SNS의 조회수가 돈으로 연결되는 시스템을 악용해 어떻게든 조회수를 올려 돈을 벌려는 구경꾼들이 거짓과 무례함, 반(反) 인권 행태까지 서슴없이 자행하고, 언론의 자유, 취재라는 이름으로 사회의 규범을 무너트리는 행태가 행해져도, 이웃의 소음 피해는 아랑곳 않고 불법적인 시위나 행동을 하는데도, 그것을 막을 사회적인 방어막은 전혀 가동하지 않는다.

이런 문제적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 정치판에 바둑컴퓨터가 도입되면 좋을 것 같다. 바둑의 매 수를 판별해주듯 사람들의 언설의 옳고 그름을 바둑컴퓨터가 즉시 평가하고 판정하면, 그것으로 정치인이나 그 주위 사람들의 잘못이 금방 경고를 받고, 그것이 일정 기간 누적되면 정치판에서 퇴출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정치현장이 지금처럼 혼탁하지는 읺을 것이다. 다만 정말로 바둑컴퓨터가 정치에 도입된다면 그것은 가장 냉혹한 법의 지배가 될 뿐이다. 정치에서 인간이 실종되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정치(政治)의 '정(政)'은 바른 것[正]이 행해지는[攴] 건데 그 바른 것 자체가 없어진 정치판은 늘 싸울 줄만 알고 화해할 줄 모른다. 이런 정치인들에게 차라리 불교에서 제시하는 분쟁 해결방법을 권하고 싶다. 이른바 '여초부지(如草覆地)', 곧 풀로 땅을 덮는 것이다.

우연한 일로 두 사람이 다투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사소한 사건이었으나 두 사람의 문제를 넘어 점점 이에 동조하는 세력이 커지면서 상황이 악화되고 집단이 분열되는 소용돌이에 빠지게 된다. 이처럼 극한 상황에서 해결책이 없을 때 승가에서는 여초부지법을 쓴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승가의 장로들이 나서서 적극적으로 조정을 시도하여 양쪽으로 나뉘어 대립하는 비구들이 겸허히 받아들여 화해하도록 만든다. 즉 다툼으로 인한 양측의 견해에 대하여 어느 한 쪽이 옳다고 판단해 반대편에 죄를 묻는 방식이 아니라 양측 모두가 잘못이 있으니 서로 사과하고 화해하여 대립 과정에서 드러났던 여러 가지 죄상을 서로의 참회를 통해 덮는 방식이다. 참회는 이런 식으로 한다;

“우리들은 바르게 신심을 내어 출가하여 도를 구했습니다. 지금까지 다투기를 좋아하여 서로 언쟁을 하였으나 만약 우리들이 이 사건의 원인을 물어 서로에게 자꾸만 추궁을 한다면 대중에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도 일어나게 될 것이며, 이미 일어난 일도 또한 없앨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들은 서로의 뜻을 마땅히 굽힙니다. 풀로 땅을 덮듯이 서로의 허물을 덮고 그간의 모든 허물을 참회하며 용서를 구하노니 우리들이 다시 화합을 이루도록 해 주소서."

​한 해를 넘기는 이 시간까지도 과거의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 새로운 사람들은 과거의 잘못은 꼭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다 보니 서로를 비난하고 원망하는 현상이 반복된다. 5년 전과 조금도 다를 바 없고 공수만 바뀌었을 뿐이다. 이런 식이라면 우리의 정치는 영영 해법을 찾지 못한다. 서로의 잘못을 지적해 줄 사람도 없다. 여론이란 잣대도 무너지고 심판이 없어진 것이다. 

​ 대한민국 정의의 여신(대법원 중앙홀).
​ 대한민국 정의의 여신(대법원 중앙홀).

우리 사회의 문제를 여초부지의 해법으로 풀 수는 없을까? 크게 대립하는 두 진영의 원로들이 서로 상대방의 떡고물을 뺏으려고 하지 말고, 지금까지의 방법이 서로의 갈등만 조장했음을 인정하고 그 허물을 덮어주는 역할을 해주어야 한다. 계속 대립과 분열을 이어갈 수는 없다. 자라나는 세대들을 이런 정쟁에 끼워 넣으려 하면 안 된다.

최근 빙상 선수들의 왕따와 승부 관련 고소 고발 사건을 두고 항소심 재판부가 의미 있는 말을 했다. 두 어린 선수가 법의 이름으로 고소 고발을 하면서 지옥 같은 싸음에 빠져 있는데 빙상계의 어른들은 책임을 인정하거나 화해 역할을 하지 않고 법에만 떠넘겨 두 소녀의 생을 망치고 있지 않느냐고 질책한 것이다.

정의라는 이름으로 서로 따지지 말고, 법과 공정이라는 이름으로 법을 흔들거나 법을 빙자한 상대방 흠집내기를 하지 말고 이제 참회하자. 법의 진정한 정신과 테두리 안에서 해법을 모색하자. 이때의 주안점은 서로 참회하는 거다.

이미 차가운 겨울이다. 날씨와 몸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그렇고 세계가 그렇다.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뭍으로 던져진 잉어들은 서로의 몸 속의 거품을 상대방의 몸에 발라주어 다 함께 살아간다(이를 ‘상유이말(相濡以沫)’이라고 한단다). 지금은 우리 모두는 패배자일 뿐이다. 우리가 패배자가 아니라 승리자가 되기 위해서는 대립과 갈등을 자기고백과 참회, 상대에 대한 배려로 바꾸어야 한다. 눈앞의 핏발을 거두고 차가운 겨울의 추위를 서로 녹여주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우리 삶에서 픔격을 되찾아야 한다. 흥분과 분노를 가라앉히고 우리들의 앞날을 위해 새해 새봄부터 자기 고백과 화해의 풀을 이 땅 위에 덮어 자라게 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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