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호 논설위원, 서울시립대 명예교수(도시설계)

김기호 논설위원
김기호 논설위원
공원이나 가로의 전통적 4인용 벤치. @반포주공아파트 한수공원(현재 철거중). 사진: 김기호, 2020.
공원이나 가로의 전통적 4인용 벤치. @반포주공아파트 한수공원(현재 철거중). 사진: 김기호, 2020.

우리 도시는 벤치에 꽤나 인색하다. 시내건 주거지건 다니다 보면 이런저런 이유로 앉았으면 하는 경우가 많은데 어디 돈 내고 들어가 앉을 커피집은 수도 없이 많건만 간단히(특히 혼자) 앉을 벤치는 아무리 둘러봐도 눈에 띄지 않는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커피집 장사 잘되라고 시가지 내에 벤치를 두지 않는다고 빈정거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제 서서히 여기저기서 다른 모습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광화문광장 1인용 벤치. 누울 수 있는 넓은 평상형(平床型) 벤치도 있다. @광화문광장 서측(세종문화회관 쪽). 사진: 김기호, 2022.
광화문광장 1인용 벤치. 누울 수 있는 넓은 평상형(平床型) 벤치도 있다. @광화문광장 서측(세종문화회관 쪽). 사진: 김기호, 2022.

    벤치가 있는 장면 1; 광화문광장

8월 개장한 광화문광장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가 많지만 직접 가보고 가장 신선하게 느낀 것은 개인용 벤치가 등장한 것이다. 의자도 크며 등받이도 뒤로 경사진, 제법 푸근하게 쉴 수 있는 럭셔리한 모습이다. 당연히 벤치를 이리저리 움직일 수도 있다. 벤치 하면 4인용으로 바닥에 고정된 장의자(長椅子)를 생각하기 마련인데 개인용 벤치를 여기저기 자유롭게 둔 모습은 생소하지만 관심이 간다.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하는 변화다. 공공공간인데 너무 개인주의를 조장하는 것은 아닌가? 드디어 단체가 아니라 개인을 존중하는 사회가 왔는가?

결론은 “4인용 벤치에서 4인이 앉아 있는 모습을 보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것으로 내렸다. 혼자 앉아 있거나 양쪽 끝에 각각 한 사람이 다른 쪽을 보고 앉아 있는 것이 가장 일반적 모습으로 떠오른다. 오히려 개인용 벤치를 제공하고 필요하면 사용자가 알아서 의자 배치를 바꾸어 서로 보고 교류할 수 있다면 더 유연하지 않을까. 단체를 강요하기보다 개인이 선택하게 하는 것이 변화된 시대의 요구가 아닐까 생각한다.

광장은 큰 공간이다 보니 으레 그룹과 대규모 단체의 공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잘못일 수 있다. 오히려 광장은 공공이 제공한 개인의 공간이되 이들이 그 안에서 필요에 따라 소그룹 또는 대그룹으로 모일 수도 있다는 것이 바른 해석으로 보인다. 광장 내 공간도 이런 변화된 요구에 따라 세분화, 다양화되어 갈 것이다.

보도에 설치된 작은 꽃밭과 벤치. @청담로 청담4거리 부근. 사진: 김기호, 2021.
보도에 설치된 작은 꽃밭과 벤치. @청담로 청담4거리 부근. 사진: 김기호, 2021.

    벤치가 있는 장면 2; 청담동 가로변

청담동이 어딘가! 세계 유명 패션 브랜드들이 늘어서 있으며 그에 걸맞게 건물들의 디자인과 형태도 다양하며 진취적이다. 오가는 사람들의 행색도 예사롭지 않다. 영화에서나 보던 차를 타고 와 내려 패션매장으로 들어가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이런 서울 최고의 상업가로 길가 한 모퉁이에 소박한 꽃밭과 벤치가 놓여 있다. 앉기에 좀 주저하는 마음이 들지 모르나 그래도 길에서 만난 벤치는 참 반갑다. 벤치에 앉아 쉬기도 하고 또 지나가는 멋있는 사람들을 이리저리 구경할 수 있는 것도 나쁘지 않다. 길은 보고 보이는 공간이다. 그리고 이것이 사회적 공간의 출발점이다.

버스정류장의 따듯한 온돌형 벤치. 어떤 곳에는 투명하고 작은 텐트 같은 집도 있다. @우면동. 사진: 김기호, 2022.
버스정류장의 따듯한 온돌형 벤치. 어떤 곳에는 투명하고 작은 텐트 같은 집도 있다. @우면동. 사진: 김기호, 2022.

   벤치가 있는 장면 3; 동네 버스정류장과 골목

서울 시내 버스정류장은 지붕이 있고 3면이 유리로 보호되어 햇볕이나 바람을 잘 막아주고 있다. 거기에 잠시 앉을 벤치와, 버스 도착을 알리는 안내판이 있어 정말 부족할 것이 없어 보인다. 그런데 어떤 동네 버스정류장 벤치는 겨울이면 따듯하게 되어 의외의 용도로 쓰이기도 한다. 앉아 계신 아주머니 할머니들이 버스가 와도 승차하지 않으시기에 물어보니 그분들은 어디 가려고 버스정류장에 온 것이 아니라 그 따듯한 정류장 벤치에서 만나 이야기도 하고 시간 보내기 위해 왔노라고 답하였다. 시골에 있는 마을회관 온돌을 서울에서는 버스정류장 벤치가 대신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일하는 학교 후문을 나서면 넓지 않은 소로(小路)가 큰길까지 연결된다. 그 소로변 한 단독주택 대문 앞에는 언제나 의자가 3~4개 나란히 놓여 있다. 여름철 이 자리는 주인과 동네 할머니들의 만남의 장소다. 의자에는 ‘가져가지 마세요’라고 쓰여 있다. 북쪽으로 난 대문 처마 그늘 아래 그들만의 이야기 리그가 진행되는 것이다.

단독주택 대문 앞 처마 밑의 의자들. 주인과 동네 할머니 아주머니들의 놀이터다. @휘경동 주택가. 사진: 김기호, 2019.
단독주택 대문 앞 처마 밑의 의자들. 주인과 동네 할머니 아주머니들의 놀이터다. @휘경동 주택가. 사진: 김기호, 2019.

요즘 우리 사회의 숨겨진 문제 중 하나는 외로움이다. 단순히 노인이나 장애인 등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의 여러 연령과 계층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과 만나고 함께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외톨이가 사회병리 현상의 하나며 때로는 비극적인 사건의 주인공이 되기도 한다.

광장과 벤치, 길가의 벤치, 그리고 정류장이나 동네의 따듯한 벤치는 사람들을 사회적 아레나(arena)로 끌어내 오는 힘이 있다. 나와서 혼자 앉아 있어도 좋다. 일단 집 밖으로 나오게 하면 반은 성공한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장소의 한 부분이 되며 서서히 그 사회의 한 부분이 되어 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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