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구 언론인, 바른사회운동연합 자문위원

이석구 언론인, 바른사회운동연합 자문위원
이석구 언론인, 바른사회운동연합 자문위원

12월 12일은 동북아 근대사의 흐름이 크게 바뀐 날이다. 이날 유독 큰 사건들이 한국과 중국에서 일어났다. 한국에서는 1979년 12·12 군사반란이, 중국에서는 1936년 장제스(蔣介石) 총통의 시안(西安) 연금 사건이 일어난 날이다. 또 1948년 대한민국이 유엔총회에서 한반도의 유일 합법정부로 승인을 받은 날이기도 하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암살됐다. 박 대통령의 18년 장기 집권이 갑자기 사라지면서 생긴 권력 공백으로 시국은 몹시 어수선했다. 민주화 투쟁을 벌이던 정치인, 재야 학생들은 민주화가 도래한 것처럼 희망에 부풀었다. 그러나 전두환, 노태우 등 ‘하나회’가 중심이 된 신군부 세력은 이날 이 같은 민주화 열망에 찬물을 끼얹었다. 이들은 12월 12일 계엄 사령관이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불법 연행, 군을 장악한 뒤 차근차근 집권 수순을 밟아 나갔다.

당시 정승화는 박 정권 때 총애를 받으며 군 요직을 차지한 전두환 등 하나회의 힘을 빼려 했다. 그는 이를 위해 하나회를 이끄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동해경비사령부로 보내려 했다. 그러나 최규하 대통령이 이를 미루며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사이 전두환 등 하나회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에 의해 12·12 하극상 반란사건이 일어났다.

신군부는 다음 해 5월 17일 격렬한 학생시위를 빌미로 비상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한편 정치인 재야인사 학생 등 2699명을 영장 없이 체포 구금했다. 이에 대한 반발로 광주에서 대대적인 민중 항쟁이 발발, 군의 진압과정에서 엄청난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우리 근대사에서 씻을 수 없는 아픈 생채기로 42년 뒤인 지금도 그 여진은 계속되고 있다.

중국으로 시선을 돌려보자. 당시 중화민국 국민당을 이끄는 장제스는 만주를 침략한 항일 전쟁은 뒤로 미루고 우선 공산당부터 토벌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는 내전에서 승리한 뒤 일본과 싸우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당시 장제스는 우세한 병력과 무기로 공산당을 몰아붙여 공산당의 홍군은 괴멸 직전이었다. 국민당군 70여만 명은 공산당 근거지인 장시성(江西省)의 중화소비에트 공화국의 홍군 8만여 명을 포위, 전멸시키려 했다. 홍군은 가까스로 포위망을 뚫고 1934년 10월 16일부터 370일에 걸쳐 1만2500km를 걸어서 도망, 산시성(陝西省) 옌안(延安) 인근으로 탈출했다. 소위 말하는 대장정이다.

그러나 장쉐량(張學良) 동북군 사령관 겸 공산당 토벌 부사령관은 장제스의 이런 정책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근거지인 만주를 일본이 장악, 서북쪽으로 밀려나 있었다. 더구나 동북지방 군벌로 실질적인 만주의 지배자였던 그의 아버지 장쭤린(張作霖)이 일본에 의해 숨진 탓으로 일본을 철천지원수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같은 민족끼리 싸우지 말고 공산당과 힘을 합쳐 일본과 싸우자고 장제스를 설득했다.

그러나 장제스는 장쉐량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장쉐량은 항일 민족주의를 부르 짖는 공산당에 감정적으로 동조, 공산당 토벌 독려차 시안에 온 장제스를 1936년 12월 12일 감금했다. 장제스는 지도자답게 일절 협상을 거부하고 버틴 끝에 무사히 석방됐다. 그러나 그는 시안사건을 계기로 공산당 토벌 작전을 중단했다. 장쉐량이 홍군에게 기사회생할 기회를 준 셈이다. 그러나 그는 시안사건으로 평생 자택 연금생활을 해야 했다.

일본이 패망하자 1946년 국민당군과 홍군은 다시 전면전에 돌입했다. 결과는 잘 알다시피 공산당의 중국대륙 석권으로 나타났다. 항일전과 부패로 힘이 빠진 국민당군은 농민들의 지지로 전력이 대폭 보강된 홍군에 일패도지했다. 1949년 10월 1일 중국대륙을 석권한 공산당은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장제스는 타이완으로 쫓겨가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초라한 신세로 전락했다.

만일 이날 12·12쿠데타나 시안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우리 근대사는 어떻게 전개됐을까? 역사에 가정은 무의미하다지만. 민주화가 앞당겨지고, 광주 유혈 참극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 중국은 공산당이 아니라 대만으로 쫓겨간 국민당이 지배하는 대륙이 됐을 가능성도 높다. 그리 됐다면 6·25도 안 일어나고, 일어났더라도 중공군의 지원이 없는 북한의 패배로 한반도는 통일이 됐을 것이다. 장쉐량, 최규하, 정승화, 전두환 등 역사적 인물들의 그때 행동이 우리에게는 정말 안타깝다. 역사에 가정은 무의미하다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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