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찬국 논설위원, 전 충남대 무역학과 교수

허찬국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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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세등등하던 세계화 추세의 김이 본격적으로 빠진 것은 미국에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고 영국이 유럽연합(EU)을 탈퇴했던 때쯤으로 보인다. 그 이전 속 좁은 소인배 뉘앙스를 풍기던 ‘자국이익 우선주의’는 이제 대로를 활보하는 형국이다. 여러 나라들의 합의로 무역장벽이 낮아지고, 국제적 공급사슬망이 확산되던 시절 무역 강국 한국의 수출 기업들은 종횡무진 활약했다. 중국을 주요 생산 거점으로, 미국과 유럽의 시장으로 연결하며 돈을 벌던 그때가 마치 걱정이 없었던 어린 시절처럼 아련해질 듯하다.

       세계화의 경제적 혜택은 광범위했는데

세계화는 왜 시들해졌을까? 경제적으로 보면 세계화는 시장이 넓어지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기업, 근로자, 정부에 득(得)이 실(失)보다 크다. 규모의 경제가, 시장의 규모가 경제적 이득으로 이어지는 기제이다. 생산량이 많으면 많을수록 고정비가 희석되며 단위당 평균 비용이 떨어진다. 세계화로 시장 규모가 커지며 제품 시장이 독과점화되었지만 물건 값이 싸지니 소비자에게도 좋은 일이다. 작금의 국가 간 무역패턴을 설명하는 데는 이런 '규모의 경제'가 필수불가결하다. 해외에서 부품을 만들거나 조달하는 오프쇼링(Off Shoring), 아웃소싱(outsourcing)도 '규모의 경제'에 기여한다.

무형 서비스재의 시장 확대도 세계화에 힘입은 바가 크다. K-팝이 해외에서 선전하는 것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고도의 기술 및 지식 집약적 상품의 개발도 세계화 수혜 분야이다. 자연과학 분야 노벨상 수상자가 다수인 나라들이 많으나 분산되어 있다. 고도의 지식집약적인 제품을 만들려면 국제적으로 구술을 꿰어야 한다. 팬데믹의 조기 진화를 가능하게 만든 코로나바이러스 백신 개발과 생산이 국제적 협업의 좋은 예이다.

세계화가 후퇴하면 전술한 혜택이 감소한다. 중국의 제로 코로나 정책 경험이 세계화를 거부하면 어떤 피해가 가능한지를 보여준다. 대도시가 봉쇄되며 일상이 마비되는 등 경제적 사회적 피해가 상상을 초월했다. 세계경제 성장세 둔화로까지 이어졌다. 전례 없던 반정부 시위가 일어날 정도다. 중국이 일찍 ‘위드 코로나’로 전환하지 못한 데에는 미국과 유럽에서 개발된 백신을 마다하고 효과가 낮은 자국 백신을 고집하며 인구 전체의 면역력을 향상시키지 못한 것이 중요하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세계화 옹호론을 파괴한 지정학적 위협

미국은 왜 반도체 첨단기술 분야 국제적 사슬망에서 중국을 배제하려고 할까. 그 이유는 기술 주도권이나 산업정책 차원을 넘어 지정학적 분야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미국에서 개발된 첨단기술이 미국과 우방을 겨냥한 무기에 쓰이고 있다. 구체적으로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가 사용한 미사일 잔해에서 서방에서 생산된 반도체가 속속 발견되었다. 미국의 관점에서 자신들이 개발한 신기술이 자국이나 우방을 대상으로 사용될 수 있는 무기의 성능 개선에 쓰이는 것을 막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두 독재 국가 러시아와 중국은 긴밀한 동맹관계를 맺고 있어 중국은 러시아의 첨단기술 조달처이다.

누가 신기술을 개발하고 어디서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따지지 않는 자유무역이 전략적 위협을 높이는 현실은 자유무역 옹호론자가 보기에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특히 러시아의 서방 민주주의 국가들에 대한 위협은 심각하다. 러시아는 2010년대 초 직접적 이해관계가 크지 않은 시리아 내전에 적극 개입했는데 이는 심각한 유럽의 중동 난민 문제로 이어졌다.

당시 ‘아랍의 봄’이 시리아로 확산되며 시작된 국민들의 평화적 시위를 아사드 정권이 잔인하게 진압하며 상황이 악화되고 내전으로 번졌다. 패색이 짙었던 아사드 정권을 러시아가 적극 지원하고 나서면서 시리아는 반군, 이슬람 극단주의자 3개의 영토로 분열되며 극심한 혼란이 이어졌다. 특히 러시아군이 반군 치하의 도시들을 초토화시키며 피란민이 대거 발생했다. 인구의 약 4분의 1에 가까운 600만 가까운 피란민이 나라 밖으로 탈출했고 다수가 튀르키에를 통해 유럽으로 향하자 EU국들이 비상 상황에 놓이게 된다.

많은 전문가들이 러시아의 개입을 푸틴의 반(反)서방 전략의 일부라고 보고 있다. 푸틴의 잃을 것 없는 시리아 도박은 대박이었다. 종교·문화적 이질성이 큰 중동의 피란민이 유입되면서 유럽 주요국에서는 극우파가 크게 득세했고, 영국의 EU 탈퇴를 ‘득템’한다. 결이 좀 다르나 미국에서도 유색인종의 유입을 통해 백인 ‘원주민’들이 주도권을 잃을 것이라는 인종주의적 여론이 트럼프가 2016년 대선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러시아가 SNS 여론 조작을 통한 선동에 적극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푸틴에게는 더 큰 득템인 셈이다.

중국은 러시아와 비교가 무색한 경제 대국이다. 아직까지 러시아와 같은 군사적 도발은 없으나 남중국해에서 무력 과시를 통해 패권주의 면모를 확실히 보여주고 있다. 특히 대만문제에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대만의 반도체 기업 TSMC가 만든 첨단 제품이 대만 내 TSMC 시설을 목표로 삼는 미사일에 쓰이고 있을 듯하니 아이러니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근래 미국과 유럽 기업들이 중국의 생산 거점 역할을 축소하고 있어 지정학적 위협이 높아지고 있음을 방증한다.

이런 현실은 서방의 정책 입안자들로 하여금 자유무역의 혜택과 안보 분야의 파급효과를 다시 저울질하게 만들었다. 지난 수십 년간 상승세였던 다자주의 국제경제 체제에 의존하기 어려워졌다는 정책적 시사점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세계화가 경제적 풍요를 지구촌 곳곳으로 가져다줄 것을 기대했던 필자와 같은 자유무역 옹호론자들은 세상이 평온해지기를 비는 것 외에 할 말이 별로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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