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철순 데일리임팩트 주필

프랑스 스트라스부르대학의 사회학 교수이며 작가인 다비드 르 브르통(69)의 저서 '걷기예찬'(김화영 역, ㈜현대문학, 2007)에는 좋은 말이 참 많이 나온다. "걷는 것은 자신을 세계로 열어놓는 것이다."라는 말로 글이 시작된다. “걷는 사람은 시간의 부자다.”라는 말도 있다,

좀 더 인용해볼까. “걷는 동안 여행자는 자신에 대해, 자신과 자연과의 관계에 대해, 혹은 자신과 타인들과의 관계에 대해 질문하게 되고 뜻하지 않은 수많은 질문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게 된다.”, “우리들의 발에는 뿌리가 없다. 발은 움직이라고 생긴 것이다.”, “걷기는 시간과 공간을 새로운 환희로 바꾸어놓는 고즈넉한 방법이다.”…,

나는 잘 걷지 않는다. 책은 많다. ‘나는 걷는다’, ‘걷기의 즐거움’ 이런 것 외에 그곳에 다녀온 사람이면 거의 다 한 권씩 내는 것 같은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에 관한 책도 여러 권 있다. 여행을 잘 다니지 않는 사람들이 앉거나 누워서 그림을 보는 걸 와유(臥遊)라고 하는데, 나는 책도 제대로 읽지 않으면서 ‘와보(臥步)’를 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다가 동네 아파트 단지 안에 테마공원이라는 이름으로 마련된 트랙을 걷기 시작한 게 한 달 가까이 된다. 215m 타원형의 트랙을 열댓 바퀴 이상 걷는데, 그곳을 걷는 것과 일상적인 보행을 합치면 하루 1만 보가 넘는 경우가 많다. 

 아파트 단지 안의 보행트랙. 한 바퀴 215m 거리다. 
 아파트 단지 안의 보행트랙. 한 바퀴 215m 거리다. 
 걸음을 되찾기 위해서 또는 걸음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람들.
 걸음을 되찾기 위해서 또는 걸음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람들.

매일같이 만나는 사람들은 나처럼 배가 나와서(배 속의 쌍둥이가 자꾸 발로 찬다) 살을 빼려 애쓰는 사람들보다는 걸음 걷기가 곤란한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많다. 할머니들은 임립(林立)한 아파트 건물 사이로 비쳐드는 햇볕을 따라 벤치를 옮겨 앉으며 볕바라기를 하면서 며느리 흉을 보거나 자식 자랑을 하곤 한다. 표정없이 혼자 앉아서 비가 내리는데도 그냥 맞고 있는 할머니도 있다.

이곳의 단골 보행자는 여성 간병인(요양 보호사?)의 도움을 받아 지팡이를 짚고 걷거나 휠체어로 이동하는 두 할아버지다. 내가 한 바퀴를 돌 때까지 그들은 겨우 10여 m를 걷거나 휠체어로 그만한 구간을 왕복하는 수준이어서 연속극의 대사를 방청하듯 그들 옆을 지나면서 토막난 대화를 이어서 듣게 된다. 주로 병원 체험, 왕년에 젊어서 활동한 이야기여서 듣기에 안쓰럽고 안타깝다.

트랙 주변에 있는 정자 2층은 바둑을 두는 할아버지들 차지다. 바둑판이 세 개 마련돼 있는데, 그들은 날씨가 궂거나 추우면 나오지 않는다. 한번쯤 올라가서 구경하며 훈수도 하고 싶지만 나는 참고 걷는다. ‘누죽걸산’, “누우면 죽고 걸으면 산다”니 바둑만 두지 말고 좀 걸으면 좋으련만 그들은 몇 시간이고 오로(烏鷺)의 수담(手談)을 즐기고 있을 뿐이다.

 걷거나 강아지를 산책시키거나 뛰는 사람들은 화살표 방향을 지켜야 한다. 
 걷거나 강아지를 산책시키거나 뛰는 사람들은 화살표 방향을 지켜야 한다. 
      정자에서 바둑을 두는 할아버지들을 먼발치에서 촬영했다.  
      정자에서 바둑을 두는 할아버지들을 먼발치에서 촬영했다.  

어느 날 유치원 아이 10여 명이 선생님들에게 이끌려 이곳에 걸으러 나왔다. 남녀 아이들이 쉴새없이 재잘대며 둘씩 손을 잡고 줄지어 걷는 모습은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그 아이들은 풋풋하게 걸음과 질서를 배우고 있는데, 건강을 잃은 사람들은 시든 낙엽이 떨어져 뒹구는 그 옆을 힘겹게 걸으며 걸음을 되찾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70~80년의 빠르고 하염없는 세월이 한 공간에 덧없이 펼쳐지는 장면이다.

앞에서 인용한 ‘걷기예찬’에는 “걷는 사람은 공간이 아니라 시간 속에 거처를 정한다.”, "걷는다는 것은 잠시동안 또는 오랫동안 자신의 몸으로 사는 것이다." 이런 말도 나온다. 걸음을 되찾으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의미가 있는 말일까. 사람은 걸을 수 있을 때 많이 걸어야 한다.

독일 외무장관이었던 요슈카 피셔(74)는 22세 연하의 아내와 네 번째 결혼생활을 하고 있다. 그는 세 번째 아내가 비만이었던 자신을 버리고 떠나자 마라톤을 통해 110kg이던 몸무게를 30kg 이상 줄이고 1999년에 뉴욕 마라톤대회 풀코스를 완주했다. 이런 경험을 쓴 다이어트 수기 ‘나는 달린다’는 베스트셀러가 됐다. 마라톤은 그냥 걷는 것과 다르지만, 무엇이든 끈질기고 한결같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점을 잘 알게 해준다.

최근에 다시 가본 오대산 월정사의 전나무숲길에는 보행에 관한 글이 많이 씌어 있었다. “나의 발이 걸음을 걸을 수 있을 정도로 튼튼하다는 것을 알아차린다면 이미 깨달은 것입니다.”, “나에게 몸이 있음을 알아차린다면 이미 깨달은 것입니다.”, “이 지구별 위에서 걷는 한 걸음마다 든든한 대지에 감사해야 한다.” 등등. 평범한 말이지만 걷는 이들에게 보행과 몸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어주는 효과는 있는 것 같았다. 

 월정사 전나숲길에서 눈에 띈 보행 격려 문구.  
 월정사 전나숲길에서 눈에 띈 보행 격려 문구.  

걷는 것은 철학을 하는 방법 중 하나라는데, 나의 관심은 일단 배에 온통 쏠려 있다. 철학은 그만두고 배가 좀 들어가기를 바라면서 열심히 걸으려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사진= 임철순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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