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학중 논설위원, 가정경영연구소장, 서울가정법원 조정위원

강학중 논설위원
강학중 논설위원

맞벌이 부부와 한부모가족, 조손가족이 늘어나면서 비자발적인 황혼 육아로 시들고 멍드는 가족이 많다. 뛰어들기도, 외면하기도 어려운 현실 앞에서 누군 즐겁고 기뻐서 젊어진다지만 누구는 힘들어서 골병이 드는 것이다. “오면 반갑고 가면 더 반갑다”, “손주 때문에 살고 손주 때문에 못 살겠다”라는 말이 그래서 나온 모양이다. 가치관과 양육 방법의 차이, 손목과 허리 무릎에 생기는 질병과 우울증, 개인 시간을 못 갖는 불만, 고마워하지 않는 자식들의 태도, 금전적인 보상을 둘러싼 묘한 신경전으로 벌어지는 문제가 절대 가볍지 않다.

형제자매 간에도 “왜 우리 아이는 안 키워주나?”, “부모님 고생 그만 시켜라.”며 다툼이 생기고 사돈끼리도 나 몰라라 하는 건 도리가 아니라며 갈등이 커진다. 맡아주겠다고 큰소리쳐 놓고 아내만 고생시키는 남편과, 손주만 챙기면서 남편은 뒷전인 아내 때문에 부부싸움도 잦다. 노부모에게 아이를 맡긴 부모들의 고충도 만만치 않고 커갈수록 손주와 조부모와의 마찰도 늘어난다.

이런 갈등과 불화를 예방할 수 있다면 일종의 계약서를 한번 써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부모와 자식 간에 무슨 계약서냐고 거부감을 나타내는 사람도 있지만 장점을 생각하면 무조건 반대할 일만은 아니다. 관련되는 사람들이 모두 모여 가족회의를 통해 중요 사항만 합의해도 갈등을 크게 줄일 수 있다. 기간, 근무 시간, 근무 내용, 급여, 근무지 등을 명기한 근무 계약서를 생각해 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언제까지, 몇 살까지 돌봐줄 건지 합의하면 기약 없는 황혼육아로 창살 없는 감옥에 갇혔다는 신세 한탄을 줄일 수 있다. 시간도 주 몇 회, 몇 시부터 몇 시까지로 할 건지, 예외가 생기더라도 주 몇 시간을 넘기지 않을 건지 원칙을 정하자. 가능하면 일주일에 세 번 이하, 하루 5시간을 넘지 않는 게 양육의 질을 해치지 않는 데 도움이 된다.

역할을 분명하게 해 두는 것도 서로의 기대치가 달라 생기는 오해나 서운함을 줄이는 방법이다. 친정어머니는 부모이면서 할머니이기도 하고 관점에 따라서 베이비시터나 가사도우미, 학습도우미로 생각할 수도 있다. 순전히 아이만 돌봐 줄 것인지 청소와 식사 준비까지 할 건지, 등·하교시키고 숙제를 도와주거나 학원이나 병원 데려다주는 일, 학교의 부모 모임에 참석하는 일까지 포함할 것인지 명확하게 합의하지 않으면 역할에 대한 기대치가 달라 원망과 서운함이 커진다.

부모와 자식 간에 돈 얘기를 꺼내는 것은 서로가 불편한 일이지만 돈 문제 역시 분명히 해 두는 게 좋다. 돈은 감사를 표현하는 또 다른 방법이다. 매월 얼마를 드릴 것인지 자녀가 먼저 말씀드리는 것이 도리다. 순수한 수고비인지 용돈인지 생활비인지도 확실하게 해야 한다. 돈 몇 푼 썼다고 달라고 하기에도 난감한 경우를 방지하기 위해서 손주를 위해 쓰는 카드를 따로 한 장 만들어 드리는 것도 방법이다. 수고비는 온라인으로 자동 이체해 주면 좋다. 드리는 것을 깜빡할 수도 있고 손주 봐준다는 명목으로 면전에서 돈 받는 것을 민망해하는 정서도 있기 때문이다. 금전적으로 보상하기가 어려운 형편이라면 부모님께 수시로 감사드리고 다른 방법으로 보답하는 성의를 보여야 한다.

누구 집에서 돌봐줄 건지, 데리고 살면서 주말에만 부모를 만나게 할 것인지 형편에 맞춰 결정하는 것이 좋다. 이 모든 사항을 대화로 합의하고 수시로 소통하고 공유하면서 조정해 나가는 유연함이 필요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주 양육자는 조부모가 아니라 부모임을 명심해야 한다. 손주와 시간을 많이 보낸다고 주 양육자가 아니라 결정권을 갖고 책임을 지는 사람이 주 양육자다. 내 자식이지만 더 이상 애 취급하지 말고 아이 부모의 양육 태도와 가치관을 존중해 주어야 부모도 책임감을 느낀다. 부모가 안 된다는 것을 조부모가 허용해 주고 오냐오냐 키우면 일관성을 잃어 손주들은 혼란에 빠진다.

중요한 정보는 공유하면서 호흡을 맞추는 한 팀이 되어야 손주를 올바르게 키울 수 있다. 손주들 앞에서 부모와 할아버지, 할머니가 다투는 모습을 보이거나 할머니, 할아버지 험담을 하는 것도 주의해야 한다. 아이들은 부모가 조부모를 어떻게 대하는가를 보고 배우기 때문이다. 부모가 손주들을 혼낼 때 손주 편을 들거나 단단히 혼내주라고 훈수를 들기보다 슬쩍 그 자리를 피해 주는 어른다운 태도도 필요하다.

아이 돌보는 일을 딸이나 며느리, 아내에게만 맡길 것이 아니라 이제 할아버지도 동참해야 한다. 은퇴 후 손주를 보살피며 느끼는 기쁨은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이다. 체력이 달려 몸은 고달프지만, 말수도 늘고 웃을 일도 많아지는 행복한 일상은 큰 선물이다. 아름다운 추억도 만들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말자. 손주와 함께하는 나날 속에서 느끼는 유대감, 다시 어린아이가 되어 손주와 몸을 부딪치며 노는 희열, 자식들을 위해서 뭔가를 하고 있다는 자부심까지, 장점도 많다.

하지만 임신과 출산, 양육을 모성애나 부모의 도리라는 이름으로 개인들에게만 떠넘겨서는 안 된다. 기업이나 국가가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가족은 지극히 사적인 영역이면서 대단히 공적인 영역이기도 하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은 기업이 필요로 하는 노동력을 제공하는 일이며 세금을 내고 국방의 의무를 다하는 자원을 양성하는 일로 애국하는 길이다. 다양한 지원 정책으로 육아의 무거운 짐을 덜어주어야 저출생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출산 장려금 살포로 천문학적인 국가 예산을 낭비할 것이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아이를 낳고 맘 편히 아이를 키울 수 있는 육아 지원으로 방향을 전환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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