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낙 논설위원, 가천대 명예총장

이성낙 논설위원
이성낙 논설위원

필자의 가슴을 파고들었던 아름다운 음악영화 한 편을 꼽으라면, 단연 1950년대 서울의 극장가에서 상영했던 흑백영화 ‘쇼팽의 이별곡(離別曲)’일 듯싶습니다. 이 영화에서, 젊은 쇼팽(Frédéic François Chopin, 1810~1849)은 파리에서 지내던 중 고국 폴란드가 러시아의 침공을 받자 충격에 휩싸여 큰 슬럼프에 빠집니다.

“프레데리크 쇼팽의 연습곡 작품번호 10-12 C단조 ‘혁명’은 고국 폴란드에서 파리로 떠나는 도중 슈투트가르트에 머무르고 있을 때 바르샤바가 러시아군에 침공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비통한 나머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작곡하였던 곡이다”라고 오재원 교수(한양대)는 그의 저서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필하모니아의 사계 I/IV》 (도서출판 이음앤, 2017, 139쪽.)

쇼팽이 연주자로서 방황하며 설 땅을 잃고 있을 때, 헝가리 출신의 천재 피아니스트 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 1811~1886)가 도움의 손길을 내밉니다. 리스트는 자신의 피아노 연주회 때, 공연에 앞서 감상의 깊이를 더하기 위해 실내조명을 끄겠다고 합니다. 그런 후 감동적인 선율의 피아노 연주가 시작되고, 연주가 끝난 후에는 어둠 속에서 환호의 박수갈채가 터져 나옵니다. 이윽고 실내조명이 켜지고 무대가 환히 밝아집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피아노 건반 앞에 앉아 있는 연주자는 리스트가 아니라 젊은 쇼팽이었습니다. 잠시 어리둥절하던 청중은 이내 더 큰 박수갈채로 쇼팽을 맞이합니다. 그 감동적인 클라이맥스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뇌리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폴란드는 결코 작은 나라가 아닙니다. 인구는 약 3800만 명에 불과하지만, 국토는 31만 2696㎢로 한반도의 1.4배나 됩니다. 다만 러시아제국, 독일제국, 오스트리아제국 같은 강대국과 이웃해 있는 지리적 조건이 ‘탈이라면 탈’이었습니다.

19세기 초 프랑스의 나폴레옹 군대가 러시아를 침공했을 때, 나치 독일의 히틀러 군대가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을 때 폴란드는 이러한 지리적 조건으로 인해 가장 먼저 큰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게다가 폴란드 국토는 대부분 평야로 이루어져 높은 산이라곤 남쪽 국경 지역에 조금 있는 정도입니다. 온 나라가 가도 가도 평야뿐인 농업국입니다.

그런데 ‘폴란드’ 하면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폴란드는 ‘노벨상 준(準) 강국’입니다. 인접한 체코 4명, 헝가리 11명, 핀란드가 4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지만, 폴란드는 무려 12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습니다. 그중에서도 문학상 분야가 무려 5명입니다. 아울러 ‘프라하의 봄(1968)’에 이어 동유럽에서 ‘제2의 봄(1989)’을 이끌어낸 국가이기도 합니다. 당시 큰 역할을 했던 레흐 바웬사(Lech Walesa, 1943~ )는 1983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이와 관련해 1960년대 독일 사회에서 회자하던 코믹한 일화가 있습니다. 폴란드 개가 국경을 넘어 체코로 가던 중 체코 개와 마주칩니다. 체코 개가 “너는 왜 우리나라로 가려고 하냐?”고 묻자 폴란드 개가 대답합니다. “너희 나라에서 실컷 배불리 먹고 싶어서 간다.” 그랬더니 체코 개가 말합니다. “나는 너희 나라에서 마음껏 짖고 싶어서 간다.” 그리고 두 개는 서로 고개를 끄덕이며 제 갈 길을 갔다는 얘깁니다. 체코는 공업국으로 생활 수준이 높아 살 만한데 언론 자유가 없고, 폴란드는 비록 가난하지만 언론 자유가 상대적으로 많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정신문화라는 측면에서 보면 폴란드는 결코 ‘작은 나라’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얼마 전 폴란드가 갑자기 첨단 자주포와 전차 같은 방산 제품을 우리나라에서 구매하기로 했다는 언론 보도가 있었습니다. 이 뉴스를 접하고 아마도 어리둥절한 분이 적지 않았을 거라고 짐작합니다. 탱크 같은 중장비는 이웃 나라인 독일이나 프랑스에서도 쉽게 사들일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여기에는 우리나라가 지닌 역사적 트라우마와 궤를 같이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잘 알려졌다시피 폴란드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입니다. 그런데 만약 독일이나 프랑스의 전차가 폴란드 들녘과 시가지를 누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과거 역사의 상흔에서 비롯된 ‘마음의 벽’이 이를 용납하지 못할 테지요. 우리 국토를 일본군 전차가 누빈다고 상상해보면 충분히 이해할 성싶습니다. 역지사지(易地思之)라고 할까, ‘상련(相憐)의 정’이랄까.

근래 오랫동안 중립국을 자처해온 핀란드와 스웨덴이 돌연 NATO에 가입하겠다고 나설 정도로 러시아가 주변국들에 공포와 경계의 대상으로 떠올랐습니다. 폴란드 역시 ‘러시아·우크라이나의 전쟁’이 자국으로 번질 가능성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긴박한 사정과 역사적 배경이 탱크와 더불어 고성능 자주포 같은 중장비를 한국에서 공급받기로 하는 데 일조한 것입니다. 물론 그에 앞서 가장 먼저 한국 무기 체계의 높은 수준을 고려했겠지만 말입니다.

폴란드가 국내 방산 중장비를 구매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필자는 고국 폴란드가 러시아의 침략을 받아 충격에 휩싸였던 쇼팽과 함께, 영국의 철학자이자 역사학자 아널드 토인비(Arnold J. Toynbee, 1889~1975)가 남긴 어록이 떠올라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역사는 그 자체를 되풀이한다.”

저작권자 © 데일리임팩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