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우현 논설위원, 한불협회 회장, 전 주 프랑스 공사 겸 문화원장, 전 숙명여대 객원교수

손우현 논설위원
손우현 논설위원

인도계 이민 3세이자 힌두교도인 리시 수낙(Rishi Sunak, 42) 전 재무장관이 지난달 24일 영국 총리로 선출됐다. 영국 역사에 총리가 등장한 1721년 이후 300여 년 만에 처음으로 비(非)백인 총리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골드만삭스 등 투자은행 업계에서 일하다 35세에 하원 의원에 당선돼 정계에 진출한 수낙은 210년 만의 최연소 영국 총리라는 기록도 세우게 됐다.

수낙의 영국 총리 선출은 영국이 선도하고 있는 유럽 다문화주의의 분수령이다. 이는 극우 세력이 득세하고 있는 유럽 대륙에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다. 인도 최대 힌디어 일간지 다이니크 바스카르는 “수낙이 인도의 모욕을 복수했다”고 보도했고, 뉴스 채널 NDTV는 “인도의 아들이 제국을 정복했다”고 전했다.

2차대전 이후 과거 제국주의의 선봉장 역할을 하던 영국, 프랑스 등 유럽 국가들은 옛 식민지 출신 이민자들이 유입되면서 다인종·다문화 사회가 되었다. 영국 통계청(Office for National Statistics, ONS)에 의하면 2019년 현재 영국 인구의 14.4%는 이민자 출신이며 이 중 인도(2.3%)를 포함한 아시아계는 6.3%이다. 프랑스의 경우도 백인이 인구의 85%, 북아프리카 출신(아랍계)이 10%, 흑인이 3.3%, 아시아계가 1.7%다. 공립학교와 공공장소에서 히잡 착용을 금지하는 프랑스와는 달리 영국은 이를 허용해 이민자들의 사회통합이 더욱 용이하다.

영국 정계에서는 수낙 총리 외에도 런던 시장도 파키스탄계 무슬림 출신이다. 또 수낙 내각의 주요 각료 중에는 내무장관이 인도계이고, 외무 장관은 모계가 아프리카 출신이다. 또 문화계에서는 이민 2세대인 일본계 영국인 가즈오 이시구로가 영국적인 소재로 작품을 써 2017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한편 프랑스 정계에도 아랍계, 아프리카계, 그리고 한국계(입양아 출신 포함) 등이 각료로 진출하고 있다. 또 TV방송 앵커로도 과거와는 달리 아랍계나 흑인 등이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지난주 프랑스 하원에서는 인종차별 발언을 한 극우 정당 국민연합(RN) 소속 의원이 제재를 당하는 등 다문화주의에 대한 반발도 만만치 않다. 제반 여건으로 볼때 프랑스에서 대통령이나 총리에 비백인이 진출하는 것은 영국과는 달리 아직은 요원해 보인다.

수낙 총리는 1980년 영국 사우샘프턴에서 펀자브 인도계 아프리카인으로 영국에 이민한 부모 야시비르 수낙과 우샤 수낙 사이에 삼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의사이며 어머니도 약사로, 수낙은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명문 사립 윈체스터 칼리지를 거쳐 영국 정·재계 엘리트의 산실인 옥스퍼드대 철학·정치·경제 전공(PPE)을 졸업했다. 월스트리트를 대표하는 투자은행 골드만삭스에서 일했으며,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받아 미국 스탠퍼드대 경영학석사(MBA)를 땄다. 2009년에는 유학 중 만난 인도 최고 재벌 중 하나인 나라야나 무르티 인포시스 회장의 딸 아크샤타 무르티와 결혼했다. 이후 여러 헤지펀드에서 일하다 2015년 35세에 보수당 하원 의원으로 선출돼 정계에 입문한 후 승승장구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더 타임스에 따르면, 수낙 부부의 재산은 7억3000만 파운드(약 1조2000억 원)로 영국에서 222번째 부자다.

수낙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가 보통 이민자들과는 달리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했으며 재력가 딸과 결혼해 서민의 삶을 모른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도 수낙의 오늘날이 영국의 교육 제도와 다문화주의를 수용하는 정치 문화의 산물임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또 영국 역사, 더 나아가서는 유럽 역사상 첫 비백인, 힌두교도 총리가 지니는 상징성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될 것이다. 역사는 혁명적인 변화 못지 않게 점진적인 발전으로 진화한다.

한편, 영국과는 달리 유럽 대륙에서는 도처에 극우 세력이 득세하고 있다. 지난달 22일 이탈리아 총리로 취임한 조르자 멜로니(Giorgia Meloni, 45) 이탈리아형제들(FdI) 대표는 극우 성향 FdI를 창당하고 유럽연합(EU) 탈퇴와 반(反)이민 등 정책을 주장해 유럽 내 중도·좌파 진영으로부터 ‘유럽에서 가장 위험한 여성’이라고 불렸던 인물이다. 그러나 근자에 와서는 과거와 달리 파시즘에 대해 모호한 입장을 취하면서 이미지 개선을 시도하고 있다. 한편 자신과 이탈리아 새 정부에 대한 우려를 불식하려는 듯 이번 내각 인선에 친(親)EU 성향 인물을 대거 등용했다.

이탈리아의 노동 인구는 10%가 이민자들이다. 이탈리아의 전통을 앞세우며 이민자, 소수자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내던 멜로니의 새 정부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우려가 적지 않다.

또 지난 9월 우파의 승리로 끝난 스웨덴 총선에서도 백인 우월주의와 반이민 정서를 등에 업은 극우 성향 스웨덴민주당이 약 21%의 득표율로 제2 정당이 되면서 극우 정당으로는 처음으로 집권 세력인 우파 정당 연합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에 앞서 지난 6월 실시된 프랑스 총선에서도 유럽의 간판 극우 정치인인 마린 르펜이 이끄는 국민연합(RN)이 예상외로 선전하여 하원 전체 577석 중 기존의 8석보다 무려 81석 증가한 89석을 장악하면서 군소 정당에서 제1 야당이 되었다. 암스테르담 대학의 루두진(Matthijs Roodujin) 교수는 이들 유럽 극우 정당의 성격을 포스트 파시즘이나 신나치주의로 규정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며 이들의 공통된 특징은 배외주의(排外主義, nativism), 권위주의, 그리고 포퓰리즘이라고 진단했다.

극우 세력의 위협에 맞서 서구 사회가 오랜 세월 끈질긴 투쟁을 통하여 쟁취한 자유민주주의와 다문화주의를 어떻게 지켜 나갈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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